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제115 화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의 지평선 (9)
* * *
“우리들은 서로 끌어당기는 물방울처럼, 행성처럼”
“우리들은 서로 반발하는 자석처럼, 피부색처럼”
…
알람이 울리자 다솜은 습관적으로 눈을 떴다.
도대체 얼마나 잔 걸까…….
하도 오랫동안 누워있었더니 온몸이 찌뿌둥했다.
나만 울적한 것 같아서 괜히 억울했다.
하다못해 날씨라도 조금은 우중충하길 기대하며 고개를 살짝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본다. 하지만 내 우울함 따윈 하등 상관없다는 듯이 구름 하나 없는 맑은 하늘에서 태양이 눈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뭐……, 그런 걸 테지.’
나에겐 죽을 듯이 괴롭고 심각한 고민이더라도 이 세상에선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하루하루 정말로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과 비교하면 내 고민 따위 정말로 사소한 거겠지.
자기 자신이 점점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한껏 위축되어있는 내게 이건 치명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아……, 학교 가기 싫다,’
어차피 선배도 못 만날 텐데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그렇다고 공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가서 자리만 지키느니 집에서 푹 쉬는 게 더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
이도 저도 아닌 태도로 시간을 어영부영 허비하느니 차라리 확실하게 쉬는 게 분명 도움 되긴 하겠지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며 그런 생각을 훌훌 털어버렸다.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인간은 무척이나 나약하기에 이 정도면 명분도 나름 충분했고, 내가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잃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어떨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선배의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하는 나만큼은 그렇게 행동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선배를 다시 일상으로 데려오려고 하는 내가 일상을 소홀히 보낸다니.
그래선 내가 얼마나 진심인지 선배에게 닿지 않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선배가 오늘 학교에 나올지도 모르니까…….
가능성이 아예 0이 아닌 이상 선배를 만날 확률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거기에 내 모든 걸 던질 수밖에 없다.
선배가 아니면 보여주고 싶은 사람도 없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평소보다 공을 들여 자신을 꾸민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 선배를 만나더라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맞아주고 싶은 마음에 기합이 잔뜩 들어가서였다.
“좋아, 준비 끝!”
일부러 자신에게 들으라는 듯이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 내서 중얼거린 후 방을 나섰다.
…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눈으로 선배의 모습을 찾는다.
그렇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선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오기 전에 이미 집에서부터 이럴 거라고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는데도……, 그만 눈에 띄게 풀 죽고 말았다.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어깨가 푹 처진다.
선배가 있을 때는 선배에게 정신이 팔려서 수업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건 딱히 선배가 없더라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배가 있을 때보다 더욱 교수님의 말이 머리에 남지 않았다.
나도 정말로 중증이라니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
조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들었지만……,
‘뭐, 어차피 선배한테 시집갈 테니 상관없나.’
‘하지만, 애는 둘 아니, 셋은 낳고 싶고. 그러려면 확실히 돈은 많으면 많은 편이……. 어떻게 하지. 선배 은근히 가부장적이라 여자한테 일 시키는 거 싫어할 텐데.’
‘…….’
“거기, 수업에 집중하도록.”
입에 침을 주륵 흘릴 정도로 그런 망상을 하다가 교수님에게 지적받은 건 덤이었다.
…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오늘도 점심을 거르고 동아리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애초에 신혜민에겐 관심도 없는 내가 선배 하나만을 바라보고 들어간 동아리라 선배가 학교에 안 나오는 이상 엄밀히 말해 나 역시 거기에 갈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태어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연어처럼 부실로 향하고 있었다.
뭐랄까……, 이건 그런 거다.
안심하고 싶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나와 마찬가지로 선배를 걱정하고 있을 그들에게 기운을 나눠 받고 싶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 세상에서 날 응원해주는 몇 안 되는 동료들이었다. 그렇게 믿음직스럽진 못하지만.
그렇더라도……,
가서 딱히 무언가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 지금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 날 응원해주며 등을 떠밀어줬던 그들에게 보고도 해야 하고 말이지. 그러는 김에 의논이랄까, 나한테 매몰차게 대한 선배의 뒷담을 다 같이 하는 것도 즐거울 거 같았다.
선배가 고작 그 짧은 시간에 왜 그렇게 변했는지, 내게 왜 그렇게 매몰차게 대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짐작 가는 게 없었다.
내가 선배와 달리 여자라서 그런 걸까.
아무래도 여자와 남자는 신체뿐 아니라 뇌구조도 상당히 다르니까 말이다.
선배와 같은 남자인 그들에게 의견을 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부실 근처에 도착하자 언제나처럼 신혜민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더욱 귀에 꽂힌다.
그다지 다른 사람과 엮이지 않다 보니 나는 좋아하는 사람도 적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딱히 없었다.
그런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여자라고 콕 찍어서 말할 수 있는 여자가 바로 그녀였다.
그렇지만……, 어느새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노랫소리에 넋을 잃고 있었다.
만약 이 별에 목소리란 게 있다면……, 아마도 이런 형태일 테지.
노래에 문외한인 내가 무수한 이론을 넘어선 직관의 영역에서 느낀 만큼 아마 정답에 한없이 가까우리라.
하나의 노래가 끝나며 핫! 하고 정신을 차린 나는 다음 노래가 흘러나오기 전에 부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 있었다.
한편으론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척이나 소중한 일상이.
선배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진다.
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다.
내 표정이 흐려지려는 찰나였다.
“오셨소이까……,”
두 사람이 변함없는 태도로 날 맞아주었다.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도 날 배려해서 일부러 선배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겐 그런 사소한 배려가 무척이나 따스하게 마음에 스며들었다.
눈물이 많은 편도 아니건만, 방심했다간 왈칵 서러운 눈물을 쏟고 말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름 자제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목이 메는 것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뭔가 이것저것 즐겁게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았던 거 같은데……, 결국 내 입에서 나온 거라곤 힘 빠진 목소리였다.
“미안……, 모처럼 두 사람이 잔뜩 응원해줬는데, 잘 안되고 말았어.”
“만나셨소이까?”
“응. 바로 쫓겨났지만.”
두 사람이 내 말을 경청하기 위해 자세를 바로 한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으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떠듬떠듬 얘기했다. 워낙 두서가 없어서 잘 전달됐는지는 모르겠다.
…
내 긴 얘기가 끝나자 그들은 호주머니에서 안경닦이를 꺼내 안경을 한번 슥슥 닦은 후 안경을 고쳐썼다.
그리고는 평소 그들답지 않은 진중한 목소리로 날 위로했다.
“고생하셨구려.”
“고마워…….”
“낙담이 크셨겠소.”
“응…….”
“그래서 두 사람의 의견은 어때…? 딱히 선배가 왜 갑자기 그렇게 됐는지 짐작 가거나 뭔가 떠오르는 생각은 없어?”
“흠…….”
승진은 작은 신음성을 내뱉었고. 대신 지웅이 내게 답했다.
“글쎄올시다. 솔직히 그 친구가 그렇게 변한 데에는 저희도 짐작 가는 게 없구려.”
“뭐, 어쩔 수 없나…….”
여기서도 결국 아무런 성과가 없어서 조금 낙담하는 내게 그가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 외부세계와 단절하고 자기 안에 틀어박히는 건 그다지 특별할 건 없는 현상이오.”
“사람에겐 때론 어둠과 휴식이 필요한 법이니 말이오.”
“어딘가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주위에서 얼핏 봐서는 무척 쓸모없는 짓 같지만, 겉보기와 달리 그건 무척 중요하다오.”
“나……, 혹시 쓸데없는 짓 한 걸까…?”
그의 말에 왠지 내가 선배를 방해한게 아닐까 싶어서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내 말에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승진이 팔꿈치로 지웅의 옆구리를 팍 치며 눈치를 주었다.
지웅이 입을 다물고 승진이 황급하게 내게 말했다.
“그……, 그건 절대 아닐 거요. 그것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오. 그에게 여신님이 꿈이라면 소저는 현실.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오. 하나만 있어서는 성립하지 않지.”
“그렇소, 게다가그는 소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소저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오.”
“그……, 그렇다면 대체 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가서 그에게 따지고 말았다.
어쩌면 가슴속에 줄곧 고여있던 응어리를 토해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순간 욱해서 이성을 잃었던 거에 내가 재빨리 입을 다물고 그에게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괜찮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굳이 내 뒷말을 다 듣지 않았어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이해한다는 듯이 내게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그가 만약 소저에게 상처를 줬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뿐이라오.”
“소저에게 그보다 더 큰 상처를 주기 싫어서일 거요. 그것 외에는 없다고 자신할 수 있소. 뭣하면 여기 이 친구가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여신님 베스트 앨범 한정판을 전부 걸어도 좋다오.”
“……!!!”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지웅이 갑자기 자길 걸고넘어지자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뻐끔 거렸다.
아니면, 그 역시 어느 정도는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걸까……
…
‘……그렇다면?!’
나는 한가지 생각에 도달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렇소.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소.”
“그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소저가 그에게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
“이대로면 아마도 소저는 정말로 큰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오.”
“그가 빈말을 하는 친구는 절대 아니니 분명 틀림없을 거요.”
“그래도 소저는 그에게 다가가시겠소?”
나는 그들의 질문에 일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도 그렇고 남자들은 하나같이 여자를 그저 연약한 존재로 얕잡아본다.
웃기지 마시지!!!
나한테 상처를 줄까 봐 겁이 난다고?
하!
바보 같으니!
사랑에 빠진 소녀는 그 누구보다 튼튼하건만…….
상처를 줄 테면 얼마든지 주라지.
내게 얼마나 상처를 주더라도 나는 선배를 안아주겠어…….
“후후, 그럼 좋은 소식 기대하겠소.”
…
오늘은 다행히 오후에 공강 이었기 때문에 부실을 뒤로하고 곧바로 선배네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 들렀다가 수제 요리를 만들어서 선배에게 전해주고 싶었지만, 선배가 부담스러워할 거 같았다.
그래서 가는 길에 선배가 좋아하는 도시락을 사서 선배네로 향한다.
어제처럼 멀리서부터 내 온몸을 질척하게 휘감는 꺼림칙함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네 문 앞에서 벨을 누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안에 선배가 있다는 건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선배……, 듣고 있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들어만 줘.”
“선배가 좋아하는 도시락 사 왔으니까……, 문 앞에 걸어두고 갈게…….”
“나중에라도 먹어줘.”
“……,”
“나는 언제까지나 선배 편이니까…….”
“…….”
“그럼, 내일 또 올게.”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 비추어 보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일이라면 용감하게 추진해라.
그 길이 가시밭이라 하더라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는───────,
권다솜의 이 하늘과 땅에 비추어 보아 한 점 부끄러움 없을 용감한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은 결단코 잘못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족했다.
그저 부족했을 뿐이다.
단 하나의 염원을 위해 그 어떤 악행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극단으로 치우친 자, 송나은이라는
────의 마녀가 그녀의 인과(??) 너머에 안배해놓은 거미줄에서 벗어나기에는
그저 한걸음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