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제60 화 막간(??) 2 가장 고매한 위선자 (4)
* * *
이 세상에 우연한 만남이란 없다.
모든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
만나야 했기에 만날 수밖에 없었거나──,
그게 아니면 누군가 반드시 만나도록 뒤에서 알게 모르게 손을 쓴 것이다.
검은 하늘 뒤에 숨어 있는 칠흑의 손이 자아내는 그물은 얼핏 보면 상당히 우연에 의지한 것만 같다.
무척 헐렁해 보여서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진정으로 무서운 덫이란 그렇게 허술해 보이는 덫이다.
허술한 덫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 산을 이루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게 너무 늦었었다.
그러나──, 분명 미리 알아차렸더라도 변하는 건 없었겠지.
그러니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내 안에 주입되어있는 모든 도덕을 벗어던지고 짐승이 될 기회를 준 검은 하늘의 악녀에게 감사한다.
…
다솜은 조바심내지 않기로 했다. 거북이걸음이긴 하지만 느릿느릿하면서도 착실하게 현민과의 거리를 좁혀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저…그렇게 마음먹은 것만으로도 어쩐지 자신과 현민의 관계가 둘이서 전철을 타고 오기 전보다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건 분명 기분 탓만은 아니리라.
아니나 다를까.
개찰구를 나와서 조금 걷다가 현민이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오랫동안 둘이서 있긴 처음이네.”
───!!!
그가 별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건넨 말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악! 하고 붉어졌다.
“대, 대대 대체 뭐, 뭐야? 평생 신혜민만 바라볼 것처럼 행동하더니 호 혹시 동아리 후배에게 흑심을 품게 된 거야? 부…불결해, 기분 나빠.”
그가 자신을 의식하는 발언을 한 바람에 깜짝 놀라서 혀가 꼬이고 말았다. 똑바로 말조차 못하고 더듬을 정도로 부끄러운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그를 부끄럽게 만든다는 공세를 취했다.
“아…아니, 그런 건 아니고.”
“뭐야? 내가 매력이 없다는 거야?”
“어……음………,”
내가 순간 쌍심지를 켜고 그를 노려보자 그가 할 말을 잃었는지 난감한 표정을 했다. 좋아하는 남자를 곤란하게 만들고 말았단 거에 나까지 기세가 한풀 꺾인다.
‘뭐야…아닌 건가…….’
속으로 살짝 우울해하며 그의 대답에 풀이 죽으려던 찰나였다. 나는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기습공격을 무방비 상태로 맞고 말았다.
“뭐랄까…왠지 예전에도 너와 이랬던 적이 있던 거 같은 그리운 느낌이 들어서…….”
“하…하하, 내가 뭐라는 건지. 방금 한 말은 잊어줘.”
‘에…에엣?!’
그녀는 현민의 말에 평정을 잃고 말았다.
어쩌면 지금이 단번에 거리를 좁힐 기회가 아닐까. 줄곧 간직해왔던 마음. 자신은 언제나 혼자다. 그럴 때 현민이 건네준 작은 친절에 구원받아서 변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그에게 전하여 첫 단추가 어긋난 재회를 원래의 바람직한 형태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가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드센 모습이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그녀는 무척이나 조신한 얼굴이 되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현민을 불러본다.
“서…선……”
하지만 그녀의 말은 불운하게도 현민의 갑작스러운 말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아! 그러고 보니 녀석들에게 줄 마실 것을 사러 편의점에 잠깐 들리기로 했었지. 깜빡하고 있었네.”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려 버릴 정도로 달짝지근했던 분위가 한순간에 와장창 깨져버리고 말았다.
“우…우읏……!!!”
“어…어라?”
늦지 않게 이런저런 일로 깜빡 잊고 있던 걸 떠올리곤 좋아하던 그는 옆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한기를 느꼈다. 불길함을 지우지 못하고 조심조심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째서인지 울 것만 같은 원망이 가득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
그는 당황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자신이 뭔가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로서는 도통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저러는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사과부터 하며 그녀를 진정시켜보려던 그에게 그녀는──!!!
“바……바보!”
그렇게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고는 그가 그녀에게 뭐라 말을 붙일 틈도 없이 성큼성큼 저 앞으로 걸어갔다.
눈가에 핑하고 고인 눈물을 손으로 훔친다.
‘정말이지 뭐냐고……모처럼 좋은 분위기였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 동안을 터벅터벅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가 어느 순간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돌아봤다.
만약 선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처럼 허겁지겁 필사적으로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면 못 이기는 척 용서해줄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선배의 모습은 인파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정말이지……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자기 혼자 멋대로 설레놓고서는 멋대로 실망한 다음 일방적으로 화내고.
선배 덕에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본질적인 변변치 못한 부분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나도……될 수만 있다면, 신혜민 그 여자처럼 되고 싶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 선배 따위 포로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녀처럼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여유 있는 표정을 도저히 지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선배 앞에만 서면 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온몸의 체온이 상승하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니까. 그저 같이 있기만 해도 괜히 부끄러워져서 도저히 솔직해질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다.
그러다 보니 자꾸 마음에도 없는 말만 내뱉게 되었다.
이래서야──, 선배도 자신 같은 여자에게 질려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역시 미움받고 싶지 않아.
선배에게 미움받으면 살아갈 자신이 없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비를 쫄딱 맞은 버려진 강아지처럼 한참 동안 터벅터벅 걷고 있을 때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잠시만 지나갈게요.”
“허억……!”
“허억……!”
귀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가쁜 숨을 내쉬며 허겁지겁 인파를 헤치면서 그녀를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얼마나 서둘러 여기까지 왔는지 서늘한 날씨인데도 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것만으로 그녀의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서…선배…….”
그녀가 뒤돌아보며 현민을 부르자 때마침 그녀 바로 뒤까지 온 그가 걸음을 늦추며 그녀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숨을 고르더니 다정한 목소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 있었구나. 겨…겨우 따라잡았네.”
“뭐…뭐야.”
“미안. 바로 오고 싶었는데, 이 근처에 편의점이 거기뿐이라서.”
그렇게 말하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손을 슬쩍 들어 보인다.
거기에는──, 음료수로 가득 차 있는 편의점 봉투가 들려있었다.
‘혹시 나는 음료수보다도 우선순위가 낮은 건가.’
물론 선배에게 그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우리 대신 먼저 도착해서 줄을 서주고 있는 두 사람을 위한 것이리란 것 정도는──.
그렇지만 한참 비관적인 상태에 빠진 터라 무슨 생각을 하든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자신의 오래된 나쁜 습관이 이런 식으로 또다시 튀어나오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속으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남의 속도 모르고 선배가 옆에서 천진한 표정으로 봉투의 내용물을 하나 꺼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거 봐봐, 아무래도 이번에 우리 여신님이 새로운 CF 찍은 상품인가 봐. TV나 인터넷에서 아직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벌써 들어와 있다니.”
“아무래도 오늘 이곳에서 공연이 있다 보니 본사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은 걸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홀린 듯이 캔에 붙어있는 신혜민의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뭐, 선배가 그러는 것도 이해는 한다.’
신혜민이라는 여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한 모습을 아마추어도 아니고 일반인이 대충 찍어도 기적과도 같은 한 장이 나오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를 광고에 쓰기 위해 전문가가 최선을 다해 찍은 사진이다.
평범한 남성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말라고 요구하는 쪽이 가혹하다.
알고 있지만…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 바로 눈앞에서 선배가 신혜민만을 바라보는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울컥해서 현민에게 또다시 폭언을 내뱉으려고 할 때였다.
그가 봉투에 손을 넣고 아래쪽을 주섬주섬 뒤지다가 그녀에게 음료수 하나를 건넸다.
그녀가 뭔가 하면서 자신의 손에 쥐어진 음료를 보자 그녀는 살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자신이 받은 음료에는 신혜민의 모습이 찍혀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신혜민 위주로 돌아가는 그가 그녀가 광고한 상품을 놔두고 다른 제품을 산다는 건 상상도 무척이나 드문 일이었다.
그가 다시금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자, 이거. 제일 좋아하는 거지?”
읏……!
“어…어떻게 안 거야?”
“예전에 부실에서 딱 한 번 굉장히 맛있게 마시고 있던 모습이 떠올라서…….”
그렇게 말하며 조금 낯간지럽다는 듯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웃어 보이는 그.
정말이지 다른 의도가 일절 없는 천연이라 더욱 질이 나쁘다.
다시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거…꽤 비싼 건데…….”
저기 봉투 안에 들어있는 행사제품을 다 합친 것보다도 아마 비싸겠지.
매일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하면서 왜 굳이 자신 따윌 위해서 이런걸…….
“아하하…뭐,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소중한 동아리 후배에게 이 정도 사줄 여유는 있어.”
“…”
그의 말에 그녀의 입가에 무의식중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보고 순간 현민이 넋을 잃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에게 평소와 마찬가지로 기세 좋게 말했다.
“흐…흥! 이…이번만이야. 이번만 특별히 용서해주는 거니까.”
“다음엔 이런 뇌물 따위 절대로 통하지 않으니까…….”
“절대로!!!”
솔직하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역시나 입에서는 본심과는 지구에서 은하계만큼이나 동떨어진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으…응…….”
하지만 선배의 얼굴을 보니 자신이 정말 전하고 싶었던 소중한 마음은 그럭저럭 잘 전달된 거 같았다.
그녀는──,
현민에게 받은 음료수를 정말로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다람쥐처럼 두 손으로 앙증맞게 잡고는 한 모금 한 모금 야금야금 마시며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현민은 속으로 살짝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뭔진 몰라도 신혜민의 공연을 코앞에 두고 기분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 같은 팬으로서 역시 최고로 기분 좋은 마음가짐으로 공연을 만끽하게 해주고 싶었다.’
‘사실 무슨 이유로 그녀가 갑자기 토라졌던 건지 아주 살짝 궁금하긴 하지만──,
이제 와서 물어보긴 좀 그렇겠지.’
아무리 자신이 눈치 없다지만, 그 정도 분위기는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동아리 부원들이 듣는다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니까.’
그렇게 한 가지 고비를 어떻게든 잘 매듭지었다고 판단한 그는 다솜과 마찬가지로 밝은 표정으로 공연장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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