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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혀진 아이돌-103화 (103/136)

〈 103화 〉 제102 화 인과(??)에 휘감기는 먹구름 (1)

* * *

다솜은 지웅과 승진 두 사람의 격려를 한 몸에 받아 끝없이 고양된 기분으로 기세 좋게 부실에서 나왔다.

남은 수업 따위 제쳐두고 당장이라도 선배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곧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우리는 분명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각자가 다른 세계를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이 선의로 포장되어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 타인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독약일 뿐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선배를 위하는 내 마음의 부산물로 선배를 심려케 하는 일만은 반드시 피해야만 한다.

그보다 나한테 슬픈 일은 없을 테니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긴다.

일단 선배의 집에 찾아가는 것은 정해진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이제 때려죽여도 물릴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그 시기였다.

연애는 전쟁이다.

그리고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전쟁의 승패를 좌우해왔던 건 어떻게 싸웠느냐보다 언제 싸웠느냐였다.

그러니 나는 신중해야만 했다.

기회라고 생각될수록 서두를 게 아니라 멈춰 서서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에 나서야만 했다.

지금 내가 오늘 남아있는 수업을 제쳐두면서까지 선배의 집을 찾아간다면……, 되려 선배에게 걱정을 끼치는 꼴일 것이다.

그처럼 마차를 말 앞에 놓게 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두 개로 좁혀졌다.

오늘 방과 후냐, 내일이냐.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엔 병문안이라든가 걱정된다든가 하는 걸 핑계로 좋아하는 남자 집에 여자 혼자서 찾아가는 거였다.

솔직한 심정을 피력하자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조금은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 가장 좋은 선택지는 하루 정도 기다린 다음에 내일도 선배가 안 오는 걸 끝까지 확인한 다음 찾아가는 거겠지.

내 마음을 선배가 눈치채줬으면 싶었지만, 동시에 그의 눈에 내가 너무 그에게 애걸복걸하는 것처럼은 여겨지고 싶지 않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고백하기보단 고백받고 싶다.

그런 내 복잡미묘한 소녀 감성까지 고려하면 장점으로 가득 찬 선택지였다.

분명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게 많아보이는 무척이나 달콤한 얘기였지만, 여기에도 단 한가지 치명적인 구멍이 있긴 했었다.

선배가 내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학교에 나와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거였다. 그렇지만──, 그럴 가능성은 선배 곁에서 그 누구보다 오래 선배를 지켜봐 온 내가 판단하건대 상당히 희박해 보였다.

아니, 아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해도 좋았다.

상냥함과 성실함이 그 무엇보다 큰 장점인 선배였다. 그런 선배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렇게 수업을 빠졌다는 건 정말 어지간히도 큰일에 휘말렸거나 도저히 학교에 오지 못할 근심거리가 생겼다는 거겠지.

하루 이틀 정도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학교에 얼굴을 비출 그런 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물론, 미래에 대한 확신은 금물이다. 아무리 자신 있게 예측했다 하더라도 항상 틀릴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역설적이게도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도 상관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건 전제 자체가 틀렸을 경우뿐이니까.

그건 즉 선배에게 내가 상상했던 그런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다.

선배의 집에 찾아가 그를 위로해주는 기회를 놓치는 건 안타깝지만, 역시 가장 좋은 건 내가 그를 위로해줄 만큼 안타까운 사고가 선배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경우 평소처럼 선배 곁에서 같이 농담 따먹기나 하면 되겠지.

남녀관계에 있어서 자극적인 조미료도 분명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지만, 평소처럼 같은 장소에서 그저 곁에 있기만 해도 마음이 충족되는 관계가 더욱 내 취향이었다.

으음……,

역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늘 당장 헐레벌떡 찾아가는 거보다 하루 이틀 상황을 마저 보고 가는 게 좋다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역시 오늘은 너무 성급한 걸까……, 고작 하루 학교에 안 나온 것 정도로 애인도 아닌 남자 집에 찾아가는 것도 너무 모양새가 빠지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점점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할 때였다.

나는 전력으로 고개를 붕붕 양옆으로 흔들며 슬금슬금 머리를 치켜들기 시작한 내 나약한 마음을 간 칼에 쳐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뤘던 결과가 지금 이 꼴이었다.

지금까지와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면 앞으로도 선배와 계속 같은 관계겠지.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다가는 정말 중요한 순간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렀다가 선배를 잃는다.

그건 나 자신의 죽음보다도 훨씬 두려운 거였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악몽.

그 까짓거에 비하면……, 여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소녀의 꿈이라든가 전부 하찮다.

그래, 답은 나왔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몰랐다.

선배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으니까 남은 수업은 다 듣고 곧바로 집으로 찾아가 보자.

하나의 답을 내린 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음 강의실로 이동했다.

고민하느라 점심을 아예 거르게 됐지만 허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선배를 만나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에 의욕으로 가득 차서인지 배까지 덩달아 더부룩한 느낌이었다.

물론, 이런 내 긍정적인 의욕은 내 수업 태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조금 전까지 무척이나 의욕 충만했던 게 전부 환상이었던 것처럼 나는 멍하니 수업을 듣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눈은 교수를 쫓고 있었지만, 그가 하는 말은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이후의 일에 대해 고민할 일이 너무 많은 탓인가, 의식이 번뇌에 사로잡힌 까닭이었다

남자 방에 찾아가는 게 처음이었다. 그것도 혼자 사는 남자 방이었다.

그동안 모험을 하지 않았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는 대모험이었다.

설레지 말라는 게 무리한 주문이다.

그렇지만 조금 막연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선배가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채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그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위로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곤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 역시……, 그거겠지.’

남자가 풀이 죽어있을 땐 여자가 몸으로 위로해주는 게 최고겠지.

순간 알몸인 자신이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선배의 옷을 차분하게 벗기며 그를 이끄는 모습을 상상하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너무 부끄러워 펑! 하는 소리가 나며 얼굴이 폭발한 것만 같았다.

주변에서 봐도 그런 내 태도가 눈에 확 띌 정도로 이상했는지, 앞에 있는 교수에게 딴생각하지 말라고 주의를 들었을 정도였다.

이 강의는 그래도 꽤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그런데도──, 관심도 없는데 선배 하나만을 바라보고 단순히 내 혹심만으로 신청했던 과목에 선배마저 없어서 죽을 만큼 지루했었던 오전보다 지금이 더 시간이 더디게 갔다.

그래도 뭐든지 끝은 있는 법이다. 어쨌든 지루했던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빨리 가방을 싸고 강의실을 나서려고 했을 때였다.

“잠깐만.”

누군가 날 불러세웠다. 나직하면서도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귀에 꽤나 익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뒤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있었다.

같은 학생이라기보다는 아가씨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나와는 그다지 연이 없는 여자 그룹의 리더 격인 여학생이었다.

이름은 아마 봉은혜였던 거로 기억한다.

사람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나지만 그녀의 경우 내게 종종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으레 그렇듯이 그녀의 주변으로 같은 그룹의 여자들이 있었다. 그녀들에겐 꽤나 안된 얘기지만 내가 볼 땐 아가씨와 하녀들처럼 보였지만──.

그만큼 은혜 그녀의 존재감은 주위와 조금 남달랐다.

실제로도 상당한 부잣집의 아가씨란 소문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건 나와는 상관없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 딱히 나는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은 마음도 딱히 대답하지 않고 턱짓으로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

내 그런 태도에 그녀 그룹의 다른 여자들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은혜는 내 그런 태도에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웃으면서 내게 권했다.

“우리들 지금부터 카페라도 갈 건데 괜찮다면 같이 갈래?”

“미안.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알았어.”

그녀는 쌀쌀맞게까지 느껴지는 내 대답에도 익숙하다는 듯이 쉽게 물러섰다.

그녀가 내게 이렇게 먼저 권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거절당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내게 이렇게 같이 가자고 권유하는지는 대충 안다.

선배가 없는 곳에선 이렇게 언제나 혼자인 나를 가만 놔둘 수 없어서겠지.

그런 그녀의 고운 심성이 분명 주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일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그녀의 추종자들이 뒤로 내 험담을 하는 게 들려왔다.

“또 저렇게 혼자 도도한 척하면서 은혜를 무안하게 만들다니…….”

“그나저나 은혜는 왜 저런 애한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야? 친구라면 우리로도 충분하지 않아?”

그 외에도 다소 이것저것 심한 말도 들리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그 자리를 뜬다.

매번 거절해서 미안한 마음도 조금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선배 이외의 다른 사람 따위 나한텐 아무래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나한텐 선배만 있으면 됐다. 그 이외는 불순물이었다.

우정이라든가, 청춘이라든가 다 필요 없다.

그딴 거에 신경을 쓸 바에는 1초라도 더 선배를 생각하는 게 내겐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유익하고 즐거웠다.

백만 천만의 호감보다 선배 한 사람의 사랑만을 원한다,

그렇게 사소한 트러블이 있었지만, 교문을 나설 때쯤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내게 있어 선배 이외의 인간관계는 그 정도 의미밖에 안 된단 말과도 같았다.

‘어떻게 할까……, 일단은 집에 돌아가서 샤워라도 하고 갈까…….’

‘아니! 선배네 방에서 씻으면 되지!, 막 이래 보기도 하고………’

농담 식으로 혼자 말해놓고도 무안했는지 머릿속으로 혼자 웃으면서 넘기긴 했지만……,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돼서 내가 선배네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 동안 선배가 침대 위에서 혼자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내가 생각해도 무척이나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의 시선도 잊고 넋을 잃은 채 입에서 침을 흘릴 정도로…….

선배도 남자니까 좁은 방안에 여자와 단둘이 있다 보면 조금은 그런 기분이 드는 것도 불가능한 얘기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선배의 머릿속이 신혜민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결코 일반에게 닿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니까.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고까진 안 하겠지만, 도저히 나와 같은 존재라곤 여길 수 없는 범인을 까마득히 초월한 존재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 여자는 소설이나 영화 속의 어지간한 등장인물보다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존재였다.

선배도 그건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한번 몸을 섞고 나면 선배의 생각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오히려 지금까지 신기루를 쫓느라 실제 여자의 몸이 주는 즐거움을 일절 접하지 못했던 만큼 그 반동으로 내 몸에 더욱 푹 빠질지도 몰랐다.

그러려면 역시 준비해 가야겠지.

선배네 집에 향하기 전에 편의점부터 들른다.

곧바로 콘돔을 구매했다.

가뜩이나 처음 사는 거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는데, 하필 남자가 카운터를 보고 있어서 속으로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고생 꽤나 했다.

그렇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 후에 있을 선배와의 달콤한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들뜬 기분으로 선배네 집을 향했다.

그리고──, 그런 내 흥분된 기분은 멀리서 선배네 집이 눈에 들어온 순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체 이건……?’

무심코 걸음을 멈춘 나는 자신의 눈이 잘못됐나 싶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내 눈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햇빛은 눈 부셨다.

그렇다면 대체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나 하늘이 맑고 햇빛은 따사로운데, 어째서 나는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다는 말인가.

기분 탓이라고 믿고 싶었다.

모든 것은 그저 내 착각이길 간절하게 바랐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이때, 이미 선배를 둘러싼 세계는 조금씩 일그러져 있었고, 마녀의 손톱 역시 조금씩 나를 향해 거리를 좁혀오는 중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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