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제72 화 은(?)의 눈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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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은이 은숙에게 끼어들어 훼방 놓았을 때, 성우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은숙은 살짝 자신의 성급한 행동을 후회했다.
자신 정도나 되는 여자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나답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머리 한구석으로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를 앞에 두고 평정을 유지한다는 게 당찮은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신중했어야 했다.
분명 속도를 올려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속도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천천히 돌아가야 할 때는 신중하게 눈앞에 있는 방해물을 하나하나 치우며 한 걸음씩 나아가야만 한다.
지금은 속도보다는 그러한 신중함이 요구되는 때였다.
주도권을 넘기지 않기 위해서 표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가능한 한 여유 있는 척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사고를 가속한다.
이 세상에는──,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남자에게 속는 여자는 꽤 있지만 같은 여자의 본질을 잘못 보는 여자는 그다지 없다.
남녀 사이에 우정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가 어느 한쪽의 짝사랑이기 때문이라면 여자와 여자 사이의 우정이 덧없는 이유는 여자의 적이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를 향한 사랑이 여자의 눈을 흐리게 하지만, 같은 여자에게 그런 게 적용될 리가 없지 않은가.
아주 특수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다행히 자신은 그 몇 안 되는 특수한 경우에 속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러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와는 다른 여자와 여자의 본질적인 적대관계를 뿌리부터 잘 이해하고 있는 은숙은 나은과 성우를 뒤로하고 주방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조금 전 자신이 파악한 나은에 대해 차분히 곱씹어봤다.
성우는 그녀를 자신 소속사의 귀여운 아이 정도로 소개했지만, 그 말을 곧이 고대로 믿을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7살짜리 여아조차 그 말을 들으면 고개를 귀엽게 갸우뚱거리겠지.
그녀는 아마도 그의 내연녀. 딱히 그녀 본인에게서도 숨기려는 기색이 없으니 아마 이 부분은 확실할 것이다.
다만……일반적이진 않고 조금 특수한 관계로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에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는 유대감을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남녀의 경우는 그보다 더 손쉽게 긴밀한 관계가 되는 게 있다.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거였다.
그녀가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그에게 접근했는지, 아니면 서로 몸을 섞는 과정에서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자연스레 지금의 관계가 된 건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상을 크게 벗어나진 않았겠지.
여기까진 그다지 문제 될 게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남자 경험이 적다는 거였다.
아니, 물론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고 안긴 경험이야 많을 것이다. 그녀는 요녀라고 불러도 좋았다. 그녀 자신이 알고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봤을 때 그녀가 두르고 있는 요염함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 나이대 여자에게선 결코 나올 수 없는 색기였다.
그렇기에 여기서 남자 경험이 적다는 건 남자의 수를 의미한다.
그녀는……그래, 여러 남자를 거치면서 어설프게 안긴 게 아니라 한 남자에게 몇십 번 몇백 번을 안긴 여자다.
여자에게 있어 정말로 성가시고 방해가 되는 무서운 건 그런 여자다.
‘후……정말이지 어디서 또 까다로운 여자아이를 주워서는…….’
한번은 포기했던 마음이다.
잊으려고 했던 마음이다.
자신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어 그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던 '그녀'가 성우를 떠나 다른 남자와 이어졌다는 소식은 예전에 들었었다.
그가 상처받아 망가졌으리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찾아가서 그를 위로해주고 갈 곳을 잃은 그의 마음을 자신 쪽으로 돌리고 싶다는 계산적인 마음도 순간 들었지만……결국 그러지 못했다.
이미 한번 자포자기해서 화류계에 들어온 더럽혀진 자신이 이제 와서 그를 만날 자격 따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라면……분명 자신보다 그를 행복하게 해줄 여자가 머지않아 생길 거라 확신했었다.
‘왜냐면……내가 이렇게나 반했던 남자인걸. 다른 여자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중에 한 명 정도는……그의 결에서 그의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진심으로 보듬어줄 여자가 있으리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런 내 기대는 철저할 정도로 배신당했다.
멋대로 혼자 기대한 주제에 막상 자신의 이상에 어긋났다고 실망하다니……, 스스로가 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인정할 수 없었다.
‘저것’만큼은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저런 거라니.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처음 길에서 성우와 마주쳤을 때 느꼈던 놀람과 기쁨은 그의 곁에 있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소녀를 보자마자 싹 달아나 버렸다.
왜냐하면──,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니까.
그래,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공포.
너무나도 꺼림칙한 것을 본 데에서 오는 두려움.
내가 들고 있던 짐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 걸 그나 그녀는 오랜만의 재회에 내가 놀라서 그런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나는 눈앞에 있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악녀에게 그 한순간에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압도당해서 몸에서 힘이 빠져 버렸던 것이다.
그건───, 꽃이었다.
오물을 먹고 피어난 독초였다.
존재 자체가 주변을 갉아먹는 지극히 위험한 무언가였다.
저 소녀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병.
인간의 몸으로 역신(??)의 위계에 오른 근본부터 일그러진 악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녀와 관련된 모두를 철저하게 파멸로 이끌겠지.
그런 게 그의 곁에 있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느 누가 그의 곁에 있어도 상관없었지만……저것만큼은 안됐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꽤나 까다로운 상대.
자신이 그녀를 엿보았을 때, 그녀 또한 내 탐색을 끝냈을 게다.
철저하리만치 경계하고 있을 게 뻔했다. 어쩌면 자신이 내가는 음식에는 손도 안 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약을 타면 쉽겠지만……
일이 그렇게 쉽고 단순하게 풀릴 리가 없었다.
저 정도로 경계하고 있으면 아마 내가 그녀의 시야 밖에서 잔을 채워가면 그 자리서 바닥에 잔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부어버리겠지.
흐음……
시간만, 시간만 충분히 주어졌었다면 다양한 장치를 준비해 유리잔이라든가 개봉하지 않은 와인 자체에 이것저것 수를 써봤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조잡하지만 임기응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거겠지.
뭔가……,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저 소녀의 경계심 밖에서 의식의 사각지대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만으로는 한걸음 부족했다. 소녀만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성우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도,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흐리게 만들어야 한다.
뭐, 이래저래 생각이 길었지만……
와인 셀러를 둘러보는 순간 내 그러한 걱정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어쨌든 이곳은 자신의 영역인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연예계라는 복마전에 몸담은 소녀라지만, 화류계 또한 그에 못지않은 지옥이었다.
크고 작음을 떠나 어디에 몸을 담고 있든지 수라장이란 건 마찬가지.
그렇다면……, 분명 승산은 있었다.
저장고 가장 안쪽의 깊숙한 곳에서 조심조심 병 하나를 꺼낸다. 네 개의 숫자가 적혀있는 오래된 병이었다.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무척이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 추억 속의 숫자였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표면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진다.
처음 의도와는 다르다만……분명 이걸 사용할 때는 지금이겠지.
아마 이거라면……
어쩌면……….
나약해서 울고만 있던 과거의 자신이 지금의 내 등을 떠밀어주는 것만 같았다.
‘끈질긴 여자는 인기 없다고 하던데, 나도 참 큰일이네……. 사랑받진 못하겠어.’
하나는 해결된 거 같고.
그럼, 이제 안주는 뭐가 좋으려나…….
평범하게 생각하면 과일이나 치즈같은 게 무난하겠지만…….
아니, 지금은 없는 편이 나한테 유리하려나.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준비는 대충 끝난 것 같다.
남은 건 이제 직접 부딪치는 일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저 소녀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나를 완전히 아래로 여기고 있었다. 경계는 충분히 하되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녀 자신이 패배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엔 반드시 그녀가 이길 거라 확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후후,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쪽만이 아니란다.’
이쪽도 마찬가지.
‘아니, 여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후후, 그러니까……훼방꾼은 얼른 퇴장해줘야겠어.’
‘어린애는 아직 겪어보지 못한 화류계 여자의 싸움법을 알려줄게.’
‘고마워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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