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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눈이이04
기춘을 기다리며 앞으로의 일정을 떠올렸다.
개강 전까지 대략 보름 정도.
슬슬 알바생 이도훈이 아닌, 대학생 이도훈의 삶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사람 인생이란 정말 한 치 앞을 모르는 거구나.’
현재를 후회하는 사람일수록 과거를 추억한다고 한다.
다시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고등학교 3년만이라도 마음잡고 공부했으면···
복학하고 취업준비만 열심히 했어도···
인생은 늘 후회의 연속이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말처럼, 우리는 두 갈래 길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를 피할 방법은 없다. 뭔가를 선택한다는 건, 뭔가를 포기한다는 말과도 같으므로.
하지만 나는 ‘진짜’로 돌아와 버렸다.
비록 내 삶이 아닌, 이도훈의 삶 속이지만.
예전에 잡지에서 본 설문조사 결과가 떠오른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가장 해보고 싶냐 는 질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공부’를 택했다고 한다. 학창시절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적어도 난 아니다.
공부라면 전생에 이가 갈리도록 해봤다.
머리가 좋긴 했지만, 머리만 좋다고 다 공부를 잘하진 않는다. 나는 단언컨대,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이번 생에는 가보지 못한 길을 가고 싶다.
여자도 실컷 따먹고, 청춘을 원 없이 즐길 것이다.
최대 다수와 최다 성교.
그것이 이번 삶의 목표다.
‘알바도 길어야 다음 주 까지겠군.’
학기를 시작하고도 알바를 계속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즐길 시간도 부족한데 하루 8시간을 이곳에 투자하는 건 바보짓이다. 용돈문제가 살짝 걸리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김기춘 이 새끼만큼은 처리하고 간다.’
아까 사장에게 별일 아니라고 거짓말 한 건, 내 선에서 놈을 끝내기 위해서다. 괜히 여러 사람 끌어 들일 필욘 없다.
놈은 내가 조진다.
몰려드는 손님들을 정신없이 받다 보니 어느덧 교대 시간이 다 되었다.
기춘은 스냅백 모자를 쓰고 출근했다.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데 살짝 옆으로 비튼 것이 한껏 신경 쓴 모양새다.
귀에다 때려 박아라,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란다.
들어봤냐? 패.완.얼!
"형 오셨어요?"
속마음과 달리 나는 활기찬 목소리로 그를 반겼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을 품는다.
나와의 관계를 빌미삼아 사장을 협박하려 했던 놈에겐, 이런 내가 속없는 놈처럼 보일 거다.
맘대로 생각해라. 착각은 자유니까.
"여어, 도훈이 고생했다."
"고생은요, 참. 컴퓨터 바꿨던데요?"
일부러 컴퓨터를 언급하자 놈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언짢음?
안타까움?
아무튼 유쾌한 기분은 아닌 건 확실하다.
"아침에 바로 기사 왔더라. 완전 맛탱이 가버려서 통째로 바꿔야 한다고."
"네, 들었어요. 저도."
기춘이 갑자기 생색을 낸다.
"근데 사장한테 내가 너 엄청 변호해 준거 알고는 있냐?"
"어떻게요?"
"선반에 아슬아슬 걸쳐 있어서 도훈이 아니었어도 언젠간 넘어갔을 거라고. 걔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말라고."
"아···고마워요, 형. 역시 형밖에 없네요."
웃기고 있네.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놈의 진심이 궁금했다.
이어폰을 조작해 놈의 속마음을 읽었다.
(씨발, 좆같은 새끼. 저 새끼 땜에 아까운 영상만 날렸잖아? 그래도 상관없어. 사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면 분명 또 다시 찍힐 날이 있겠지. 맨날 CCTV 돌려서 확인해야지.)
...
여전히 개새끼다.
뭐? 사장 앞에서 변호를 해?
지랄 옆차기나 하세요.
그나마 다행인건 그가 나를 너무 믿는 것인지, 아님 단순히 멍청해선지 내 고의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를 깍듯이 대하기로 했다.
사람을 상대해 본 경험상, 쥐뿔도 없는 놈일수록 아부에 취약하다. 그게 스스로의 숨통을 조이는 것인지도 모르고.
"참, 너 낼 약속 안 까먹었지?"
"당연하죠. 저 소개팅 시켜주신다면서요."
"인마. 그니까 잘하자, 응? 어제같이 사고치지 말고."
"넵, 형님."
아이템을 다 써 확인 못하지만 분명 소개팅 시켜준다는 여자도 어딘가 하자가 있을 것이다.
놈의 본심을 확인한 이후부터 모든 호의가 가식처럼 느껴진다. 하여간 뻔뻔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로시, 남성의 정보창도 볼 수 있다 했지?’
[네, 가능합니다.]
‘지금 기춘이 꺼 띄워봐.’
[알겠습니다.]
기춘이 교대를 위해 옷을 갈아입는 사이 그의 정보 창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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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김기춘
나이 : 26
호감도 : 37/100
성취향 : ???
변태성 : ???
여성편력 : ???
공략팁
*정보를 확인하기엔 아직 호감도가 부족합니다.
-호감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다음 멘트를 추천합니다.
-추천멘트 : "형 정말 카리스마 있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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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거랑 완전 다르네?’
[네, 대부분의 남성들은 개방성과 성욕지수에서 최고 점수를, 성감대의 경우 특정 부위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정보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성의 경우, 위의 3가지가 정보가 제공됩니다. 또한 공략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호감도 55이상부터 모든 정보가 공개 됩니다.]
"오호라. 근데 호감도 50이 평균치라지 않았냐? 37은 뭔데?"
10이하는 불구대천의 원수.
20이하는 상종도 싫은 인간.
30이하는 지나가는 방아깨비 비슷,
40이하는 같이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사람이란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40임을 감안할 때 기춘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같이 있으면 괜히 불편하고 지나가는 방아깨비보다 좀 더 나은 수준이란 의미였다.
‘아오! 알고 나니 더 열 받네. 이 새낀 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어쩌면 지난 CCTV건과 어젯밤 컴퓨터 고장으로 호감도가 급격히 감소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긴, 아무리 표리부동한 인간이라도 이 정도로 겉과 속이 다를 순 없겠지.’
기춘의 음흉함을 몰랐을 땐 그저 속 좋은 형이라고 생각했다. 깜빡한 택시비도 꼬박꼬박 챙겨주고, 생각해주는 척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가 그의 잔정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참으로 나쁜 새끼였다.
아이템이나 정보창 스킬이 아니었더라면 깜빡 속고 말았을 것이다.
"근데 소개 시켜준다는 여잔 뭐하는 사람이에요?"
기춘이 환복하고 돌아오자 내가 물었다.
별로 관심은 없지만 속없는 연기를 해야 한다.
"너랑은 갑이야. 지금은 쉬고 있고."
"쉰다고요?"
"대학도 안다니고 미용기술 배운다고 깝치더니, 실기 떨어지고 지금은 그냥 노는 것 같더라. 가을 쯤 다시 친다던가?"
"아···"
"근데 존나 이뻐."
"네?"
"내가 겜하는 애들 많이 만나봤는데, 걔 진짜 대박이야. 첨에 정모하러 나왔을 때 무슨 여신 강림한 줄?"
"그 정도에요?"
"얼굴도 무슨 아이돌 닮았는데, 몸매도 완전 쩔어."
"우아!"
"근데 전에 말했지만 얼굴값 심하게 하더라. 우리 클랜서 좆달린 새끼들은 다 들이댔다고 보면 되는데 모두 까였지."
보나마나 기춘이도 까였겠군.
"암튼 넌 와꾸가 되니까 먹힐지도 몰라. 잘 되면 나한테 한턱 쏴라. 알았지?"
"네, 형. 당연하죠."
싱글벙글 대답은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나를 지나가는 방아깨비보다 좀 더 나은 수준으로 보는 기춘이, 선의를 가지고 괜찮은 여잘 소개시켜 줄 리 없다.
분명 뭔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참, 형 여친도 겜에서 만났다지 않았어요?"
"수아?"
"형수님 성함이 수아에요?"
"형수님은 무슨. 너보다 한 살 어렴마. 말 편하게 해."
"에이, 어떻게 또 그래요. 근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난 거예요?"
돈을 세던 기춘은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과거를 회상했다.
"···그니까 그게 재작년 이 맘 때쯤이던가?"
***
기춘은 2년 전에도 하드게이머였다.
물론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마찬가지.
그의 인생은, 게임을 빼고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연을 맺고 있었다.
주로 ‘애저씨’라 불리는 폐인들이 활동하는 게임에서, 그는 비교적 나이가 어린 축이었다. 그러나 레벨도 높고 직급도 높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보았다.
"한 번은 정모를 하는데 백돼지가···"
"백돼지요?"
"우리 클랜에 희여멀건한 안여돼 새끼 하나 있거든. 지금은 군대 갔지만. 암튼 걔가 지 여동생을 정모에 데려 온 거야. 이제 막 겜 시작했다고, 잘 봐달라며."
"그게 지금 여친 이에요?"
"응. 근데 애가 어려서 그런지 남자를 한 번도 안 사겨 봤더라고. 엄청 순진했지. 그래서 내가 엄청 챙겨줬거든. 사냥도 맨날 같이 다니고, 물약도 사주고."
"오호. 그럼 게임으로 꼬신 거네요?"
"글치. 그리고 솔직히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러운데 내가 좀 사람들 휘어잡는 그런 거 있잖아. 그 뭐야, 카···."
"카리스마요? 맞아요. 가끔 보면 형 정말 카리스마 넘치더라고요. 인정."
"크크. 아무튼 그런 모습이 멋있게 보였었나봐."
지랄. 모자나 똑바로 써, 이 새끼야.
대갈통 확 부셔버리기 전에.
맘에도 없는 소릴 하려니 손가락이 굽어지는 것 같지만, 내 낯가죽은 의외로 두꺼운 편이었다.
아, 이정우 40년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은 건 아니구나.
추천멘트의 영향인지 기춘의 입 꼬리가 광대까지 승천했다. 호감도도 조금 상승했겠지?
"여튼 여차저차 그렇게 친하게 지내다가 둘이 술 먹기로 한 날 확 자빠뜨려 버렸지. 크크. 원래 여자들 자지 박으면 꼼짝 못 하거든. 그렇게 사귄 거야."
그거 강간이잖아, 개새끼야!
이름만 거지같은 줄 알았더니 인성도 쓰레기네?
속으로 쌍욕을 퍼부으면서도 나는 애써 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와, 역시 형님! 완전 남자다잉!"
내가 한물 간 유행어를 건네자, 기춘이 뭐가 좋다고 해벌 쭉 웃는다.
그래. 많이 웃어라.
내일은 눈물 쏙 빼게 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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