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제123 화 더럽혀진 아이돌 제1 부 하인리히의 마녀 에필로그 배드 엔딩의 끝에서
* * *
아침부터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우중충한 날씨였다.
톡…!
톡…!
그러다가 오후가 다 돼서야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실내에 울리기 시작한다.
집무실에 혼자 조용히 앉아있던 성우는 그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동안 미동도않고 그저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슬슬 때가 됐나…….’
어떤 종류의 예감이 들었다.
아니, 예감이라기엔 너무나도 선명했다.
이 경우는 확신에 가깝겠지…….
책상 위에 있는 커다란 수화기를 들고 비서에게 연락한다.
“오늘 남아있는 일정은 전부 취소하도록. 그리고 직원들뿐 아니라 사용인들에게도 그만 돌아가도 좋다고 전해주게. 물론 자네도.”
“알겠습니다.”
비서에게 대답을 들은 후 수화기를 내려놓은 성우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피처럼 붉은 진홍색 루비가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반지와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그는 갈등이 가득한 심란한 얼굴로 그것들을 계속해서 번갈아 가며 매만졌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용인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그리고 결국 커다란 저택에 그 혼자 남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여전히 책상에 앉아서 목걸이와 반지를 사이에 두고 고뇌하던 그는 문득 문밖에서 익숙한 인기척을 느끼고 그쪽을 향해 말했다.
“왔나.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열려있으니 들어오도록.”
그러자 아무런 소리도 없이 문이 미끄러지듯이 열리며 천천히 송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장례식에라도 가는 것처럼 무척이나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동안 나은도 성우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저 똑바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나은이었다.
그녀는 성우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에게 두 손으로 매우 정중하게 하얀 봉투를 건넸다.
사직서였다.
뭔가 그녀에게 한마디 건넬 법도 했건만……, 그는 굳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표를 수리했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먼 길을 떠나려는 그녀에게 짤막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네의 뜻이 이루어지길…….”
“감사합니다.”
건조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짤막한 대화였지만, 두 사람에겐 이걸로 충분했다.
송나은이 다시 한번 성우에게 고개를 깊게 숙인 뒤, 뒤돌아서 망설임 없이 방을 나가려 할 때였다.
“잠시!”
그때 갑자기 성우가 그녀를 불러서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고민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일체의 망설임 없이 서랍 속에서 목걸이를 꺼낸 다음 나은에게 건넸다.
“가지고 가도록.”
나은은 잠시 자신에게 건네진 목걸이와 성우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러다가 나직하게 그에게 말했다.
“부탁드려요.”
“아아…….”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려 그가 그녀에게 목걸이를 채우기 쉽게 기다란 뒷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가 훤히 드러난다. 그가 그녀에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목걸이를 채워준다.
서로의 호흡이 닿을듯한 거리에 있자 새삼 그녀와 밤낮으로 정신없이 몸을 섞던 날들이 떠올랐다.
‘정말로 멋진 여자가 되었군.’
이대로 다른 남자에게 보내기에 아쉽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들었다.
실제로 그가 여기서 그녀에게 매달리면 나은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곁에 남아줄 가능성이 농후했다.
수없이 많은 말이 그의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임을 인정하고, 그녀를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남자에게로 보내주는 말이었다.
“잘 어울리는군.”
“……감사합니다.”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녀도 어찌 보면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나은은 왼손으로 그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가볍게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입술을 살짝 맞췄다.
그 뒤, 천천히 입술을 떼곤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 방을 나섰다.
성우는 나은이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았다.
품속에서 지금까지 고이 간직해두었던 한 장의 사진을 꺼낸다.
레코딩 하우스에서 나은이 찍어준 그의 사진이었다.
초점도 하나도 안맞고 두 사람이 같이 찍혀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좋은 사진이야……, 볼 때마다 이 사진을 찍어주었던 네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테니…….’
그렇게 말한 후……,
그는 사진을 조금 전 나은에게 건네줬던 목걸이가 들어있던 서랍 속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문을 바라보며 저 멀리 천천히 사라져가고 있는 나은의 뒷모습을 향해 마지막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좋은 여행이 되기를…….’
…
하늘은 더없이 어둡고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는데도 다솜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동안 오랜 시간 단단히 마음을 닫고 틀어박혀 있던 현민이 드디어 어제 처음으로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딱히 감사 인사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문을 사이에 두고 조금이라도 다정한 말을 주고받았다면 정말 기뻤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드디어 처음으로 그녀가 가져왔던 도시락을 깨끗이 비워놨을 뿐이었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는데도……, 그녀는 어제 문 앞에 걸려있던 빈 그릇을 본 순간 그 자리에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조금씩이지만……, 그래도 분명 내 마음은 선배에게 닿고 있었어…….’
‘그러니까 머지않아 분명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선배를 내 치마폭에 감싸고 평생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하게 휘어잡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발걸음이 한층 더 가벼워진다.
게다가 오늘부터는 자신이 직접 만든 도시락을 가져가기로 했다.
요리가 서툴다 보니 종일 주방에 서서 재료와 씨름을 해야 했지만, 조금도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칼질하다가 손가락에 가득 난 상처들이 더없이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여겨졌다.
선배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를 해줄 수 있다니 즐거워 미칠 것만 같아서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아……, 빨리 선배가 요리가 아니라 나를 먹는 날이 왔으면…….’
그런 달콤한 상상을 하고는 스스로도 낯간지러워서 풋 하고 웃었다.
그렇게 다솜이 날아갈 것만 같은 걸음으로 현민네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주위의 인기척이 하나둘 사라지며 그녀의 몸에 새삼 한기가 들었다. 원래부터 인파가 적긴 했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괜스레 안좋은 기억이 떠올라 자연스레 들떴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으며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니, 지금 들려오는 ‘울림’을 과연 ‘노래’라고 해도 좋은 것일까……?
노래라고 하기에는 지독할 정도로 절절했다.
“시간이 흘러 제 삶이 바뀔지라도……,
그댈 향한 제 마음은 그대로일 거예요.”
“시간이 흘러 그대의 마음이 변할지라도……,
당신을 위한 제 사랑은 변치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 울림은 어느새 그녀의 마음속 깊이 침투해……, 다솜은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주륵 주륵 흘리며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지금 그녀의 마음을 그녀보다도 더욱 잘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빗물이 아니라 그녀의 눈물이라는 걸 깨닫고 놀라서 한차례 몸을 흠칫 떨며 눈시울을 비비려는 순간이었다.
“이 노랠 듣고 눈물을 흘려주다니.”
“고마워.”
“그건 즉 너도 같은 상처를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거네.”
“결코 자신을 봐주질 않을 남자를 사랑하고 만 아픔을…….”
…!!!
다솜은 자신의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허겁지겁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수상한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서다가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현민을 생각하며 그에게 주기 위해 온종일 열심히 만들었던 도시락이 바닥에 쏟아져 엉망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솜은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곤 뱀을 눈앞에 둔 작은 개구리처럼 굳어버려 바닥에 너부러진 도시락에 신경 쓸 여유 따위 없게 되었다.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송나은이었다.
전설로까지 회자 될 무대를 남긴 뒤 인기의 최정상에서 돌연 모습을 감춘 불가해한 아이돌.
그녀는 피처럼 붉은 끝도 없이 불길한 우산을 쓰고, 같은 여자임에도 무심코 넋 놓고 빠져버릴 정도로 투명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그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우면서도 농염한 섹기라니……, 나와 같은 나이 대의 소녀인데…….’
이런 게 바로 일반인인 자신과는 달리 선택받은 아이돌이 가지는 아우라라는 걸까……?
처음으로 아이돌을 바로 지척에서 본 그녀가 같은 여자인 나은을 상대로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다솜의 눈앞에 있는 나은이 빙그레 웃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순간 너무나 악의 없는 그 표정에 다솜의 온몸에는 소름이 끼쳤다.
눈앞에 있는 소녀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전부 빠져있었다.
대신에 그 자리를 단 하나의 무언가가 온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큼 넘쳐흐르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내용물은 결코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닌 존재를 눈앞에 두고 다솜은 극심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그 동떨어짐은 지독한 한기로 변했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친다.
그런 다솜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은은 잔혹할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서 노래하듯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먼저 사과해둘게.”
“너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지만, 그러면 내가 곤란해지거든.”
“설마 그의 주변에 너 같은 여자가 있었을 줄이야.”
“방치해두면 분명 방해되겠지.”
다솜은 깨달았다.
눈앞의 여자는 아이돌 같은 귀여운 게 아니다.
이런 어긋나고 뒤틀린 존재가 ‘모두의 빛’이라면 이 세계가 정신병동이란 소리다.
눈앞의 여자가 설령 바로 조금 전에 사람을 죽였더라도 다솜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그러지 않았다는 게 신빙성이 떨어질 정도였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자기 안에 있는 일탈을 알아차린 인간은 언젠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정해야만 해.”
“그렇지만 만약 잘못된 게 자기가 아니라 이 세계라면, 바로 잡아야겠지.”
“그게 비록 고난으로 점철된 길일지라도 말이야.”
“후후……, 지금 그의 근처에는 강한 마음을 지닌 나무가 자라는 중이야.”
다솜은 긴장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여신을 찌르기 위한 나뭇가지를 만들기 위해 씨앗부터 키워 온 거목이야.”
“너무나도 간절한 마음을 품고 있는, 아름답고도 추괴한……, 별을 삼키는 나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백 수천의 준비를 하고 그걸로도 부족해서 기적을 빌려 간신히 주위에 잎 가지를 뻗어서 그의 머리 위를 덮게 되었어.”
“하지만……, 너라는 존재는 그 모든 것을 단번에 불사를 존재지.”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철저하게 망가뜨리는 수밖에…….”
다솜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순수한 광기에 압도당해 도망치는 것이 늦고 말았다.
파직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에 강한 전류가 흐르고……, 시야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서……, 선배에게 도시락 갖다 줘야……. 드디어 선배가 마음을 열었는데, 왜……, 왜 이런 일이…….’
다솜은 의식을 잃는 와중에도 현민만을 걱정했다.
자신의 몸보다도 눈앞에 엉망으로 쏟아져 있는 도시락을 향해 힘겹게 팔을 뻗는다.
그런 다솜의 귀로 너무나도 따스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마치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주는 어머니만큼 자애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렴.”
“기분 좋게 만들어줄 테니까…….”
“장난감이 되어 귀여움받는 삶도 나름 만족스러울 거야.”
“후……, 후후…….”
완전히 의식을 잃은 다솜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나은은 말했다.
“그럼 푹 자렴.”
“신(?)을 버리고 하늘을 거스르려는 나지만, 지금만큼은 부디 네가 좋은 꿈을 꾸길 신(?)에게 기도할게.”
“아마도 네가 푹 잘 수 있는 마지막 날일 테니까…….”
더럽혀진 아이돌 제1 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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