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제95 화 이 노래 별이 되어라 (10)
* * *
어찌어찌 사장과 함께 욕실에서 나왔다. 수건 한 장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나왔음에도 해방감이나 시원함보다는 후끈함이 더욱 컸다.
딱히 거실에 머물 이유도 없었기에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위층으로 올라간다.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간 뒤, 나는 속옷만 얼추 입은 상태로 화장대 앞에 앉아 가볍게 메이크업을 하기 시작했다.
딱히 화장에 공을 들이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본만 해준 다음 머리 손질 만을 앞에 두었을 때였다.
내가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얼굴을 뜯어보며 어떤 스타일을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자──,
톡…!
톡…!
방문 밖에서 사장이 문을 두어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내가 문밖을 향해 대답하자 사장이 내게 말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나.”
“네.”
자리에서 일어난다. 뭐라도 위에 걸칠까 했지만, 딱히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쓸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냥 이대로 있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왕 사장이 지금 온 거 사장에게 입을 옷을 골라달라고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기도 하고.
어쨌든 그런 마음으로 여러 가지 마음이 하나로 얽혀 그대로 문을 열었다.
“음…….”
사장이 순간 내 차림새를 보고 새삼 당황했는지 낮은 신음성을 삼켰다.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겉으로 티 낼 정도로 지금의 나는 서툴지 않았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모습으로 거울 앞에 앉아서 몸단장을 재개하자 사장이 뒤늦게 내게 말했다.
“아직 준비 중이었나 보군.”
“네에……, 뭐.”
“조금 있다가 다시 오지.”
“괜찮아요. 금방 끝나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가…….”
“네, 그렇답니다. 후훗.”
“……”
사장이 문 근처에서 조금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있는 게 느껴졌다.
‘후후……’
사장이 난처해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속으로 조금 웃음이 나왔다.
머리에 빗질을 하면서 그에게 말을 묻는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세요?”
“음……. 까먹었다.”
“뭐예요~. 그게……, 후훗. 뭐, 그런 거라면 그거대로 상관없지만요. 혹시 제 모습에 넋이 나갔다든가?”
“……그럴지도. 그런 거로 해두지.”
“…….”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을 때, 사장이 내게 말했다.
“흠……, 모처럼이니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후, 사장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내 뒤에 서더니 능숙한 손길로 내 머리를 손질해주기 시작했다.
긴 생머리를 넘겨 오른쪽 어깨 앞으로 빼낸다. 그렇게 드러난 왼쪽 귀를 매만지면서 그가 내게 말했다.
“자네는 자네 생각 이상으로 귀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드러내는 게 어울려. 앞으론 항상 의식하도록.”
“네…….”
칭찬받는 거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뭔가 무척이나 부끄러워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그……, 무척이나 익숙하시네요.”
나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말했지만, 이건 순수한 본심이기도 했다. 물론, 여자를 칭찬하는 데에 익숙하단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포함되었다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그런가……, 뭐,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렇게 머리 손질을 해줬으니……, 그런 걸지도.”
그건──, 미용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거나 하는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렇게 말한 사장은 어딘가 그리운 듯이……, 혹은 조금은 즐거운 얼굴을 하곤 한동안 더 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
내가 지금 이 순간 사장에게 ‘그녀’ 대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의 대체품이라는 점에 딱히 불쾌감을 느끼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게 된 자기 자신이 대견하게까지 느껴졌다.
내친김에 조금 더 ‘그녀’가 되어 사장에게 응석을 부리기로 했다.
“옷도 골라주세요.”
“흐음…….”
내 부탁에 잠시 방 안에 있는 옷들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긴 사장은 이내 두 개의 옷에 번갈아 가며 시선을 주더니 그중 한 벌을 손에 들고 말했다.
“이게 괜찮겠군.”
그렇게 말하며 사장이 내게 건네준 옷은……, 어딘가 여고생의 교복을 떠올리게 하는 옷이었다.
‘사장님 취향 아저씨 같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가 이런 옷이 마음에 든다면야……, 라며 기꺼운 마음으로 입고 방을 나섰다.
…
노래방으로 향하기 위해 레코딩 하우스 밖으로 나와 길을 걷는다. 한동안 말없이 서로 묵묵히 걷다가 사장이 옆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노래방은 좀 다니는 편인가?”
“아뇨, 그다지……, 저 친구 없으니까요.”
“……”
“딱히 혼자 가는 게 이상하다거나 부끄럽다거나 그런 걸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필요를 못 느낀달까요. 혼자 가면 연비가 나쁘다고 해야 할까요.”
“뭐, 그 점은 나도 마찬가지긴 하군.”
“후후, 그러고 보니 사장님도 친구 없으셨죠.”
“…….”
“뭐, 어쨌든…….”
“아, 말 돌리셨다.”
“……얘기를 계속하도록 하지.”
“네.”
“흠흠, 요즘은 코인 노래방이라든가 점점 혼자서 노래 연습을 할 수 있는 곳이 늘어나는 추세라 가볍게 혼자 가서 부담 없이 몇 곡 부르다 올 수 있으니 거기라도 종종 다니는 게 좋을 거다.”
“네…….”
“그다지 납득하지 못한 거 같군.”
“아뇨, 딱히 그런건…….”
“하지만──, 보이스 트레이닝이란 게 그다지 거창한 게 아니거든. 많이 부르고, 많이 녹음하고, 그걸 들어보면서 이상한 부분을 조금씩 고쳐나가면 되는 거야.”
“그런 걸까요……?”
“그런 거다. 물론 몇 가지 보편적인 룰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결국 정답이란 없으니까.”
“그래도 굳이 정답이 있다면 최대한 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자기에게 듣기 좋은 게 정답이라고 할 순 있겠군.”
“네…….”
“잔인한 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이스 트레이닝이나 실용음악과 관련된 학원에 적잖이 꿈과 환상을 가지고 있지.”
“학원만 다닌다면……, 트레이닝만 받는다면 득음을 해서 두성이든 뭐든 고음을 쫙쫙 올릴 수 있게 된다든가 말야.”
“하지만──, 실제로 남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극히 적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사람들은 돈만 날리고 마지막엔 자신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게 되기 마련이지.”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닌데 말이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중요한 건 뭐죠……?”
“지금부터 그걸 알아보러 가는 거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것보다는 너 자신이 직접 확인해보는 게 좋겠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서서 노래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점심시간……
여기는 다솜과 현민이 다니고 있는 학교. 다른 학생들이 그룹별로 삼삼오오 모며 학생식당이든 학교 근처의 음식점이든 어디로든지 하나같이 즐거운 얼굴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다솜은 주변의 그런 분위기에 홀로 동떨어져 심각한 얼굴을 하곤 혼자 바쁜 걸음으로 동아리실로 향하고 있었다.
말이 빠른 걸음이지 어느 순간부터는 달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부실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상당히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다행히 날씨가 쌀쌀한 편이라 그다지 땀이 나지 않은 게 그녀에겐 커다란 위안이었다.
걸음을 느긋하게 되돌리며 천천히 숨을 고른다. 부실 근처로 가자 언제나처럼 익숙한 신혜민의 노래와 함께 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다행이다.’
평소와 같은 왁자지껄함에 안도한다.
어쩌면……, 지금까지 고민한 건 전부 혼자서 호들갑을 떤 게 아닐까.
그래, 대학생이 수업을 빠지는 것 정도는 사실 흔한 일이다. 핸드폰이 꺼져있는 것도 뭐……, 자기 전에 충전을 깜빡했다든가…….
‘응……, 분명 그럴 거야.’
그러니──,
이 문을 열면……,
언제나처럼 선배가 조금 부스스한 모습으로 오늘 늦잠을 자서 지금 왔다든가 하는 소릴 하며 맞아줄 게 틀림없어.
근거도 없이 자기 혼자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껏 가벼워진 마음으로 망설임 없이 문을 연다.
그런 나를 제일 먼저 맞아준 것은 라면 국물의 매콤한 냄새──.
그리고, 약간 시큼한 이 냄새는 단무지인가……….
하아……
내가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자 안에 있던 두 사람, 홀쭉한 승진과 통통한 지웅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오……! 소저, 왔소이까? 마침 딱 알맞게 끓여졌는데, 소저도 한 젓가락 드시겠소?”
거기에 현민 선배는 없었다.
뭐, 그런 거겠지. 이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다소 억지로라도 희망을 가져 보려 했던 게 되려 화가 되었다.
냉혹한 현실을 접하자 반동이 너무나도 컸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눈에 띄게 안색이 어두워진다. 갈 곳을 잃은 답답함은 엉뚱한 곳으로 배출되기 직전이었다.
왜……
어째서……
이 둘은 이렇게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평소처럼 지내는 거지? 선배가 없는데……!!!
소중한 동료잖아……
걱정도 안 되는 거야?
두 사람에게 선배란 그 정도뿐이 안 되는 거였어…………???????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불합리한 화풀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정말로 아무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날 배려해서 일부러라도 평소처럼 행동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 아마 그쪽이 더 맞겠지.
뭐어, 조금 머리가 식어 냉정함을 되찾아 그런 걸 알게 되었더라도……,
선배가 없는 이 장소에 계속 있는 건 내게 괴로웠다. 혼자 있어봤자 계속해서 안 좋은 생각만 들 뿐이니까 호의를 받아들여서 점심시간 동안만이라도 여기서 두 사람과 같이 있는 것도 괜찮을 거 같긴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다지 제정신이 아니기에 어떤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험한 말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솔직히 자신 없네.’
“아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미안. 모처럼 권해준 건데. 도서관이라도 가 있을게. 편하게들 먹어.”
그렇게 말한 후 부실 밖으로 나올 때였다.
두 사람의 말이 내 걸음을 붙잡았다.
“소저, 모처럼이니 이걸 빌미로 집으로 쳐들어가 보는 건 어떻겠소? 그 바보는 그 정도가 아니면 모른다오.”
“아……아니……, 난 딱히 그런 게…….”
“뭐, 어떻소이까. 병문안 정도는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오.”
“그……그런가?”
내가 흥미를 보이자 두 사람은 티가 날 정도로 서툰 연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마침 이런 곳에 병문안 세트가?”
“정말이지, 우연이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구려. 이런게 여신님의 은총인가?”
“그러니, 소저. 이건 이제 갈 수밖에 없겠소.”
“자자, 여기 주소도 있다오.”
“뭐야, 정말이지 두 사람 다…….”
어째선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눈물을 흘리는 대신 환하게 웃으며 나는 두 사람을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 두 사람 다 정말 좋아해.”
“후후후……, 안타깝구려 소저, 유감이지만 그대의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겠소.”
“암암, 우리 마음에 계신 분은 오로지 여신님 하나 뿐이기에.”
“응응……, 그래, 그래.”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솜이 부실을 떠나자──, 지웅이 안경을 고쳐 쓰며 옆에 있는 승진에게 말했다.
“정말로 착한 소녀요. 요즘 같은 세상엔 참말로 보기 드문.”
“그러게 말이오.”
“잘 됐으면 좋겠군.”
“……”
“……”
“우릴 위해서도 말이오.”
“그렇지……, 여신님의 은총을 받을 경쟁자가 하나라도 줄어든다면 우리야 좋지.”
“후후후!!!”
“하하하!!!”
“그야말로 우린 악당이구려.”
“……그만합시다. 괜히 더 비참해지니까.”
“동감이오.”
“뭐, 실없는 소리는 이쯤하고 혹시 소문 들으셨소?”
“무슨 소문 말이오?”
“아무래도 그 젊은 사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같다오.”
“그 정도야 뭐, 상관없지 않소? 인텔리라 한들 그래 봤자 인간의 틀 안에 있는 남자. 여신님이 군림하고 계실 동안은 잘 쳐줘봤자 영원히 2 인자요.”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송나은과 함께라는 것 같다오.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지만. 나는 상당히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한다오.”
“과연……, 그건 확실히 위험하구려.”
“다른 사람들 눈은 다 속일 수 있어도 우리 같은 사람들 눈은 결코 속일 수 없지. 그녀만큼 우리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여신을 선망하면서도 대항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는 또 없을 테니까.”
“올 연말은 꽤나 흥미진진하겠구려.”
“진심으로 모든 것을 걸고 여신을 쓰러뜨리려고 도전장을 내미는 자가 나타나는 거니까.”
“뭐……, 아마도 부질없는 짓이겠소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오만 솔직히 조금 꺼림칙하긴 하구려.”
“그게 다 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러오.”
“슬슬 어제 영상이 올라왔을 테니 보면서 신앙심을 회복하시구려.”
“좋은 제안이외다.”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한순간 언뜻 스치고 지나간 송나은이 최근 마지막 방송에서 보여준 불길함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신혜민의 영상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설마 송나은이 단 하나의 염원을 위해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치우친 ‘─────의 마녀’였을 거라고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