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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생그녀06
"...형, 저 택시비 주셔야죠."
나는 굳게 쥔 주먹을 애써 풀며 말했다. 딱딱하게 굳은 안면 근육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아! 깜빡했다. 오천원이면 되지?"
"네."
이정우의 자제력이 아니었다면 놈의 면상에 주먹부터 날렸을 거다. 바뀐 몸으로 아직 싸워본 적은 없지만, 눈앞에 건들거리는 김기춘 정도는 한방에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저지르고 생각하는 건 곤란하다.
무슨 일이든 생각하고 저질러야 한다.
그건 내가 이정우로 40년 동안 살아오면서 익힌 교훈이다.
‘흥분해선 안 돼. 여기서 놈을 때려 눕혀 봐야, 나만 폭행죄로 끌려 가겠지.’
가슴은 분노로 진탕 쳤지만, 내 머리는 이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도훈의 뜨거운 혈기를, 이정우의 차가운 이성이 억누르는 형국이었다.
‘기춘은 CCTV 영상을 이용해 사장에게 덫을 놓을 생각이야. 그게 공갈협박이고 명예훼손에 이르는 범죄라지만, 놈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면 이런 또라이 같은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을 테지.’
차라리 쪽팔림을 감수하고, 콩밥을 먹이는 방법도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두고 증거를 확보해서 신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여러 사람이 다친다.
막장까지 몰린 김기춘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동네방네 소문을 낸 뒤 자폭해 버리면 그야말로 상처뿐인 승리다.
나 역시 구설수에 오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여 학교까지 소문이 번지게 되면, 이후의 대학생활까지 지장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원주인인 이도훈에게도 못할 짓이다.
‘...문제는 놈의 범죄가 아직 실행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구체적인 물증은 없다. 경찰서에 가서 저 새끼가 범죄를 모의 중이라며 떠들어 봐야, 나만 미친 사람 취급 받는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놈의 생각을 읽었노라 답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이걸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아무도 다치지 않고 놈을 조질 수 있을까?
이제 그 방법을 강구할 차례다.
"형, 저 그럼 가볼게요."
"그래. 고생했다. 환복하고 퇴근해라."
"네."
다행히 아까 속마음을 읽을 당시 알아 낸 사실이 있다. 기춘 역시 아직까지 CCTV 영상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아침에 갑자기 불려나와 영상을 봤으니 그땐 파일을 빼낼 생각까진 못했겠지.
일단은 이것부터 날려버려야 한다.
파일만 없애면 기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복수는 그 다음 문제다.
나는 환복 하는 척 하며 CCTV 녹화용 컴퓨터를 건드렸다. 절전 모드 되었던 모니터가 켜지며 패스워드를 요구했다.
‘흠, 패스워드를 알아봐야 프로그램 사용법을 모르니 답이 없고...아에 컴퓨터를 부셔버려야 겠다.’
난 어려서부터 하드웨어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 외에 유일한 취미라 부를 만 한 게 하이엔드 피씨 꾸미기였을 정도니까.
그런 나에게 조립 같은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조립의 역순이 바로 분해지.’
나는 전원을 켠 채 녹화용 컴퓨터 옆 판을 뜯었다. 손으로 돌릴 수 있게 된 나사를 빼내자 먼지 가득한 본체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 상태로 소켓에 박힌 램을 뽑아 분질러 버렸다.
또각-
다시 램을 욱여 넣고, 본체 뚜껑을 닫았다. 그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 졌기 때문에 밖에서 가게를 보고 있는 기춘으로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책상 끝에 세워진 본체를 바닥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우당탕-!!!
"으악!"
"뭐야? 무슨 일이야?"
본체가 쓰러지면서 요란한 소음을 내자 기춘이 다급하게 창고로 달려왔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기춘에게 말했다.
"아... 옷 갈아입다 본체를 팔로 쳐버린 것 같아요."
"뭐라고? 그게 뭔 소린데!"
기춘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본체를 보더니 뻥진 표정이 되었다.
"컴퓨터 고장 났음 어쩌죠?"
"아... 씨바! 좃됐네, 진짜!"
당연히 좃됐지.
메모리가 아작 난 컴퓨터는 절대 부팅 될 수 없거든.
기춘은 쓰러진 본체를 들어 원상복구 시킨 뒤 전원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뚜-뚜- 거리는 소리만 울릴 뿐 컴퓨터는 다시 켜지지 않았다.
보통 조립을 자주 해본 사람들은 메인보드 비프음만 듣고도 에러 증상을 가늠할 수 있다. 두 번 반복해서 울리는 저 비프음은 램소켓 불량이라는 사인이었지만, 기춘은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병신...게임만 좋아했지 완전 컴맹이네. 저 수준이면 하드 디스크 쪽은 손 안대도 괜찮겠는데? 어디 속마음을 읽어볼까?’
(와, 씨발 완전 좃됐네. 이 새끼는 하필 오늘 컴퓨터를 작살내고 지랄이야. 영상은 어떻게 빼지?)
"난리 났다 이거. 켜지지도 않네. 컴터 완전 맛탱이 간 것 같은데, 어쩌면 좋냐?"
"죄송합니다. 제 돈으로 수리비 내서라도 고칠게요."
"임마! 이 시간에 어디서 기사를 부를건데?"
"네? 당연히 낼 아침 불러야죠."
기춘은 순간 자신이 말실수 한 것을 깨닫고 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아,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오늘 밤 CCTV 녹화가 안 되면 곤란하단 소리였지. 도둑이라도 들면 어째?"
‘웃기고 있네. 그걸 변명이라고 하냐?’
"정말 죄송해요. 사장님한텐 제가 문자 남길 게요. 제 실수로 CCTV 컴퓨터 고장 내서 낼 아침 바로 수리기사 불러야 할 것 같다고요."
"그, 그렇게 해. 임마, 난 소리 듣고 창고 진열장이라도 넘어간 줄 알았잖아. 어디 다친 덴 없지?"
‘빨리도 물어 본다, 씹새끼.’
"전 괜찮아요."
나는 그 길로 바로 퇴근해 사장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새벽 2시간 넘은 시각이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장문의 문자를 남겼다.
-사장님. 기춘이 형이 CCTV 영상을 돌려 보다 뭔가 낌새를 챈 것 같아요. 혹시나 싶어 제가 녹화용 컴퓨터 망가뜨려놨으니 낼 아침 컴퓨터 기사 부르는 데로 통째로 갈아버리세요. 하드디스크도 폐기하구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저한테 전화 주세요.
집에 들어가 눈을 감는데 기춘의 행동이 괘씸해 잠이 오질 않았다. 당장 급한 불은 껐다지만, 어쨌든 놈의 본색을 알아 챈 이상 이대로 둘 순 없는 일이었다.
‘김기춘. 너 사람 잘못 건드린 거야.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아주 작살을 내줄테다.’
전생에 칼 맞고 죽고 나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하나 있다.
당한 만큼 돌려주지 않으면 그 억울함이 평생 한(恨)으로 남는 다는 사실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제부터 나는 기춘에게 그 단순한 진리를 몸소 일깨워줄 생각이다.
‘로시, 도훈의 인생에 누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사로운 복수 정돈 괜찮은 거지?’
[물론입니다. 플레이어를 농락하려는 자는 응당 처벌 받아 마땅하지요.]
‘역시. 넌 내 편이구나.’
[전 언제나 주인님을 응원하니까요.]
***
새벽부터 걸려온 전화에 잠을 설쳤다.
-문자 받고 놀라서 바로 전화했어.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호들갑 떠는 사장을 진정시키며 자조치종을 설명했다.
물론 기춘의 음모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얼버무렸지만, 만에 하나 찝찝함을 남기면 안 되니 컴퓨터는 새로 갈아치우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통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아직 7시도 안된 시각.
오후에 힘쓸 일이 남은 나로선 피로가 남아선 곤란했다.
나는 로시에게 11시에 깨워달라고 명령한 뒤 다시 잠을 청했다.
파지직-
"으악! 뭐야!"
손목을 찌르르 밀려오는 전기 충격에 정신을 차린 나는 다짜고짜 로시를 꾸짖었다.
‘야! 내가 이걸로 깨우지 말랬지?’
[주인님이 분명 11시에 깨워 달라 하셨습니다.]
‘내가 그랬어?’
생각해 보니 잠결에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군.
폰을 확인하니 문자 두 개가 도착해 있었다.
-사장님
도훈학생 말대로 아침에 기사 불러다 컴퓨터 새로 바꿨으니 이제 안심해도 돼. 참, 수리비는 신경 쓰지 말구.
"당연하지. 자길 구해준 걸 알면 오히려 내가 돈 받아야 될 입장이구만."
두 번째 문자는 사장의 딸 하린이 보낸 것이었다.
-오빠, 나 12시 쯤 갈게요. 술을 제가 사가야 되나요?
"아주 모녀가 쌍으로 나를 찾는구나. 그나저나 집에 술이 있던가?"
냉장고를 뒤지자 안쪽에 6캔 맥주 세트가 보였다.
저거면 충분하겠지?
나는 하린이에게 술은 됐으니, 콘돔이나 사오라고 할까 하다가 좋게 문자를 보냈다.
-술은 있어. 혹시 점심으로 먹고 싶은 거 있음 말 해. 내가 요리해 줄게.
곧바로 답장이 왔다.
-전 아무거나 잘 먹어요. ㅎㅎ
그래? 나도 아무거나 잘 먹는데...
물론 영계 쪽을 더 좋아하지만.
나는 기춘에 대한 복수는 잠시 미루고 오늘의 위업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복수를 잘 하기 위해선 몸보신이 필수니까.
영약이 제 발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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