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럽혀진 아이돌-74화 (74/136)

〈 74화 〉 제73 화 은(?)의 눈물 (4)

* * *

화려한 장식이 수 놓인 은쟁반 위에 와인과 유리잔을 들고 돌아온 은숙은 한층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이 순간을 승부의 분수령이라고 여기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우리 앞에 유리잔을 사장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놓았다.

그런 뒤에 능숙한 손길로 와인을 감싸고 있는 포일을 벗겨낸 뒤 오프너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코르크 마개를 쏙 빼냈다.

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코르크 마개가 빠지는 동시에 은은하면서도 감미로운 향기가 한순간 퍼졌다가 깊은 여운을 남기며 서서히 사라졌다.

‘과연……숫자가 붙어있는 와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걸까…….’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생산 연도가 표시된 와인은 빈티지라고 해서 최상품으로 분류된다고 전에 도우미로 잠깐 출연했던 예능프로그램에서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빈티 나는 이름인데 제일 귀하다고요?’

…라고 누가 나름 농담이랍시고 아무 생각 없이 일단 툭 던지고 봤나 본데, 다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서로 눈치만 보다 보니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게 됐었다.

걔 중 제일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그 자리의 분위기를 수습하는 역할을 억지로 떠맡게 되어버려서 텐션을 끌어올리느라 진땀을 흘렸었다.

그다지 좋은 추억은 아니었는데, 그런 것도 나름 도움이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살짝 든다.

그건 그렇고……, 은숙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리만치 주의 깊게 본다.

왜냐하면──, 가장 장난치기 쉬운 것이 음식이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음료에 무언가를 타는 것만큼 손쉽고 효과적인 게 없었다.

때문에……, 그녀가 무언가 수작을 부린다면 이 기회를 최대한 살려서 행동할 거라 예상했는데……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한 걸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경계할 걸 그녀가 읽은 걸까. 그래서 먹을 것에 무언가를 섞어서 장난치는 건 헛된 짓이란 걸 파악하고 처음부터 단념하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걸까…….

음식을 안에서 만들어온 것도 아니고 와인도 철저하리만치 밀봉되어있던 걸 뜯는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미리 나와 사장이 이전에 약속을 잡고 왔다면 모를까 우리가 지금 그녀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건 명백하게 우연한 만남 때문이었다.

그렇다면……역시 가능성이 높은 건 후자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 나로서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

짐작 가는 게 지금 시점에선 전혀 없으므로.

어쨌든 방심은 금물이다.

여기는 적의 홈그라운드였다. 신혜민과 비교하면 송사리 수준이지만, 신혜민과 비교하면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위협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뭐, 질 거 같진 않다만…….

여하튼 주도권이 당연히 그녀에게 있는 이상 언제 어떤 식으로 치고 들어 와도 이상하지 않다.

방심하게 만들어 승리를 취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그러함에도 현대까지 가장 확실하게 잘 통하는 방법이니까.

내가 그렇게 그녀를 향한 경계심을 한층 강화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갑자기 내 예상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길래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나이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내 윗사람인 사장에게 잔을 따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내 오른쪽으로 와서 내 잔에 와인을 따르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내 윗사람인 사장을 제쳐두고 그의 내연녀에 불과한 내 잔에 와인을 먼저 따르는 게 딱히 내가 예의를 어긴 것도 아니건만 괜히 사장에게 송구스러워졌다.

조심조심 사장의 눈치를 살펴보니 사장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뭐지? 내 상식이 혹시 잘못되었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동요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고 교육받아 왔으니까.

그때 그녀가 내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살짝 미소지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후후……, 능구렁이 같은 애늙은이여도 역시 애는 애네. 나이 이상의 경험은 아직 없나 보구나. 와인을 따를 땐 언제나 레이디가 우선이란다. 그러니 그렇게 긴장하지 마렴.”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것만 같은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의도가 다분하다 보니 빈정거림도 그런 빈정거림이 없었다.

‘칫…….’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무척 사소한 대화였지만, 당사들만이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오고 간 대화였다. 그러한 와중에 내가 잽을 한 대 맞았다고 해야 하나. 그다지 타격은 없지만, 수치를 당하고 이 자리에서 기선을 제압당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 한수로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발원권을 어느정도 제한당하고 말았다.

와인 예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되어버렸으니까.

여자와 여자의 기 싸움에선 이런 얼핏 사소한 대화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법이다.

역시 적의 무대 위에서 싸우는 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다시금 실감한다.

기선을 제압당한 나는 잠시 시선을 내 앞에 놓인 잔으로 돌렸다.

루비를 떠올리게 만드는 맑은 피처럼 타는듯한 붉은 색의 와인이었다. 계속 보고 있노라니 어딘가 불길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울림이 있었다.

마개를 땄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향기가 잔에 따르는 순간 퍼져나가며 실내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겠지.

그건 어딘가──, 이 바의 주인인 은숙 그녀를 떠올리게 만드는 고혹적이고 관능적인 인상을 내게 주었다.

그렇다면……, 와인에도 딱히 수작을 부리지 않은 건가. 와인이란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문외한인 나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살아있는 음료다.

아주 작은 진동에조차 효모들이 자극받아 맛이 확확 변해버릴 정도로 예민하다.

밀봉 상태에서 손을 썼다면 그 뒤에 이렇게나 감미로운 향기가 실내에 가득 퍼지는 것 따위 기대할 수 없었겠지.

사장이 잔을 들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내가 나름대로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눈과 코를 사용해서 테이스팅 엇비슷한 걸 흉내 내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이번에는 사장의 오른쪽으로 가서 사장의 잔에 와인을 공손하게 따르고 있었는데, 나는 순간 사장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고 말았다.

사장은 무척이나 정갈하게 의자에 앉아서 그녀가 와인을 따르는 동안 그저 단순하게 한쪽 손을 유리잔 받침대 위에 얹어두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 자체로 그림이 됐다.

굉장히 정갈한 자세에서부터 하나하나가 일정한 규칙 안에 잘 정돈되어 있는 균형잡힌 아름다움이 넘쳐흐른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이런 게…… 몸에 자연스럽게 익은 매너라는 거겠지.

그리고──, 그건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나보다.

은숙 역시 절반 조금 안되게 사장의 잔을 채운 다음 마지막으로 와인 방울이 튀거나 잔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도록 살짝 병을 비틀면서 뗀 다음에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누구랑 다르게 기품이 넘치네. 평소에도 자주 와인을 즐겨?”

은숙 그녀의 직설적인 칭찬에 사장이 조금 낯간지러워하며 답한다.

“딱히 즐긴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다만. 가끔 이런 자리를 가질 때가 있으니 필요에 따라 조금 익혀둔 것뿐이다.”

“아……그러고 보니 사장님이었지. 응응, 뭐랄까 주로 접대받는 쪽이라 이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이런 부분에서도 빈틈없는 것도 여전한 것 같아서 기분 좋네.”

또다시 자연스레 두 사람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네네. 미만하게 됐네요. 아무것도 몰라서.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은 것을……뭐 그리 격식을 따지며 겉멋을 부리는 건지.’

그렇게 속으로 투정을 부리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다른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었다.

‘확실히…… 조금 전 사장의 모습 멋있었지.’

‘무심코 내가 그에게 시선을 뺏겨 한순간 넋을 잃고 빤히 볼 정도로.’

애초에 사장이 밑바탕이 좋은 것뿐 아니라 자기관리까지 철저하다 보니, 대체로 그림이 될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상황은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장 본인만의 매력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

그의 곁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아주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잔에 와인을 따르던 그녀 역시 무척이나 멋있었다.

조금 전의 광경은 그런 두 사람의 정갈함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매너의 본질일지도.

보는 이에게 최대한 멋지게 연출하는 것.

조금 전의 두근거림을 떠올린다.

‘이건……나중에 서준을 상대로도 써먹을 만하겠어.’

유흥과는 거리가 먼 서준이었다.

면역이 없는 만큼 그에게는 낯선 장소에서 언제까지나 그에게 여동생 비슷한 취급을 당한 내가 그에게 조금 전 사장처럼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조금은 나를 여자로 새삼 바라봐주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행동하기에 따라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건……, 뜻밖의 수확이네.’

나는 그녀와 사장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좀 더 유심히 살펴보기로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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