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제76 화 은(?)의 눈물 (7)
* * *
은숙은 조금만 몸이 흔들려도 어깨와 어깨가 닿을 정도로 성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몸은 성우를 눈앞에 두고 지금 고양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화류계에 들어와 그동안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들에게 웃음을 팔았던 건 전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운명의 흐름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지난날이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잿빛 인생에 의미가 부여되자 생의 선율이 흘러넘친다.
처음 화류계의 문턱을 밟았을 때가 떠올랐다.
여자로 태어나 꽃을 판다는 각오를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여자들이 이 업종에 종사하지만, 그중 사연 없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라면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누구나가 간직하고 있는 소녀 시절의 꿈을 전부 제물로 바친다는 건 어중간한 각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
나는 언제부터 성우에게 이렇게나 빠져들었던 걸까. 그와 이루어지지 않은 정도로 반쯤 자포자기 상태로 이 업계에 몸을 담다니.
처음에는……, 그저 눈이 조금 가는 정도였던 거로 기억한다. 그는 스스로를 뒷전으로 놓고 언제나 ‘그녀’만을 우선시했다. 언제나 ‘그녀’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를 보며 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누가 챙겨줄까?
다른 사람을 챙겨주기만 하고 정작 자기 자신을 봐주는 사람은 없다니……, 그건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게 사랑이란 걸 몰랐던 소녀 시절의 나는 그게 무척이나 부조리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니……, 같은 동아리에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적어도 자신이라도 그를 똑바로 봐주잔 생각이 들었던 게 아마 계기였던 거 같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점점 그의 좋은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서는 그의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호의가 나에게 향했으면 좋겠다.
그건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라면 ‘그녀’보다 더 그에게 잘해줄 수 있을 텐데──.
그 마음이 사랑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에겐 이미 푹 빠진 그녀가 있었고, 그녀도 그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는 옆에서 보면 무척 아늑해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조화를 깨는 게 커다란 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유독 종례가 늦게 끝난 날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 혼자 뒤늦게 부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곧 있으면 성우의 얼굴을 볼수 있다는 생각에 밝은 얼굴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무심코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네 좋은 점은 내가 제일 잘 알아. 빨리 네가 쓴 곡을 무대에서 부를 날이 왔으면 좋겠네.”
아아──,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언제나 제멋대로 행동하고 그에게 응석만 부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전부 내 착각이자, 오만이었고, 오히려 아무도 안 봐주고 있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뭐야……, 비참한 건 나였잖아.’
그렇게 내 첫사랑은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나버렸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나 자신이 사실은 텅 빈 인간이었다는 것. 아니, 차라리 완전히 비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비어버린 마음의 곳간에 ‘그녀’를 향한 열등감으로 가득 찬 추악한 인간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니까……….
진정으로 원하는 걸 손에 넣지 못한 자에겐,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은 자가 근처에 있는 거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도망쳤다.
언젠가는 상처에 딱지가 앉기를 바라며…….
하지만……, 한 번 생긴 마음의 공허함은 메워지긴커녕 갈수록 넓어져만 갔다.
나는 그렇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화류계의 문을 두드렸다.
한가지 다짐을 하며…….
이곳에서 이성을 유혹하는 기술을 철저히 갈고닦아서 다음에 내가 원하는 남성을 만나게 되면……, 그때는 어떤 여자가 상대여도 반드시 그녀로부터 그를 빼앗아서 내거로 삼겠노라고.
그러나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그 후로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자신의 맘을 떨리게 만드는 만남을 가지지 못해서 갈고 닦았던 기술들을 썩히고만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자신의 눈앞엔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열등감의 원인이자 줄곧 마음에 품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그야말로 운명.
그동안 연마해온 기교들을 유감없이 발휘해서 과거를 매듭짓고 모든 것을 손에 넣을 기회가 온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그것도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신도 있었다.
아니, 자신감이라면 차고도 넘쳤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의 섹스 판타지를 적절하게 자극하며 그들을 자신에게 푹 빠져들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포로로 만든 남자들에게는 희망과 절망을 적절하게 번갈아 가며 맛보게 만들어 자유자재로 농락했다.
그들은 그럴수록 내 환심을 사기 위해 내게 미쳤었다.
하지만……, 그런 내 자신감은 막상 성우를 상대로 행동에 나서려고 하자 오래가지 못했다.
‘어째서지? 도대체 어째서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남자를 유혹하는 화술부터 잠자리 기술까지 그렇게나 수많은 것들을 이 몸 안에 가득 채워 넣었건만……,
정작 가장 그것들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정말로 좋아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서는 막상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자신은 그때부터 한 걸음도 발전하지 않은 게 아닐까? 여전히 혼자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울고만 있던 어린애 그대로인 걸까?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자 그런 부정적인 사고가 머리를 가득 채운다.
스스로의 한심함에 당장에라도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한심한 모습을 지금 성우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그건 내 여자로서의 마지막 보루.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
그래서 어떻게든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을 성우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에게서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돌리다가 나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무언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세찬 격류가 등줄기를 타고 내달린다.
반사적으로 퍼뜩 고개를 다시 돌려 성우의 얼굴을 다시금 찬찬히 본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아──, 그래.
‘나는 딱히 그를 유혹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것은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맞아……, 내가 정말로 바라는 건 그의 구원이야.’
짝짓기 후에 수컷을 잡아먹는 암사마귀의 일화는 비단 생태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 사회에서 더욱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리고……저 소녀를 굳이 분류하자면 그중에서도 최상위의 포식자. 아니, 오히려 같은 범주로 묶는 게 뱀의 심장을 가진 여인들에게 실례가 될 정도로 저 소녀는 근본적으로 불길함의 격이 달랐다.
저 두 사람에게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배드 엔딩의 끝에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파멸로 몰아넣을 저 소녀를 떼어놓아야만 한다.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가능하다면 성우가 ‘그녀’에게 받았던 상처를 내가 치유해주고 싶어.
그를 포근하게 안아주며 위로하고 싶어.
그러니……, 처음부터 유혹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잡다한 기교 따위 저 멀리 갖다버리고 내 진솔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부딪치면 되는 거였다.
…
‘아아──, 그때도 도망칠 게 아니라 이랬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언제나 정말로 중요한 걸 깨닫는 게 늦는다니까.’
‘뭐, 지금에라도 깨달았으니까 나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
그렇게 여유를 되찾은 은숙은 테이블 위에 한쪽 팔꿈치를 괴고 성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지금까지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요염하고 고혹적인 미소와는 궤를 달리했다.
그것은 무언가를 떨쳐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탐애(??)의 집착에서 벗어난 고승의 모습을 본 따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불상의 미소와 닮아있었다.
그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에 자신도 모르게 성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은숙이 성우 쪽으로 몸을 숙이자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테이블에 짓눌리면서 묘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후후……, 드디어 단둘이 되었네.”
그렇게 말하면서 공손하게 두 손으로 성우의 잔을 채우는 그녀.
“변했군.”
“그야……, 뭐, 줄곧 이런 곳에서 일했으니까……혹시, 실망했어?”
“아니……, 전보다 생기가 넘친다고 생각했다.”
“후후……, 새삼 반했어?”
“……그럴지도.”
“후후후……,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지만──, 빈말이라도 고마워. 여전히 무뚝뚝하면서도 상냥한 점은 변하지 않았네. 그런 배려심 많은 점이 좋아.”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성우가 다소 진중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 녀석을 너무 앝 잡아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알아. 그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가 이 마을까지 데리고 온 소녀인걸.”
“하지만……, 지금은 저런 어린애는 놔두고 나만을 바라봐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기회라는 듯이 성우의 어깨에 몸을 살포시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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