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럽혀진 아이돌-105화 (105/136)

〈 105화 〉 제104 화 ???? ?一?(백척간두 진일보)

* * *

한여름에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등뿐 아니라 온몸에서 식은땀이 뻘뻘 흐른다.

땀방울이 피부 위를 타고 미끄러지는 불쾌한 감촉이 똑똑히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나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데도 나는 지금 서늘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원색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꺼림칙함을 앞에 두고 내 몸은 입도 뻥긋하지 못할 정도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혼란에 빠져 착란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건만…

의외로 스스로도 경이롭다 여길 정도로 내 마음은 침착했다.

어쩌면 옆에서 누군가 딱히 꼬치꼬치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의식을 놓는다고 손쉽게 도망칠 수 있을 만큼 눈 앞에 펼쳐진 어둠이 상냥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부터 내 선택이 나와 선배 두 사람의 미래를 좌우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왜냐하면 꿈이나 환상은 간절히 바라는 이루기 어려운 욕망을 왜곡된 형태로라도 성취해주기 위하여 나타나는 면도 있지만, 자신에게 닥칠 위험이나 미래를 예시하는 면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맞서기로 한다.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해본다.

우선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인간이 자주 그러하듯이 허벅지를 살짝 꼬집어봤다.

통증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다행이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기엔 상황이 상당히 복잡미묘하다만, 어찌 되었든 간에 아무래도 길을 걷던 도중 나도 모르는 새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꿈을 꾸고 있다거나 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다음으로 생각해 봄직한 건 어떠한 종류의 약물이 보여주는 환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맹세코 약이라고는 손도 대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 몰래 내가 먹을 음식에 타는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긴 했지만,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선배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서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애초에……, 시야가 일그러지는 선에서 그치는 종류의 단조로운 변화가 아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홀로 빛을 발하던 태양이 급속도로 검은 구름에 가려져 버리는……, 온 세상의 빛과 어둠이 한순간에 뒤바뀜과 동시에 세계 자체의 겉과 속 또한 뒤집혀버리는 듯한 급격한 변화.

이건 세상이 변했다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다른 세계에 왔다고 하는 게 설득력을 가질 정도의 거대한 자각몽이었다.

그래, 내가 제일 처음에 떠올린 생각이 ‘온 세상이 내 눈을 속이고 있는 건가?’ 였을 정도로.

단순 섭취만으로 이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꿈을 보여주는 각성제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먹기만 해도 이 정도 효과를 주는 각성제가 혹여 존재했다면 역사가 뒤집혔을 거라 아무리 관심이 없더라도 적어도 이름 정도는……, 하다못해 그 존재 정도는 모를 리가 없었다.

‘주삿바늘을 통해 약물이 식도를 거치지 않고 혈액에 직접 투여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흐음……, 단번에 투여된 대량의 약에 절어 뇌가 흐물흐물해지면 세상이 이런 식으로 보일지도.’

누군가에게 뒤에서 습격을 당해 내가 모르는 새에 어딘가로 납치당하고, 내가 의식을 잃고 기절해 있는 사이 대량의 약물을 주입 당해 일어났더니 이 모양 이 꼴이더라는 섬뜩한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무심코 자신의 팔뚝을 들여다보곤 그 생각 또한 머리에서 지웠다.

‘만약 그랬다면 팔뚝에 무수히 많은 바늘 자국이 남아있었겠지.’

‘주사기 한두 개로는 턱도 없을 터.’

그리고 불쾌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자를 납치할 경우 대개 그 몸이 목적이란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납치당했다면 지금쯤 약물이 아니라 선배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몸을 유린당해 더러운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실체가 아닌 신비주의 쪽으로도 접근해보기로 한다. 괴이(??)가 현실을 침식하는 것은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였고, 나 또한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픽션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했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겠지.

결국 나는 가능성을 두 가지로 좁혔다.

하나는 만민(?民)의 공감.

우리 모두는 무의식의 저편에서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인 경우 그 끈은 너무나도 가느다래서 내가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유대감 따위 느낄 수 없다.

끽해봤자 외부의 자극에 그저 보편적인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정도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건 내가 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의지가 너무나도 거대하다면 어떨까?

단순히 자기 안에 머물러 이어져 있기만 한 게 아니라, 흘러넘쳐서 다른 사람의 자아까지 침범할 정도라면…….

만약 그렇다면 그 인간의 의지는 얼마나 강한 것일까.

타인의 자아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으며 천변만화(???化)하는 의식의 세계를 무로 되돌리고 형태가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여 경고를 할 정도라니…….

분명 제정신은 아닌 사람이겠지.

자신의 경고를 어기면 무슨 짓이든지 저지르겠다고 세상에 엄포를 놓는 거나 다름없었다.

보통 미치지 않고서는 타인의 영역을 덮어쓰는 이 정도 광기를 맨정신의 인간은 가지지 못한다.

애초에 이런 게 가능할 거라 생각되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단 한 명뿐이었다.

신혜민.

존재감이, 그 정신이 인신(人?)의 영역에 다다른 그녀 정도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즉, 내가 겪은 일이 만약 다른 사람의 독기에 닿아서였다면, 아집만으로 신혜민 그녀와 같은 영역에 있는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런 사람을 적으로 돌린다라……, 솔직히 심적으로 부담되었다.

지금까지 중에 진실에 가장 접근했다는 예감이 살짝 들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강하게 부정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신혜민 때문이었다. 그녀와 동격의 존재가 또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 정도의 존재라면 본인이 아무리 자신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법이다.

상상도 하기 싫지만, 백 보 천 보 양보해서 설령 그런 존재가 있다 한들 그다음이 진짜 문제였다.

바로 동기였다.

대체 신혜민에 한없이 가까운 지고한 인간이 뭐가 아쉬워서 내가 선배와 얽히는 걸 이렇게나 강하게 억제하려 든단 말인가.

솔직히 내가 말해놓고도 웃음조차 안 나왔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건 단 하나.

호신의 극의(??) 뿐이었다.

세상이 워낙에 흉흉하다 보니 의무적으로 들어야만 했던 안전교육들을 떠올려본다.

다양한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매뉴얼들이 있긴 했었지만, 그것들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안전수칙은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방에 모든 것이 치우쳐져 있었다.

위험이란……, 범죄란……, 대처해야 하게 되는 시점에서 이미 모든 것이 부질 없을 정도로 늦었기 때문이다.

잃는 것의 가치가 달라도 너무나도 다르다 보니 어쩔 수가 없다.

잃을 게 없는 자와 잃을 거뿐인 자의 싸움이니 그곳엔 패배만이 존재한다.

너무도 불합리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그러니……, 자기 몸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위험과 직면할 상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수뿐이 없다.

위험의 싹은 다 자라기 전에 일찌감치 짓밟는 거로 끝내고 만족할 게 아니라 토양째로 파내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다행히 우리 인간은 그 점에 있어서 축복받은 존재였다.

다른 동물에 비해 육체가 약한 만큼 우리는 뇌가 발달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받아들이게 됐는데……, 그중에 특히나 차별화된 게 규칙적인 시각정보에 섞인 동떨어짐을 순간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이다.

밥을 먹을 때를 떠올리면 편하다. 무척이나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물론이거니와 아무리 사소한 이물질이라도 우리는 반드시 잡아낸다.

거기에 예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직 구현되지 않은 위험의 징조 같은 걸 내 무의식이 감지하고는 내게 경고를 보내는 걸까…….

사람의 감이란 입 밖으로 다른 사람에게 내고 나면 대개 근거가 없다며 절하되기 마련이지만,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을 내놨다 한들 직관이란 무시할 게 못 된다.

특히나 안 좋은 쪽의 예감이란 거의 들어맞는다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매사를 한쪽만으로 판단하는 우를 저질러서는 안 되었다.

편협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실패의 지름길이니까…….

도박이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이유는 도박이 나빠서가 아니다. 사람이라는 게 실패했을 경우는 염두에 두지 않고 성공했을 때만 생각하기 쉬운 자기 일에 한해서만은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일련의 흐름은 저주……, 혹은 최면처럼 내 의식을 선배와 만나지 않고 이대로 돌아가게 하려는 쪽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분명 이대로라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라며…….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이대로 발길을 돌린다면…….

나는 후회하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 아니다.

분명 더 많이 후회할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건 내 마음에 관해 묻고 있는 문제였다.

나는 ‘지금의 사랑’ 때문에 ‘미래의 자신’이 아무리 불행해지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받아들일 각오가 있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였다.

사람의 인생은 짧으면서도 길다.

그러다 보니 첫사랑이 끝 사랑인 경우는 생각보다 무척 드물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사귀지도 않고 있는……, 내 것이 아닌 남자의 문제에 얽혀 설령 지금까지의 내 삶이 무너지게 되더라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냐는 내 마음의 망설임에서 나온 거다.

솔직히 뭐라고 답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은 연약하니까.

이기적이고 간사하니까.

나 역시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단정할 순 없었다.

그렇지만──,

一??心?(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렇다면 괜찮아…….

나라면 잘할 수 있어.

나의 사랑은 대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닌걸.

보답 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선배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내 앞을 막고 있던 목을 매달고 있는 소녀가 기분 나쁘게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곧바로 산산이 흩어져 사라졌다.

마치 자기는 이미 경고했으니 이 뒤는 전부 내 책임이라고 말하는 듯이──.

‘그렇다면 오히려 바라는 바다.’

그리하여 소녀는 백 척의 장대 끝에서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다솜은 아직 모른다.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이지만, 송나은이 그녀의 앞에 얼마나 가혹한 ‘사랑의 증명’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소녀는 언덕을 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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