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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눈이이07
가게를 나와 기춘에게 전화했다.
-이제 일 끝났어요. 어디로 가면 되요?
-어, 콜 박스 사거리 쪽에 ‘호프할레’라고 있거든? 그쪽으로 와.
-네 금방 갈게요.
택시를 타니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새벽 2시가 넘는 시간임에도 아직 거리엔 사람들이 잔뜩 이다. 참으로 불나방 같은 청춘들이구나.
"어이, 브라더! 이쪽."
입구에 들어서 두리번거리는 나를 향해 누군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살짝 술이 된 기춘이었다.
그나저나 브라더라니?
내가 언제부터 자기랑 호형호제를 맺었다고?
과한 친밀감을 드러낸 기춘은 내 손을 잡아끌더니 10여명 쯤 앉아있는 클랜원 앞에 나를 소개했다.
"여긴 같이 알바 하는 동생. 불톤데 심심하대서 불렀어."
"안녕하세요. 이도훈입니다."
"오, 잘생겼다!"
"키 크다. 키가 얼마에요?"
"기춘이형이랑 완전 느낌 다른데? 진짜 아는 사이 맞아요?"
쏟아지는 반응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얼굴을 보아하니 다들 취기가 오른 상태. 가뜩이나 초면이라 뻘쭘한 데, 나 홀로 맨 정신이라 그런지 더 적응이 힘들었다.
적당히 빈자리를 찾아 앉으려는데 기춘이 좌중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야. 그냥 앉는 게 어딨어? 후래자 삼배 몰라?"
"후래자 삼배요?"
"뒤 후後, 올 래來, 놈 자者! 늦게 온 놈은 석잔 마시고 시작한다."
그럴싸한 한자를 읊어 댄 기춘이 곧바로 소맥을 말기 시작한다. 이 새끼, 왜 오자마자 술을 맥이려는 건데?
그러나 이미 거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기춘이 주도하는 페이스에 말려든 사람들이(어차피 다들 취해서 제정신은 아니지만) 젓가락을 두들기며 박자를 타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이건 어쩔 수 없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화끈한 모습으로 신고식을 치러준다.
나는 기춘이 건네는 소맥 잔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오! 술 잘 마시네!"
"역시 잘생긴 사람이 술도 잘한다니까?"
"야, 넌 못 생겨 겼는데 왜 잘 마시냐 그럼?"
"뭠마? 옆에 오징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사람 말을 하네?"
술을 들이키며 글라스 사이로 빠르게 인물을 스캔했다.
나를 제외한 남자는 일곱, 여자는 모두 셋이다. 여자들이 나란히 붙어 있어 곁눈질 한 번에 확인이 가능한 상황.
기춘 옆에 앉은 사람은 여자 친구인 수아로 짐작되었다.
얼굴도 평범, 몸매도 평범 그 자체다.
그래도 기춘 옆에 있으니 조금 아까워 보이는 정도?
바로 옆에 앉은 여자는 혼자 더블 사이즈 침대에 잘 것처럼 비대한 몸집이 인상적이다. 테이블 앞에 쌓인 닭 뼈 개수를 보아하니, 벌써 혼자 두 마리는 먹어치운 눈치다.
‘그래도 예쁘다고 했으니 쟤는 아니겠지.’
마지막으로 끝에 앉은 여자를 보는 순간, 소맥을 코로 마시는지 입으로 마시는 모를 정도로 큰 충격이 밀려왔다.
‘헉, 그럼 저 애가 나예림?’
과장된 소매가 인상적인 하얀 플린 셔츠, 도발적으로 보이는 가죽 스커트가 각선미를 뽐내고 있다. 화사하지만 절제 된 화장. 전체적으로 도회적인 느낌을 풍기는 미인이었다.
새침해 보이는 고양이상 눈매가 빤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
‘뭘 봐?’ 하는 눈빛으로 그녀가 긴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긴다.
완벽한 차도녀.
나예림을 본 내 첫인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오오! 잘 마신다."
"여기 소맥 이발 장전이요!"
"한 잔 더해도 괜찮겠어요?"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지만, 지금 내 눈엔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회색 빛 배경 속에 오로지 나예림 그녀만이 총천연색으로 빛나고 있다.
예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으레 하는 허풍이라 생각했다.
기춘이 워낙에 허세가 세다 보니 말만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 있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눈에 확 띠는 미인이었다.
‘뭘 보긴, 지금 너보고 있잖아.’
나를 응시하는 나예림을 향해 끝까지 아이 컨텍을 유지하며 두 번째 술잔을 넘겼다. 여기서 시선을 피하면 꼴이 우스워 진다.
그녀가 이제껏 만났던 남자들이 미모에 눌려 제 발로 꼬리를 내렸다면, 나는 반대로 ‘네까짓 게 어쩔껀데’라는 심정으로 정면 승부를 시도했다. 다른 남자들과 똑같이 보지 마라, 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벌컥-벌컥-
잔을 모두 비우는 동안에도 내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결국 그녀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훗, 일단 기싸움에선 안 밀린 것 같군.
‘로시, 지금 정보창 띄워봐. 나예림 꺼.’
[아직 3m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 쪽으로 이동해 주시겠습니까?]
‘아참, 거리 제한!’
"정말 세 잔 다 마시게요?"
"기춘이형 너무하네. 우리한텐 안 그랬잖아. 좀 봐줘라."
"맞아. 오자마자 취하게 할 일 있어? 아직 밤도 긴데."
또 다시 소맥을 제조 중이던 기춘은 주변의 핀잔에 살짝 주저하는 눈치다. 난 그 틈을 타 자연스럽게 나예림 쪽으로 다가갔다.
"전 괜찮아요. 대신 안주 좀 하나만 먹어도 될까요?"
"얼마든지 먹어도 되요."
"세상에 그러고 보니 안주도 없이 투샷이나 때렸네."
"저, 그 육포 좀 주시겠어요?"
마른안주는 나예림 바로 앞에 있었다.
내가 빤히 그녀를 쳐다보자 예림은 망설이면서 육포 한 조각을 건넸다. 나는 최대한 정중히 육포를 받아들고는 다시 세 번 째 잔을 들이켰다.
꿀꺽- 꿀꺽-
[나예림의 정보창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디스플레이에 띄워놓겠습니다.]
‘오케이.’
"우아! 진짜 화끈하게 잘 마시네!"
"그래도 3연속 소맥은 심했다. 일마치고 바로 왔을 텐데..."
"맞아. 3연벙도 아니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늦게 왔으니까 도수는 맞추고 놀아야죠."
"캬~ 완전 남자네, 남자야!"
"아무튼 반가워요."
화통한 신고식을 치른 나는 적당한 자리에 끼어 앉았다.
공교롭게도 기춘의 여친 과는 맞은편, 나예림과는 대각선에 위치한 자리였다.
"어뜩해요. 너무 한 번에 많이 마셔가지고...괜찮으시겠어요?"
자리에 앉자마자 기춘의 여친이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건넨다. 애는 좀 사람이 됐구나.
나는 괘념치 말라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저 술 쌔요. 걱정 마세요."
다행히 도훈의 몸은 술이 잘 받는 편이었다.
일전에 하린이와 맥주를 마실 적에도 느꼈지만, 맥주 한 캔을 정도는 얼굴에 티도 잘 안 났다. 주량을 끝까지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느낌상 소주 2~3병 정돈 너끈할 것 같다.
‘그나저나 저 새낀 왜 오자마자 소맥을 먹인 거람? 나한테 무슨 악감정 있나?’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했지만, 일단 분위기 적응부터가 먼저였다. 오늘은 특히 두 사람을 동시 공략해야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나는 슬쩍 시계를 보는 척 나예림의 정보창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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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나예림
나이 : 23
호감도 : 62/100
개방성 : ???
성감대 : ???
성욕지수 : ???
공략팁
*정보를 확인하기엔 아직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그녀는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이상형입니다.
-그녀는 당신이 보여준 남자다운 모습에 이성적 호감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남자들의 지나친 관심에 염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그녀에겐 질투심을 유발하는 전략이 효과적입니다.
-추천행동 : 은근한 무시로 도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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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라고? 초면인데 호감도가 왜 이렇게 높지?’
[첫인상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신 것 같습니다. 이 수치면 클럽에서 헌팅을 해도 에프터를 받을 수 있는 수준입니다.]
‘아하,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이 이상형이면 딱 나네. 근데 안 그런 여자도 있나?’
[보편적인 여성들의 취향은 그렇습니다만, 저런 문구가 나왔다는 것은 정말로 그런 남자들만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아하. 기춘이가 얼굴값 한다더니 이게 그 말이구나.’
그나저나 은근한 무시로 도발해야 호감도가 올라간다니...
취향 한 번 괴상한 여자다.
보통 자기한테 관심을 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게 정상인 반면, 어딘가 정신세계가 왜곡된 것 같다.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보지?
나는 정보창의 추천 행동을 충실히 따라 나예림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수아에게 말을 걸었다.
"형수님 얘긴 형한테 자주 들었어요."
"형수님이라뇨. 저보다 오빠시잖아요. 말 편히 하세요."
"그래도..."
불쑥 기춘이 끼어들었다.
"야. 괜히 애들 호칭 꼬이게 말고 편하게 해. 남자가 말이야, 그런 건 쿨하게 해도 돼."
또 나왔다. 저놈의 남자가.
좆도 작을 거 같은 새끼가, 어제부터 자꾸 남자 남자 거리네.
하지만 나란 인간은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다.
"넵. 형님 말 듣고 그럼 편히 할게요."
"역시 내가 동생 하나 잘 뒀다니까? 나 잠깐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수아 너가 놀아주고 있어."
기춘은 수아의 머리를 툭툭 치더니 화장실로 향했다.
삼자가 봐도 기분 나쁠 것 같은 터치에 수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뭐지? 분위기 애매한데, 저 커플.’
[기춘의 평소 행실로 보아 연인에 대해 배려가 지나치게 부족해 보입니다.]
‘딱 봐도 그래 보인다. 말도 함부로 하고. 완전 하인 취급이구만.’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게 한 번 자리 잡으면 좀처럼 바뀌기 힘든 면이 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저런 식의 주종관계가 형성되어 버린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고 순진한 여대생.
상남자를 자처하며, 자박꼼이나 외쳐대는 허세남 기춘.
수아의 처녀를 빼앗고 정복 군처럼 행세하는 기춘이, 그녀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착하고 여린 수아는 차마 헤어지자는 말도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는 연애를 이어왔겠지.
씹새끼.
아무리 수아가 평범해도 너보단 아까워 보이는데...
기춘이 저놈은 알면 알수록 정이 안가는 새끼다.
"이름이 수아씨랬죠?"
"네."
수아가 수줍게 대답했다.
걱정마라.
내가 껌딱지 같은 저놈을 네 곁에서 해방시켜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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