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럽혀진 아이돌-107화 (107/136)

〈 107화 〉 제106 화 삐걱거리는 마음 (2)

* * *

선배는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대체 사람이 얼마나 큰 절망을 맛봐야 저런 눈이 되는 걸까…….

자신의 짧은 경험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여러 가지 말이 입안에서 맴돌다가 사라져간다.

선배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단둘이서 같이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마음에 장벽을 치고 그 안에 틀어박혀 세상 모든 걸 거부하려는 선배의 눈을 보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꿀꺽…….

조용한 복도에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충고를…… 받아들여야 했던 걸까…….

지금의 선배에겐 내 어떤 말도 닿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괜히 전부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했다간, 네가 대체 뭘 이해하냐며 질타당할 것만 같았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

선배에게 미움받는다면 살아갈 자신이 없다.

얌전하게 돌아갔어야 했나…….

나는 또 언제나처럼 의욕만 앞서서 섣부르게 행동했다가 일을 그르치고 만 게 아닐까.

아직 늦은 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수습할 수는 있었다.

이대로…… ‘다음에 다시 올게, 선배.’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면서 말한 다음 물러나면 되는 것이다.

상처받기 싫은 내 연약한 마음에 야비한 계산이 피어오른다.

그런 나약한 자신에게 스스로 채찍질을 한다.

채찍이 살을 찢고 뼈까지 닿을 정도로 자신을 세차게 때린다.

여기가 선택의 갈림길.

진정으로 과거의 나와 결별할 때.

말하자면 나는 지금 백 척의 장대 끝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래서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내던질 각오로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

자신이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사랑하는 선배에게 받는 상처라면 그 또한 내겐 여자의 훈장이다.

그래서 나는 당장이라도 선배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선배……, 괜찮아?”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선배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공허한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날 보고 있는지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만큼 선배의 마음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분하다.

죽을 만큼 분했다.

내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선배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게 미치도록 자존심 상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내 여자로서의 알량한 오기에 감사한다.

그런 얄팍한 자존심이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면 분명 주눅 들고 말았을 테니까…….

“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굴이 그 모양이야?”

이곳에 오기까지 마음속에 품었던 얄팍한 혹심 따위 저 뒤로 제쳐두고 진심으로 선배를 걱정하는 단 하나의 마음으로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정말로 가까스로 힘을 낸 내게 돌아온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너무도 싸늘한 선배의 목소리.

“아무 일도 없었어…….”

“나는 괜찮으니까, 조금 혼자서 생각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니 이만 돌아가 줘.”

나는 선배의 대답에 놀라 그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매정해도 너무 매정했다.

조금이라도 말 붙일 여지를 처음부터 주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예리한 면도날로 단번에 잘라버리는 그런 태도였다.

예전의 나였겠다면, 분명 여기서 물러났겠지.

하지만 사랑을 하는 소녀는 남자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

눈이 멀어 자신의 상처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까.

“자……잠깐, 전혀 괜찮지 않잖아. 거울은 본 거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얘기 정돈 들어줄 테니까…….”

“혼자 속으로 고민하지 말고 부디 내가 선배의 힘이 되어줄 수 있게 괜찮다면 얘기라도 해줘.”

몸에 걸치고 있던 자존심 따위 걸레 마냥 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애원하듯이 선배에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이번에도 돌아온 대답은 너무도 단호했다.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읏……!!!

이번만큼은 아무리 나라도 울컥하고 말았다.

선배의 입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으니까.

내가 선배와 아무 상관 없다니…….

그런 거……, 인정할 리가 없잖아!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오른 걸 이성은 절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건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내 안에서 신이더라도 침범할 수 없는 가장 신성한 보루가 부정당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설령 그 상대가 선배여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선배였기 때문에 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선배와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도 자연 목소리가 올라갔다.

“자……, 잠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그렇지만 선배가 도중에 내 말을 칼같이 끊었다.

“부탁하지 않았어…….”

“뭐……, 뭐라고?”

“선배 대체 오늘 왜 그래. 선배 이런 사람 아니잖아.”

내 말이 선배의 무언가를 자극한 걸까.

처음으로 선배가 반응을 보였다.

선배의 목소리도 나만큼이나 올라갔다.

“네가……,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알아!!! 안다고……,”

“너는 아무것도 몰라……”

윽…!

평소 선배가 내 응석을 전부 받아줬던 만큼 이렇게나 완강하게 거절당하자 눈에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무심코 손이 올라가 감정에 몸을 맡겨 선배의 뺨을 때릴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여기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거야말로 최악이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후우…….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차분해진 목소리로 선배를 부른다.

“선배……,”

그러자 내 차분하게 바뀐 태도에 선배도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게 답했다.

“제발 부탁이니까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 줘.”

“……….”

그렇게 말한 뒤 선배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닫았다. 나는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들에겐 말 못 할 고민이 있어도 나한테 만큼은 털어놔 줄 줄 알았는데……,

그 정도 관계는 된다고 생각했던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내버려 둘 수 있겠냐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고 있는 선배의 얼굴을 보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 혹시 선배에게 부담스럽게 여겨지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선배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존감이 한없이 바닥에 떨어져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졌다.

사람의 본질이란……, 타고난 천성이란 아무리 외모가 바뀐들 쉽게 변하지 않는단 걸 다시금 체감했다.

겉모습을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 보기도 하고, 무리해서 아무리 외향적인 성격인 척도 해봤지만, 나는 여전했다.

기껏 용기를 짜내봤지만, 결국에는 조금만 거절당해도 금방 낙담하고 한없이 우울한 기분에 빠지던 옛날과 똑같았다.

그런 자신의 한심함에 서러움이 복받쳐 결국 참지 못하고 두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흐른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선배와 함께 쓰려고 부끄러움을 참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 온 콘돔을 신경질적으로 꽉 움켜쥐곤 상자째로 꾸깃꾸깃 구겨버렸다.

이딴 거…!

이딴 거…!!!!!!!

그다음 손에 들고 있는 콘돔을 크게 위로 들어 올려 바닥에 있는 힘껏 팽개쳐 버려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끝내 팔을 휘두르지 못했다.

치켜들었던 팔이 힘없이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선배…….”

속으로 작게 선배를 불러본다.

얼굴을 마주 보고서도 대화조차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로 거절당했던 게 바로 조금 전이었다.

이렇게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건만 선배를 속으로 작게 불러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참 어쩔 수 없다니까…….

그래, 원래 연애란 반한 쪽이 지고 들어가는 거다.

하지만……, 나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마지막엔 반드시 이기고 말 테니까…….

그러니까……,

“선배, 또 올게.”

문 건너편에 있는 선배를 향해 작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다솜을 억지로라도 돌려보내기 위해 정말로 매몰차게 문을 쾅 닫고만 현민은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방까지 돌아갈 기력도 없어서 그래도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는 머리를 싸매며 극심한 자기 혐오과 그리고 고뇌에 빠졌다.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했던 질문을 또다시 반복해서 끊임없이 묻는다.

‘진정, 진정 그녀에게 이렇게 뿐이 할 수밖에 없었나……?’

자신의 말이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건 아무리 둔한 자신이라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녀와 같은 입장이었다고 상상하면 그 자리서 죽고 싶었을 테니까.

그녀는 평소엔 무척 강한척하지만, 의외로 여리고 눈물이 많은 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쯤 울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상처받지 않게 좀 더 완곡하게 그녀의 친절을 거절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후회해보지만…

역시 다다르는 결론은 이거뿐이었다.

자신에게도 그녀를 신경 써 줄 만큼 여유가 없었으니 이렇게 극단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왜냐하면──, 손에 넣을 수 없는 신혜민을 대신해서 다솜을 상대로 한 자신의 더러운 망상은 너무나도 기분 좋고, 생생했다.

기분 나쁜 정액을 토해내면 토해낼수록 욕망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상이 더욱 현실감을 가지게 됐을 뿐이었다.

그건 마치 그녀의 친절에 기대 자신의 비열한 욕정을 해소하는 운명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마 그대로였다면 그녀의 마음뿐 아니라 몸에까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을 거다.

흔히 정말로 치유되지 않는 건 마음의 상처라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그릇의 내용물은 언제든지 고쳐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릇 자체가 깨져버리면 그거야말로 돌이킬 수 없다.

그러니 나는 틀리지 않았어.

자신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렇지만──, 분명 옳은 일을 했음에도 어째서 이렇게나 자신의 마음은 어둠속으로 가라앉는 걸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솜은 또 오겠다고 했다.

다시금 찾아온 그녀는 분명 오늘보다 강한 마음을 품고 있겠지.

그때 나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런 미래 따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민은 스스로를 가둔 어두운 담장 안에서 그렇게 간절하게 바랐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어떤 의미로는 이루어지게 된다.

다만 그가 원하지 않았던 가장 최악의 형태로──.

모두의 이야기가 교차할 특이점이 멀지 않았다.

파멸로의 카운트다운이 코앞이었다.

각자의 배드 엔딩의 끝에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잃고, 무엇을 손에 넣을 것인가──.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