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럽혀진 아이돌-111화 (111/136)

〈 111화 〉 제110 화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의 지평선 (4)

* * *

다솜이 돌아가고 난 후……,

아니, 현민이 그녀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기면서까지 매몰차게 그녀를 돌려보내고 난 이후……,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쓰러지듯이 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버렸던 그는 한참 동안이나 그대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이었을 수도 있고, 열 시간이었다 한들 지금의 그에겐 별 감흥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원래부터 빛 한점 없는 어두운 방이었다. 그 안에서 그는 죽은 눈을 하고 줄곧 옆에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을 허공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허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분명하게 있었다.

그가 아무리 간절하게 손을 뻗어도 그 옷깃에조차 닿을 수 없는 신혜민이라는 여인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한 송이 푸른 장미가 되어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발해 주변을 밝히며 무척이나 고상하게 펴있었다.

현민의 두 눈에서 몇 번째인지 모를 뜨거운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렸다.

무척이나 서러운 눈물이었다.

구제할 길 없는 자기 자신을 긍휼히 여기는 깊은 자기연민에서 나오는 눈물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자신은 이다지도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왜 자신은 타협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의 등 뒤로 문밖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다솜의 향기가 그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무척이나 산뜻한 향기였다. 시선으로 향기를 쫓는다.

그래……,

이렇게 조금만 눈을 돌려도 손을 뻗기만 하면 곧바로 닿을 가까운 곳에 아름답게 핀 꽃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저 멀리 피어있는 에덴의 꽃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들꽃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조차도 자신에겐 과분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자신 주위에 조용하게 펴있는 꽃은 아름답고 좋은 향기를 내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싱그러움이 넘쳤다.

언제나 그 어느 꽃보다 자신의 곁에 피어있어서인가……, 그 꽃에는 현실미가 가득했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무척이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나 꿈같은……, 결코 포기할 수 없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걸 포기하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고 여겨지지만,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것만큼 쉬운 것도 달리 없었다.

이 세상은 결코 상냥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특히 간절히 바라는 것일수록 더욱 이루어지기 힘들다.

세상 사람 대다수는 매일매일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하며 삶을 연명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들 극복한다.

어찌 됐든 아픔을 딛고 일어선다.

당장은 상실의 통증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해서 차라리 죽는 게 편하게 여겨질 만큼 괴로울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도 결국엔 한순간인 것이다.

전부 잊으라는 것까진 솔직히 무리겠지만……, 상처에는 딱지가 가라앉게 되어있다. 꿈의 잔해에 안주하며 그랬던 때도 있었지 라며 이따금 과거를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며 원래 생활로 돌아간다.

목숨과도 같이 소중했다 여겼던 걸 포기한다는 건 그렇게 의외로 싱겁다.

신혜민을 흠모하는 남자는 그렇지 않은 남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전국 어디에나 널려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스스로가 특별하단 생각 따위를 하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넓었다.

그녀를 흠모하는 사람 중에 나보다 못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나는 여왕을 신봉하는 무수한 개미 중에 하나.

그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신분.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뛰어나고 이룬 게 많은 남자들도 그녀에겐 혀를 내두르며 감시 손조차 내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라고 과연 나처럼 절망하지 않을 것인가? 크면 컸지, 적을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신혜민과 이어질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그녀를 소유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번뇌를 극복하듯이……, 분명 내 상처도 아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러니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언제까지고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이상의 여인을 쫓다가 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백 명이면 백 명, 전부가 나보고 미련한 짓 그만두고 현실을 살라고 하겠지.

간단한 일이다.

그리고 성인으로서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저 나는 손을 뻗기만 하면 된다.

그저 그뿐인 너무도 당연하고 단순한 이야기.

게다가 나한테 나쁠 게 전혀 없는 형편 좋은 이야기.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결국 약속된 행복을 향해 손을 뻗지 못했다.

영원히 내 손이 닿지 않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 송이의 푸른 장미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대신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간신히 침대까지 걸어갔다.

고작 현관에서 여기까지 몇 발자국뿐이 안되는 짧은 거리였다. 하지만 그 짧은 거리를 옮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발에 무거운 족쇄가 달린 것만 같아 한 걸음 한 걸음 방바닥에서 발바닥을 떼기가 힘겨웠다.

그렇지만──, 막상 침대 앞에서 알몸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시선을 내려서 눈으로 확인할 것도 없었다.

자신의 물건은 이미 아플 정도로 딱딱하게 서 있는 상태였다.

딱히 결벽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건만, 자신의 몸이 몹시도 천박하고 추잡하게 여겨졌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서……, 계속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마음을 닫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외면하려던 차였다.

침대에 몸을 파묻고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스스로 생각해봐도 염치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곧바로 다솜의 모습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그녀가 남기고 간 향기 때문이겠지.

그래서였을까……,

신혜민에게는 감히 망상에서조차 추잡한 짓을 할 수 없었던 나였다.

그런 나는 비겁하게도 다솜이 찾아오기 전까지 신혜민의 대용품으로 다솜, 그녀를 떠올리며 스스로의 더러운 욕망을 해소하고 있었다.

지금 내 감은 두 눈에 떠오른 다솜의 모습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했다.

당시에 그녀를 떠올리고 상상 속에서 더럽혔을 때도 눈앞에 그녀가 정말로 있는 것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척이나 생생하다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이렇게나 선명하게 떠올린 다솜을 대상으로 저속한 망상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기분 좋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순간, 극광(?光)이 반전한다.

어둠이 다솜을 한순간에 집어삼켜 그 모습을 내 눈에서 지워버렸다.

더 이상 이제는 그녀의 잔향조차 어렴풋이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내 안에서 그녀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모든 것이 사라진 내 어두운 세계에서 신혜민 그녀의 모습이 천천히 떠올랐다.

언제나 존귀한 그녀.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는 더없이 높은 하늘에서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밝혀주던 미소 그대로를 내게 향하고 있었다.

그 미소를 떠올리고 만 것으로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비록 신기루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나를 향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나 지척에 둔 것만으로도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자연스레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영원히 그녀의 종이 될 것을 맹세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녀의 발등에 맹세의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제일 바랐던 것은 그것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개가 되고 싶다.

그녀의 충실한 종이 되어 그녀에게 길러지고 싶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그녀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그녀가 내 머리를, 내 등줄기를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자각했다.

아니, 그녀에게 복종하고 싶은 마음이 어디서 우러나오게 됐는지를 깨달았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어 머리카락 한올 한올까지 지배하고 싶지만, 물리적으로 그건 너무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그녀에게 지배당하자는……, 이기적인 지배욕의 뒤틀린 형태가 바로 내가 그녀에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게 느껴졌다.

특히 자기 안에 남아있는 양심의 가책이라든가 도덕이라든가 하등 쓸모없게 느껴졌다.

내게 실질적인 도움이라고는 티끌 하나만큼도 안되는 쓰레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위선의 옷을 어설프게나마 완전히 벗어던진다.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내가 만들어낸 고립된 세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지.

실제의 내가 나약하고 한심할수록 이렇게 만들어낸 도피처에서는 난폭해질 수 있었다.

내 우상, 내 모든 것인 신혜민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아무렇지 않게 찢어발기고서는 억지로 그녀를 안을 수도 있을 정도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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