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럽혀진 아이돌-104화 (104/136)

〈 104화 〉 제103 화 인과(??)에 휘감기는 먹구름 (2)

* * *

어디선가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한 마리였지만 조금씩 그 수가 늘어나더니 이내 여기저기서 우짖는다.

무척이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흉흉한 울음소리였다.

내가 그 소리에 잠시 주의를 빼앗겼을 때였다.

세찬 바람이 불어 내 앞머리를 헝클어뜨린다.

먼지를 일으킬 정도로 강한 바람에 옷을 여미면서 무심코 눈을 살짝 감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눈을 뜬다.

그러자 내 앞에는 어느샌가 괴이(??)가 늘어져 있었다.

눈앞의 일그러진 풍경을 보자 ‘세계가 나를 속이고 있다.’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자신에게 그럴 가치가 없다는 건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의 연약한 마음이 내 눈을 흐리며 나를 속이고 있는 건가.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발자국.

핏물로 흥건한 발자국…….

선혈로 물든 흉물스러운 발자국이 듬성듬성 찍혀 있었다.

얼핏 봐서는 불규칙하게 이리저리 제멋대로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들은 명백하게 어느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발자국이 향하고 있는 곳 너머로 시선을 주자 그 끝에는 한그루 거대한 나무가 선배네 집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선배네 집에 빛이 들지 못하게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는 구불구불한 가지들은 어째선지 뱀을 떠올리게 했다.

수백 수천의 검은 뱀이 두 눈을 사이하게 빛내며 호시탐탐 선배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곳은 이미 다른 계(?)였다.

나는……, 지금부터 이 길을 걸어 저 뱀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가…….

그저 좋아하는 남자의 집에 쳐들어가는 것뿐인 단순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겁내고 있기에 이런 불길한 환상까지 보고 있다는 건가.

내가 마른침을 삼키며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수많은 눈동자가 일제히 날 쳐다봤다.

질량이 없는 시선이 실체가 있는 탄환이 되어 내 온몸을 꿰뚫는 감각.

그 순간 소리가 사라졌다.

불행을 부르는 까마귀 울음소리로 가득했던 세상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적막한 어둠이 찾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환한 대낮이었건만 하늘이 급속도로 빛을 잃는다.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검은 하늘로부터 무언가가 내 발치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처음에는 빗방울인 줄 알았더니 그것은 그런 귀여운게 아니었다.

징그러운 뱀이었다,

하늘로부터 뱀들이 철벅 철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진다.

그리고 지면에 부딪힌 충격으로 온몸이 터져나간다.

파열하는 살점과 함께 사방으로 피가 튄다.

가만히 있던 내 뺨에도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뱀은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시체가 점점 쌓여간다. 급격하게 쌓여나가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터져버린 시체의 파편들에서 피가 흐른다.

당장이라도 이곳에 내를 이룰 것처럼 흘러내리는 대량의 피는 이곳에 새겨져 있던 피 발자국을 씻어내고 그 위를 새로운 글자들로 덮어썼다.

二?九

三?

行???(행주좌와)

????(섭률의계) ????(섭선법계) ????(섭중생계)

Superbia

Avaritia

Invidia

Ira

Luxuria

Gula

Pigritia

?(탐) ?(진) ?(치) ?(만) ?(의)

??四???

一?(일애)

피로 붉게 물든 대지 위에 덧씌워진 뭉개지고 일그러진 의미불명의 숫자와 글자들.

처음에는 그것들을 보자마자 어려운 한자와 낯선 단어들뿐이라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주박에 걸린 것처럼 어째서인지 글자들로부터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뇌가 의지와 관계없이 눈에 곧바로 들어오는 숫자들을 통해 필사적으로 그 의미를 유추해보려 한다.

시작은 마지막 두 줄.

팔만사천의 무언가(??四???)와 하나의 사랑(一?)이었다. 우선 팔만이란 숫자부터 뜯어본다. 팔만이란 무척 특이한 수였다.

떠오르는 거라곤 일반적으론 팔만대장경 단 하나뿐이니까.

그렇다면 이건 불교와 관련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는 걸까.

불교에 대해 떠올려본다. 불교는 벗어남의 종교. 그렇다면 근본적인 문제를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려는가?

그건 번뇌다.

그렇다면 저건 팔만사천의 번뇌라는 걸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숫자는 그저 표상일 뿐.

팔만사천이란 무수히 많은 것, 즉 진실로 가리키고 있는 건 세상 모든 것.

그렇다면 저 마지막 두 줄은 이 세상 모든 번뇌가 끝에 가선 하나의 사랑으로 귀결 된다고 내게 말하고 싶은 걸까.

마치 수많은 물줄기가 하나의 대해로 귀결되듯이 말이다.

그게 아니면 하나의 사랑으로부터 팔만 사천의 번뇌가 생겼다는 걸까.

어쩌면──, 제일 처음에 대지 위로 떠오른 숫자(一)까지 연계해서 생각한다면 하나의 욕망에서부터 팔만사천의 번뇌가 일어나고, 그렇게 태어난 모든 번민은 하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라진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러면 다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 글자들이 번뇌를 나타내고자 한다면 바로 그 위에 적혀있는 단어들은 칠죄종(七??)을 의미하는 것일 터였다.

그러면 1, 29, 300이 나타내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번뇌에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오감(五?)에 마음을 더한 육감(?)이 사물을 접하면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로 분별하는 가장 기본적인 18개의 번뇌로 출발한다.

그다음은 여기에 육감(?)이 느끼는 ‘즐겁다(?), 괴롭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다(?),’는 18개의 번뇌를 새로이 더한 삼십육 번뇌다.

그리고 이 서른여섯 개의 번뇌가 각각 과거, 현재, 미래의 3세(三世)를 가지니 이를 일컬어 백팔 번뇌라고 표현한다.

이것들을 숫자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하나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니 1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다음인 29와 300에는 들어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숫자들은 번뇌와는 상관없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까.

흐음……,

내가 이제 제일 처음 지면 위로 떠오른 숫자에 대해 파고들려 할 때였다.

지면에 거대하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글자들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마치 나에게 이 이상 발을 들이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자 거기에는 검은 구름이 해를 완전히 가리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빛이 사라지고 해가 있던 자리에──, 그 빈자리를 대신하며 태양 못지않게 크고 둥그런 무언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눈이었다,

광기에 절은 미친 눈동자가 저 하늘에서부터 흰자위를 번득이며 인간이 개미를 관찰하는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각……

사각……

바퀴벌레가 내 몸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시선을 내리면 내 피부 위로 바퀴벌레가 아니라 거대한 지네가 꿈틀거리고 있을 것만 같은 오싹함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새파랗게 질림과 동시에───, 하늘로부터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는 어딘가 노래처럼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노래라기엔 너무나도 사악한 오기와 짙은 열등감이 느껴졌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저주하는 거라 단정 짓기엔 또 무척이나 엄숙하고 비장해서 듣는 태도에 따라 성가(??)처럼도 들리는 기이한 음성이었다.

“나는……없어요.”

“……외에는”

“……는……게……”

“……외에는……없어요.”

귀에 들어온 순간 그대로 흩어져 버려 머리에 남지 않는 노래가 드디어 끝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바퀴벌레의 날갯소리 같은 목소리로 미친 듯이 사각사각 웃기 시작했다.

“킥…킥킥…키깈깈기키기깈기키기킥킥키키깈킥킥킥킥킥키기”

“킥킥킥”

“──!!!”

그리고는 아무런 전조 없이 웃기 시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뚝 하고 웃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고장 난 녹음기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외에는 없어요.”

“…외에는 없어요.”

“…외에는 없어요.”

“…외에는 없어요.”

한 번씩 반복될 때마다 주변 경치가 녹아내린다.

“…외에는 없어요.”

여기저기 붙어있는 간판들이 검은 알갱이가 되어 산산이 흩어진다.

“…외에는 없어요.”

여기저기 주차되어 있던 자가용들이 검은 알갱이가 되어 산산이 흩어진다.

“…외에는 없어요.”

주변에 늘어서 있는 가로수들이 검은 알갱이가 되어 산산이 흩어진다.

“…외에는 없어요.”

상점들이 검은 알갱이가 되어 산산이 흩어지며 골목 안쪽에 있는 주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외에는 없어요.”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주택가도 한순간에 검은 알갱이가 되어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져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사방에서 울리는 불길한 음성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 이후였다.

아무것도 없어진 황량한 벌판에서 하나둘 딱히 꼬집어서 말할 특징이 없는 개성없는 마네킹과 같은 새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전체적으로 개성 없고 퀭한 눈을 하고 있는 가면과도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것들의 입가는 하나같이 초승달을 그리며 히쭉 웃고 있었다.

눈은 공허한데 입술만 히쭉 웃고 있다 보니 아예 표정이 없는 것보다 되려 그게 더욱 불쾌했다.

아래에서, 뒤에서, 옆에서, 위에서

하나둘 떠오른 얼굴들로 대지와 하늘이 가득 메워졌다.

가면들은 제각각의 장소에서 불규칙하게 떠올랐지만, 피 묻은 발자국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공허한 시선으로 한군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선배의 맨션이 있는 야트막한 언덕 위.

거기에는 어느새 맨션을 가리고 있던 한 그루 나무만이 우뚝 서 있었고, 그 나뭇가지에는 목을 매달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어 자세히 바라보려 할 때 시체인 줄로만 알았던 여자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내 키보다도 커다란 거대한 지네 소굴에 알몸으로 던져진 것과도 비교도 되지 않는 섬뜩함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낯익은 인상이었지만, 두 눈덩이가 퀭하게 파여있고 그 파인 자리를 중심으로 구더기들이 기어 다니고 있어서 구체적으로 저 여자가 누군지 떠올릴 수 없었다.

아니, 너무도 징그러운 그녀의 모습에 그녀가 누구인지를 떠올리는 것 자체를 내 뇌와 마음이 거부했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지도 몰랐다.

트라우마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다.

오늘 내가 본 이 목매단 여자의 얼굴을 평소에는 잊고 지내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건 무리겠지. 분명 평생 갈 거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어두운 곳에 혼자 있을 때는 문득문득 떠올릴 것만 같았다. 분명 나는 그때마다 섬찟한 공포에 몸을 떨지 않을까.

어쨌든 시간마저 멈춘 것만 같은 가라앉은 세계에서 여자가 서서히 팔을 치켜들었다.

끊임없이 뱀이 기어 다니고 그 가지는 하늘을 가리고 있는 불길한 나무에 목을 매달고 있는 여자가 손가락 끝으로 내 뒤를 그저 조용히 가리켰다.

……이건 경고인 걸까.

내 뒤로 정체 모를 불길한 무언가가 멀리서부터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있다거나, 혹은 이 앞에 있는 선배에게 가지 말고 이대로 되돌아가라는…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무심코 아까 전 핏방울이 튄 것 같았던 뺨을 쓰다듬어본다.

다소 끈적하고 기분 나쁘긴 했지만, 내가 뱀의 피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은 내가 지금도 온몸으로 흘리고 있는 식은땀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