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제74 화 은(?)의 눈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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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린 나비가 나풀나풀 나는 것처럼 사장에게서 떨어져 하늘거리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은숙은 자신의 잔을 채우는 걸 마지막으로 다소곳하니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조금……, 의외라면 의외였다.
줄곧 공세를 취하며 나에 대한 견제와 사장을 향한 어프로치를 잠시도 멈추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사장 바로 곁에 착 달라붙게 앉아서 그에게 교태를 부리며 틈만 나면 끈덕지게 스킨십을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았다.
포기한 걸까?
그럴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이 완급조절도 무언가의 포석이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타당했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엔 또 너무 모호한 거리이기도 했다.
사장의 잔이 어느 정도 비게 됐을 때 그녀가 그의 잔을 채워줄 정도는 되지만 사장에게 수작을 부리기엔 먼 거리.
그리고……나와 그녀는 서로 사전에 합의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장이 먼저 잔을 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표면상일 뿐. 머릿속에서는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그다지 내게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후우…….
나는 속으로 숨을 한번 크게 들이셨다가 내쉬며 사고를 단순하게 전환하기로 했다.
그녀의 의도를 지금 전부 파악하기엔 주어진 정보가 적었다. 불확실한 거에 매달려 심력을 낭비하느니 확실한 것들을 토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지금 현재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의도야 어떻든 간에 그녀가 사장과 신체적 접촉을 하기엔 사실상 힘들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최우선 순위는 그녀가 아니다.
이렇게 내 사고가 흘러가도록 그녀가 유도한 거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인 선택지가 이거뿐인 이상 그녀의 의도에 어느 정도 넘어가는 것도 감수하기로 했다.
그렇더라도 그녀를 향한 주의를 게을리해서도 안 되겠지.
그녀를 향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 않고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동시에 혹시 어딘가 내가 놓친 수상쩍은 부분이 없나 하고 내 앞에 놓여있는 잔을 노려본다.
하지만──, 내용물은 더 없이 흠잡을 게 없었고, 글라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티끌만큼의 얼룩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위생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저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게 몹시 신경 쓰였다.
‘대체 뭘 노리는 거지?’
내가 그녀가 독을 탄 우물을 찾기 위해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였다. 은숙이 자신의 잔을 채우고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는지 사장이 그녀에게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너는 마셔도 괜찮은가? 조금 뒤에 일이 있는 게 아닌지.”
사장의 질문에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허를 찔렸다는 것처럼 잠시 눈을 휘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시원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후후, 괜찮아 그야 나는 마시는 게 일이니까.”
“그런가……, 멋없는 질문을 했군.”
“아냐 걱정해줘서 고마운걸.”
“응응, 그러니까 두 사람은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껏 마셔. 나도 그러는 게 기쁘니까.”
그녀의 말을 끝으로 사장이 천천히 잔을 들어 향을 맡은 다음 살짝 한 모금 마셨다.
“좋은 술이군.”
짧지만 듣는 그녀에겐 더 없이 기분 좋은 감상을 말한 뒤였다. 사장은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병에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숫자에 시선을 주었다.
“이건……설마…….”
그리고──, 은숙 또한 사장의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알아챘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사장의 이런 반응을 의도하고 이 와인을 가져왔는지 어쨌든 그녀는 곧바로 얼굴에 화색을 띠며 사장에게 화답했다.
“역시……바로 알아봐 주는구나. 알아봐 줘서 기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슬프다고 해야 할까. 솔직히 조금은 복잡한 심정이네.”
“…….”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사장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고수했다. 사장이 대개 이러는 경우는 보통 ‘그녀’가 엮였을 때다.
아마 저 숫자는 사장과 은숙 그리고 ‘그녀’까지 셋이 얽혀있지만, 사장이 곧바로 저 숫자를 떠올린 건 은숙 때문이 아니라 ‘그녀’ 때문이었단 거겠지.
사장과 은숙 두 사람의 반응으로부터 곧바로 상황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걸 읽은 이상 아니 억지로 읽히게 된 이상 나는 섣부르게 두 사람의 대화에 참견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순간 나는 완벽하리만치 제3 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녀가 의기양양한 미소로 내 쪽을 살짝 흘겨본 뒤에 사장에게 말을 이었다. 나를 흘겨볼 때와는 다르게 촉촉하게 젖은 남자라면 누구나가 빠져들 만한 마성이 담긴 눈이었다.
“성우, 네 생각이 맞아. 내가 너희들에게 모습을 감췄던 해이자, 너와 '그녀'가 본격적으로 둘이서 활동을 시작한 해이기도 해.”
“그때의 나는 너무 추하고 한심해서……, 두 사람을 솔직하게 축하할 수 없었어…….”
“그때 너희들과 계속 함께 있으면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두 사람을 분명 싫어하게 될까 봐……, 그것만큼은 견딜 수가 없어서 너희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언젠가…언젠가는……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 그때 웃는 얼굴로 선물해주려고……준비해놨던 거였어.”
“사실 금방 쓰게 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쓸 일이 없게 돼버린 건 정말 예상 밖이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숙연해지고 무거워졌는지 조금 밝게 하려고 그녀가 마지막에 억지로 웃으면서 그렇게 덧붙였다.
그녀가 한 말이 전부 진실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마 사장도 마찬가지…….
“귀한 술을 대접받았군.”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사장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후후, 너무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 전부 내가 제멋대로 한 일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병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사장에게 말했다.
“이 애도 분명 기쁠 거야.”
“그런가…….”
“응.”
“그렇다면 다행이군……….”
혹시 내가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던 걸까? 의외로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녀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때였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후후……, 자……, 들었지? 뭐 그런 거니까, 네가 의심하는 것 같은 수상쩍은 짓 따위 하지 않았으니까 안심하고 입에 들렴.”
그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도발하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덧붙였다.
“아니면……, 이 맛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가……?”
아마……정말로 내게 하고 싶은 건 저 말이겠지.
아아……, 조금 전에 그녀가 의외로 선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한 말은 취소다.
“흥…….”
내가 그녀의 도발에 코웃음을 치며 잔에 손을 가져간 다음 천천히 입에 대려고 할 때였다.
!!!
나보다 먼저 한 모금 더 들이킨 사장이 그제야 무언가를 눈치챈 듯 재빨리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나를 제지했다.
“잠깐.”
사장의 말에 나는 입 앞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런 나를 보고 사장은 살짝 안도하다가도 어떻게 내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는 곧바로 말을 하지 않고, 신중히 단어를 고른 다음에 간신히 쥐어 짜내어 내게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확실히……, 조금 이르다.”
그리고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은숙에게 혹시 다른 거 가져다줄 수 없겠냐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정말이지 뭐야……, 저 여자면 몰라도 사장까지 날 어린애 취급하고.’
“괜찮아요.”
아니, 나는 사장이 날 어린애 취급한 것보다도 그가 그녀의 의견에 동조했다는 거에 더 큰 짜증을 느꼈다.
그래서──, 속에서 오기 같은 게 생겨 사장에게 그렇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한 다음에 보란 듯이 잔을 입가로 가져가 잔을 비웠다.
그렇게……
성우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아뿔싸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지으며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고, 동시에 나은이 깨끗하게 비운 잔을 기세 좋게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내려놓는 모습을 보며──,
은숙은 속으로 미소지었다.
더없이 기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나 일이 예상했던 대로 잘 풀릴 줄이야.
특히 도중에 성우가 생각보다 와인에 어느정도 해박한 모습을 보여줬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었다.
왜냐하면……, 이 계획은 저 소녀보다도 성우의 눈을 피하는 게 열쇠였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성우가 와인을 크게 즐기진 않으면서도 필요에 의해 어중간하게 조예가 있었던 게 더욱 좋게 작용했다.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보다 늦게나마 알아차렸기에 더 좋은 결과를 끌어냈다.
후후………!
여기까지 왔다면……
이 뒤는……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꼬마야, 아무래도 내가 이긴 거 같구나.’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나은을 배제했다고 확신하고서는 축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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