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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34화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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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눈이이05

나는 이쯤에서 기춘을 한 번 떠보기로 했다.

"형, 근데 소개시켜 준다는 얘, 혹시 형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엉?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솔직히 형 정도면 어디 가서 안 꿀리잖아요. 거기다 카리스마까지 넘치고."

기춘이 고개를 갸우뚱 한다.

정말인가? 하고 고민하는 표정이다.

나는 좀 더 바람을 넣어 보았다.

"왜 여자애들 그런 거 있거든요. 자기가 관심 있는 사람한테 일부러 남자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거. 그거 다 찔러보는 거예요."

"진짜?"

진짜긴 병신아.

니가 하도 껄떡대니까 ‘너 말고 다른 놈’ 찾아 달라는 거지.

무식한 새끼가 눈치까지 없으니, 원.

"그렇다니까요? 괜히 말은 걸고 싶은데, 핑계 댈 건 마땅치 않으니까 소개팅 해주라면서 외로운 티 팍팍 내는 거죠. 형, 솔직히 말해 봐요. 걔가 형한테 고백한 적 있죠?"

기춘의 얼굴이 살짝 상기된다.

솔직하게 아니라고 말할지, 아니면 되지도 않는 가오를 부릴지 고민하는 모양새다.

넌 절대 도박하면 안 되겠다.

아주 얼굴에 패를 다 써놓는 구만.

"꼭 그렇게 대놓고는 아닌데... 하긴 그러고 보니 유달리 나한테 까칠하긴 했어. 난 그래서 걔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지."

예상대로 놈은 가오를 선택했다.

허세를 부리는 기춘을 향해, 나는 옆에서 열심히 부채질 해주었다.

"와! 거봐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게 다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관심 끌라고."

"그런가?"

"걔가 남자들 대쉬해도 다 쳐냈다 그랬죠?"

"맞아. 그래서 별명이 ‘철벽녀’야. 절대 안 뚫린다고. 철벽녀 나예림."

"이름이 나예림이구나. 이름 예쁘네요."

"몸맨 더 죽여. 작살나 그냥."

기춘은 나예림의 몸매를 떠올리는지 입가에 침을 흘렸다.

"암튼, 제가 볼 때 예림이가 형한테 관심 있는 거 같아요. 아마 이번 소개팅도 형 한 번 떠 볼라고 받은 걸걸요?"

"그래? 근데 왜 여태 내색 한 번 안했지?"

"그거야 어쩔 수 없었겠죠. 형 옆에 형수님이 있으니까."

"아하, 그렇구나!"

에라이, 쪼다새끼.

우쭈쭈 해주니까 아주 정신을 못 차리는 구만.

솔직히 너라면 너 같이 음흉한 새낄 좋아 하겠냐?

지금 여친도 순진한 얘 자빠뜨려서 사귄 거라며.

"에이, 김샜다. 저 그냥 내일 모임 안 가는 게 좋겠어요."

"왜 또 그래?"

기춘이 나를 붙잡는다. 빈말이 아니고 진심으로 만류하는 표정이다. 비위 좀 맞춰주니까 그새 호감도가 상승했나보지?

"가봤자 꿔다 논 보릿자루신세잖아요. 어차피 나예림은 형한테 관심 있을게 뻔한데."

"인마. 그래도 난 여친이 있잖아."

기춘은 나예림이 자길 좋아하는 말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스스로 허세에 도취돼 거짓말을 진짜로 믿어 버린 모양이다. 이정도면 거의 리플리 증후군이 아닌가 싶다.

"형. 막말로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요? 형이 맘만 먹었음 벌써 수십 골은 넣었겠죠. 안 해서 그렇지."

‘수십 골은 넣었겠죠’라는 표현에, 기춘은 야릇한 장면을 상상했는지 아랫도리를 들썩였다.

니가 오늘 아주 육갑을 떠는구나.

우린 한동안 가네 마네 밀당을 계속했다.

거듭된 설득에도 내가 자꾸 몸을 사리자, 기춘이 정색하며 말했다.

"야! 이미 당사자한테 말 다 해놨는데 이제와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어?"

느닷없이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놈은 이를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볼 땐 그냥 꼰대의 진상일 따름이다.

그래도 장단은 맞춰줘야지.

나는 겁먹은 척 움찔거렸다.

"아, 아니 형 화내지 마시구요. 그냥 제 입장이 애매하잖아요."

"그래도 인마, 남자가 말이야! 약속을 했으면 지킬 줄을 알아야 되는거야!"

나왔다.

허세남이 가장 즐겨 쓴다는 전가의 보도, "남자가 말이야"

물론 저런 말 하는 사람치고 진짜 사내다운 놈은 한 번도 본적 없다.

나는 기세에 밀린 것처럼 바짝 몸을 움츠리고 대답했다.

"...알겠어요. 일단 참석은 할게요. 어차피 걘 나한테 관심 없겠지만."

"너가 잘하면 되지. 너도 제법 쓸 만하다니까?"

너도?

방금 너도라고 한 거야?

와, 내가 김기춘 따위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구나.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지만,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쨌든 밑장은 다 깐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탄을 만들 차례다.

난 뭔가 생각난 것처럼 기춘에게 말했다.

"형, 차라리 이러는 건 어떨까요?"

"뭘?"

"낼 소개팅 자리면 둘이서 따로 볼 거 아니에요. 저랑 나예림이랑."

"난 우리 클랜 애들이랑 같이 술 마시다 움직일랬지. 너 일마치고 올 때쯤이면 대충 파장될 것 같아서. 근데 그건 왜?"

"암튼 형도 주선자로 따라오실 거죠?"

"그래. 소개만 시켜주고 난 빠질 거야."

"그러지 말고, 그냥 형해요."

"뭐?"

"예림인가 하는 얘, 형이 가지라구요."

"무슨 소리야? 내가 너 소개 시켜주려고 부른 자린데..."

말은 그리 하지만 기춘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솔깃한 제안이라는 증거다.

"제가 대충 사정 들어보니 어차피 낼 소개팅은 생색내기 밖에 안 될 것 같아요. 그럴 바에야 형이나 밀어 드리려구요. 제가 형한테 신세 진 것도 많고 하니까."

기춘은 반색하다가도 뭔가 의심이 드는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야, 근데 니가 예림이를 아직 안 봐서 그래. 걔 진짜 존나 이쁘다니까? 얼굴만 이쁜 게 아니고 몸매도 죽여. 나중에 너 후회한다, 진짜."

"형, 저 솔직히 말해도 되요?"

"뭔데?"

"제가 사실 연상 취향이거든요. 어린애들은 별로 관심 없어요."

***

"제가 사실 연상 취향이거든요. 어린애들은 별로 관심 없어요."

도훈의 대답에 기춘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이 새끼 그러고 보니 마흔 살 넘은 여사장이란 그렇고 그런 사이였지? 뭔가 납득이 되는데?’

그러나 기춘은 여전히 찜찜했다.

"니 뜻은 알겠는데, 나 여친이랑 같은 클랜이잖냐. 정기 모임이기 때문에 여친도 낼 술자리 올 거란 말이지. 나중에 소개팅 자리까지 따라 올거고."

도훈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뭐 어때요, 그럼 2대2로 짝 맞춰 놀면 되지."

"2대2라고?"

"그게 더 자연스럽잖아요. 술 먹고 게임을 하던, 노래방을 가던... 솔직히 새벽 늦게 만나는 건데 첨보는 사람끼리 어색할 거 아니에요. 그냥 그러지 말고 첨부터 커플 데이트처럼 노는 거죠."

"커플 데이트라..."

기춘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남자 둘, 여자 둘.

넷 다 솔로면 모를까, 애초에 밀어주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대놓고 바람을 피라는 건가 뭔가?

"여친은 어쩌고?"

"뭘 그런걸 걱정해요. 술 잔뜩 먹여서 먼저 보내버리면 되지. 제가 어떻게든 형수님 보내고 빠질 테니까, 형은 남아서 예림이 드세요."

"내가 예림이를...?"

"형이 아까 그랬잖아요. 여자들은 자지 박히면 꼼짝 못한다고. 어차피 예림이도 형 좋아하고, 형도 맘 있잖아요. 내일 잘 되면 갈아타는 거고, 안 되도 섹파라도 하는 거죠."

‘와, 씨발... 이 새끼 존나 순진한 줄 알았는데 예사로운 놈이 아니었구나. 하긴 40대 여사장하고 편의점 창고에서 보란 듯 떡 치는 새끼가 순진할리가 없지. 이래서 명문대 다녀도 사내새끼들은 다 똑같다니까?’

도훈의 제안에 기춘은 괜히 마음이 들떴다.

특히 ‘잘되면 갈아타고, 안되면 섹파하고’ 이 문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생각대로만 진행 된다면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클랜의 여신, 아니 서버 내에서도 손꼽히는 미인 나예림을 먹는다? 그건 정말이지 초대박 사건이다.

사장을 육노예로 만든 것도 좋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복감을 안겨 줄 것이다.

‘흐흐흐. 그나저나 예림이 나한테 엄청 까칠하게 굴더라니, 그게 다 관심 받을 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였단 말이지? 하도 성격 지랄 맞아서 도훈이놈 한테 넘기려고 했더니만... 죽 써서 개줄 뻔 했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건데?"

도훈은 누가 엿듣기라도 할 것처럼, 기춘 옆으로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기춘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만면에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물론 도훈이 자길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체였다.

***

‘이 정도면 대충 판은 짜놓은 셈이군.’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기춘이 그렇게 쉽게 작전에 걸려들 줄 예상 못했다.

병신같은 새끼.

의심 한번을 안 하네.

내가 미쳤다고 너한테 여잘 밀어주겠냐?

예림이고 수아고, 다 내가 먹을 거다.

넌 그냥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원룸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여자 신음이 들렸다.

"하앙...하...하아...."

나는 돌이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소리의 진원지가 바로 내 옆방이었던 것이다.

‘설마 포스트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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