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제105 화 삐걱거리는 마음 (1)
* * *
“내가 과연 따라갈 수 있을까?”
“네가 없는 세상의 스피드를……”
“…….”
“……?”
“무슨 일이지?”
그동안 잘 부르고 있던 나은이 갑자기 노래를 멈추자 성우가 의아해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없이 이렇게 급작스레 노래를 중단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우가 물었음에도 나은에게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어딘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만 같았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말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성우가 재차 그녀를 부르려 할 때였다.
나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성우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겸연쩍게 웃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공들여서 세심하게 키우고 있는 소중한 나무 열매에 눈독 들이고 있는 고양이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갑자기 들어서…….”
“…….”
나은의 입에서 나온 뜬구름 잡는 소리에 성우는 순간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색을 표했다.
“그런가……, 그거 큰일이었겠군.”
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면 왠지 더욱 어색한 분위기가 될 것만 같아서 무난한 대답으로 얼버무려 넘기기로 했다.
그런 성우에게 나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정말로 민폐라니까요. 아직은 조금 여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군…….”
“사랑에 빠진 소녀는 어떤 기적을 일으킬지 모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나은은 활짝 웃었다.
그것은──, 어딘가 무척이나 의미심장해 보이는 불길해 보이는 미소였다.
한편……,
마음을 다잡은 다솜은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가벼워진 마음과는 달리 몸은 무거웠다.
등 뒤로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기분이 들었다.
체력에는 나름 자신있는 편이었는데 이상했다. 그만큼 심력 소모가 컸다는 걸까.
그다지 경사가 심한 것도 아니건만 언덕을 다 올라 선배가 사는 맨션 앞에 다다랐을 때는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후…, 이러면 안 되겠지…….’
칙칙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맑은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
‘선배는……,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건가.’
역에서도 꽤나 거리가 있고, 비록 경사가 완만하다지만 상당한 길이의 언덕을 올라가야 하기에 입지는 최악이었다.
그렇지만 건물 자체만 놓고 보면 또 상당히 최근에 지어진 게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문제였다.
주변은 같은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허름한 주택들뿐이라 굉장한 동떨어짐을 자랑하고 있었다.
주변과 철저하게 고립된 것만 같은 위화감.
‘뭐, 선배가 허름한 곳에서 지내는 것보단 나으니까 괜한 오지랖이겠지만…….’
‘게다가 눈에 확 띄는 덕분에 헤맬 걱정도 없었으니…….’
최대한 좋게좋게 생각하려 했지만, 주변이 워낙 허름하고 한술 더 떠서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다 보니 으스스한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여기서 이래 봤자 아무 소용없겠지.’
‘얼른 선배한테 가도록 하자.’
맨션 앞에 도착하자 입구는 활짝 열려있었다.
어째선지 선배가 나를 반겨주는 것만 같았지만 그런 생각은 안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용해도 너무나도 조용했다.
정말 사람이 살고 있긴 한 걸까…무심코 그런 의심을 할 정도로.
들리는 소리라고는 내 발소리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마저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적막함에 기가 죽은 내가 압박에 견디지 못해 스스로 발소리를 줄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계단을 올라 선배네 방 앞에 섰을 때였다.
나는 곧바로 조금 전까지의 내 생각을 고쳐 썼다.
‘아무도 없다?’
‘아니……!!’
여기엔 분명히 있었다.
문 너머로도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선배의 기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선배도 내가 왔다는 걸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근거는 없지만, 왠지 그럴 거 같았다.
그러자……,
드디어 처음으로……
이제야 좋아하는 남자 집에 여자 혼자서 왔다는 게 실감 됐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봐도 자연스럽게 호주머니 안으로 손이 갔다. 오면서 편의점에서 산 콘돔을 무의식중에 매만진다.
선배에게 안길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방안에 남자와 여자 둘만 있고, 여자인 내 쪽에서 그럴 마음으로 가득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쪽이 비현실적이겠지.
선배는 상냥하니까……, 그럴 마음이 들어도 무리해서 먼저 날 안으려 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지만, 내 쪽에서 필사적으로 유혹할 거니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남녀관계라는 게 뭐든 처음이 힘들지 그 뒤는 정말 한순간이다. 한번 피부를 맞대고 몸을 섞고 나면 그 뒤는 알아서 시도 때도 없이 서로를 원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몸뿐인 관계여도 좋다고 생각한다.
선배의 안에서 내 존재가 당장은 신혜민, 그녀보다 작더라도 괜찮다.
하지만……, 종래에는 선배의 머리에서 그 여자의 흔적을 전부 지워버리고 나로 가득 채울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신혜민에겐 손쉽게 가능한 일이 내겐 불가능하지만, 대상을 선배로 한정한다면 그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선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단 하나뿐인 사람이지만, 신혜민에겐 수많은 일개 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녀의 시선에서 바라보자면 선배의 존재 따위 먼지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
그녀와 선배는 사는 세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같은 별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영원히 교차할 일 없는 평행선과 마찬가지인 관계.
그러니 그녀는 나처럼 선배가 다른 사람의 온기를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 줄 수 없다.
나라면 선배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그의 몸에 내 몸을 써서 어떠한 봉사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지만, 그녀에게 그런 건 가당치도 않은 얘기다.
애초 그녀 정도 되는 여자가 남자에게 봉사한다는 게 상상이 가질 않지만…….
그래, 나는 신혜민이 아니다.
그녀처럼 매력적이지도 않고, 그녀처럼 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선배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차근차근해 나가면 될 뿐이다.
‘응, 반드시 선배를 함락하겠어.’
다시 한번 단호하게 의지를 다지자 전에 없이 들뜬 기분이 되었다.
힘차게 눈 앞에 있는 벨을 누른다.
“선배, 안에 있지? 나야, 다솜.”
평소보다 높고 활기찬 목소리로 안을 향해 외쳤다.
곧바로 대답이 들려올 줄 알았는데 조용했다. 왠지 잔뜩 들떴던 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다.
어색한 침묵이 복도에 내려앉을 찰나 민망한 기분도 해소할 겸 좀 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안에 있는 선배를 향해 말했다.
“모……, 모처럼 나 같은 미소녀가 병문안 와줬으니 조금은 기뻐해야 한다?”
‘설마……?’
‘설마 이번에도 무시하는 건가…….’
‘좋아, 여자의 오기를 얕잡아보지 말라고. 선배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어.’
내가 그렇게 농성할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하……, 그런 건가.’
‘후훗……! 선배도 귀여운 구석이 있네.’
왜 곧바로 대답이 없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분명 선배도 나 혼자 갑자기 찾아와서 당황했겠지.
아무래도 남자 혼자 사는 집이다 보니까……, 여자에게 보여주기 힘든 민망한 것들이 이래저래 너부러져 있을 거다.
‘후후……, 난 괜찮으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건만.’
‘오히려 무척이나 관심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 정도는 알아두고 싶으니까.’
또 선배가 제아무리 변태적인 욕망을 가지고있어도 전부 받아줄 자신이 있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한정된 공간이었다.
급하게 숨긴다고 해봤자 거기서 거기겠지. 나중에 선배 몰래 확인해보거나 들어가자마자 찾아내서 선배가 난처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울 거 같았다.
조금 걸릴 것 같으니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볼까…….
기다림 또한 숙녀의 미덕이라는 둥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불현듯 한가지 걱정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서로 경험이 없는 남녀가 첫 경험을 할 땐 안 좋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던데…….’
‘으음…….’
뭐, 사랑이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나중에 돌이켜보면 미숙한 때의 새초롬한 추억이 될 거 같기도 하고…….
‘아아……, 빨리 선배에게 안기고 싶다.’
내가 그런 장밋빛 꿈을 꾸고 있을 때였다.
선배가 나올 때까진 꽤나 시간이 걸릴 거란 내 예상과는 달리 거의 바로라고 할 만큼 얼마 안 있어 철컥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
나는 반가운 나머지 기쁜 목소리로 선배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선배의 퀭하고 허망한 눈을 본 순간 정말로 내가 알던 선배가 맞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선배의 모습은 고작 하루 사이 이질적으로 변해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들떠있던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선배의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