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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혀진 아이돌-60화 (60/136)

〈 60화 〉 제59 화 막간(??) 2 가장 고매한 위선자 (3)

* * *

발 디딜 틈 하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나이부터 시작해서 옷차림까지 무엇하나 통일되어 있지 않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무엇하나 통일되어 있지 않은 각양각색의 그들이었건만──,

그렇더라도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그들이 향하는 곳이 같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

바로 오늘 신혜민의 자선공연이 열리는 공연장에서 한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뇌에 잠겨있었다.

남자는 흔하디흔한 진행요원 중 하나였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하며, 이곳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안내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따라 몹시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얼마 전에 자신의 집 앞 우편함에 놓여있던 발신자 불명의 몹시 수상쩍은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편지에 자신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의미불명의 편지는 엮이지 말고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려버리는 게 상책이란 것을.

그러한 사실을 그동안 살아온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는 있었지만──,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고 곧바로 갖다 버리기에는 마음 한구석을 찝찝하게 만드는 정체 모를 정갈함이 그 편지에는 묻어있었다.

결국 망설이는 것도 잠시…….

‘그럼─, 도대체 어떤 괴상한 뱀이 튀어나오려나?’

이 같은 약간의 기대감마저 가지며 수풀을 건드리는 사냥꾼이 된 심정으로 편지봉투를 뜯는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확인하자 남자는 의문만 더욱 커졌다.

거기에는 B4, 7854라는 영문 모를 글자만이 덩그러니 쓰여있는 작은 메모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쯤 되면 호기심이 동하기 마련이다.

남자는 이 편지에 조금 진지하게 응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뒤에 있는 네 자리 숫자였다. 직관적으로 그 숫자가 무언가의 비밀번호를 암시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B4라는 건 메모에 적혀있는 비밀번호를 필요로 하는 무언가가 있는 장소를 나타내는 좌표 내지는 그 무언가 자체라고 할 수 있겠지.

어쩌면 그 외의 다른 의미가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이 직감이 맞다고 확신했다.

만약 이 종이에 적힌 글자들이 다른 의미로 쓰였다면 그걸 암시하는 무언가가 따로 있어야만 한다는 게 순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는 건 이 편지를 쓴 정체 모를 누군가는 받는 사람인 내가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걸 의식하며 쓴 거겠지.

여기까지 왔다면 남은 건 쉬웠다.

‘B4라……, 흐음.’

이 또한 그렇게 어려운 의미로 적은 게 아닐 거다.

내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

적어도 내 손이 닿는 생활반경 안에 있는 것이겠지.

‘과연…그런 건가…….’

정답을 알아차리자 조금 허무할 정도였다.

B4라는 두 글자만 놓고 보면 아마 보통의 사람들은 A4 같은 용지의 한 종류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인쇄 매체와는 일체의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걸 제외하면 자연스레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자신은 언제나 지하철로 출퇴근을 한다.

그리고 마침 지하철에는 코인락커가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써볼 기회가 딱히 없어서 가물가물했지만, 이런 종류의 보관함들이 으레 그렇듯이 분명 행은 알파벳으로 열은 숫자로 표현했던 거로 기억한다.

아마 이게 맞을 것이다.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곧바로 집 근처에 있는 역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B4라고 뚜렷하게 적힌 보관함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자는 자신의 판단이 역시 옳았음을 확신했다.

입가에는 정체불명의 발신자와의 승부에서 이겼다는 우월감에서 나오는 승리의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기대는 곧바로 배신당했다.

‘이렇게까지 한 거다.’

남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장담컨대 목이 잘린 고양이 시체나 개 시체가 튀어나온 정도는 애교라고까지 여길 정도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리고 야심 차게 비밀번호를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뭐지? 대체?’

숫자를 거꾸로도 입력해본다. 역시나 열리지 않는다.

‘혹시 네 개의 숫자를 조합해야 하는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경우의 수라고 해봤자 끽해야 24개뿐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 정도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오기로라도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24개의 번호를 순서대로 전부 입력해봐도 락커는 조금도 열릴 생각을 안 했다.

‘쳇……, 틀린 건가. 하지만 분명 사고의 흐름 자체는 이게 맞다고 생각되는데…….’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도 이거 이상의 의미는 찾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낸 해답이 틀린 게 아니라면 의심해볼 만한 건……, 단 하나.

문제 그 자체다.

‘역시 그냥 단순한 장난이었나.’

그렇다면 다른 의미로는 대성공이었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휘둘렀으니까.

조금 석연치 않긴 하지만…자신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다 큰 어른이 수상쩍은 편지에 이 정도로 어울려준 것만으로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억지로라도 이 편지에 대해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그는 다른 안내원들과 마찬가지로 원활한 진행을 위에 남들보다 먼저 공연장에 도착하고 나서 깨달은 것이다.

있었던 것이다!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도 분명 보관함이.

왜 진즉에 떠올리지 못한 것인지 스스로의 멍청함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왜 그러나? 무슨 일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네.”

“하하…뭐, 그 맘 이해하네. 그 신혜민의 공연이니까. 우리 같은 고참일수록 오히려 더욱 긴장되는 법이지. 그녀의 공연을 앞두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그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할런지 정말이지 상상도 되지 않는구먼.”

“그……그렇지.”

자신을 걱정하는 동료에게 대충 답했다.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기려고. 지금까지 이 일을 하면서 수많은 스타들을 봐왔네만, 그녀처럼 만인에게 사랑받는 여인은 내 본적이 없어.”

“그 어떤 악인도 그녀를 앞에 두고는 불손한 마음을 품지 못할걸세. 내 그것 하나만은 장담하지. 그러니 자네도 긴장 풀고, 그 딱딱하게 굳은 얼굴 좀 펴게나. 자네가 그래서야 신참들까지 괜히 불안해지겠어.”

“미…미안하네. 자네에게 괜한 신경을 쓰게 했군.”

“하하…뭐,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서로서로 돕고 사는 거지.”

평소였다면 동료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게 너무도 고마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당장이라도 빨리 가서 보관함 속을 확인해보고 싶을 때는 자신을 이렇게 붙잡고 주절주절 길게 얘기를 하는 건 괜한 참견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그런 심정을 표정으로 내색할 만큼 미숙하진 않았다.

그저 빨리 그가 자신을 놓아주길 바라며 그럭저럭 맞장구쳐주고 있을 때였다.

동료가 자신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뭐, 여긴 한동안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자네는 가서 담배라도 하나 태우고 오게나.”

그렇게 말하며 이가 드러날 정도로 시원하게 씨익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마치 우리도 아직 젊다는 것처럼 청춘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자세였다.

……확실히 좋은 사람이란 건 알겠지만, 부담스러우니 제발 남들한테는 참아줬으면 좋겠다.

어쨌든 그의 제안은 자신에게 분명 유리한 것이었다.

특히 다른 사람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 잠시 자리를 뜰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준 건 매우 환영할 일이다.

거기에 편승한다.

“고맙군. 그럼 잠시 갔다 오지.”

“아아, 나한테 맡겨두고 천천히 쉬다 오라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감사를 표한 뒤에 천천히 그 자리를 벗어난다.

조급할 때일수록 더욱 서둘러선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다소 느긋한 태도로 코인락커가 있는 곳을 향한다.

그리고……원하는 장소에 도착한 그는 작게 혀를 찼다.

‘칫……, 역시 일이 그렇게까지 뜻대로 풀리는 건 아닌가.’

사람이 없었으면 좋았으련만 오늘 같은 날 그거까지 바라기엔 욕심이 과하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진즉 알아차렸다면 느긋하게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을.

분명 정체 모를 발신자가 며칠 전에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건 분명 그런 것을 의도한 거겠지.

상대는 이렇게나 자신을 훤히 꿰뚫고 있었는데, 자신이 그자의 기대에 못 미친 게 문제였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선 불친절한 발신자에게도 한두 마디 불평하는 게 또 사람이다. 그래서 속으로 잠시 투덜거린다.

그러면서 최대한 남들 시선을 끌지 않게 평범을 가장하며 봉투에 적혀있던 비밀번호를 간신히 떠올리곤 차분하게 입력했다.

안에 무엇이 있든지 절대 허둥거리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굳게 다짐하며──.

그렇게──, 비밀번호의 입력이 끝나자 찰칵 소리를 내며 너무도 부드럽게 잠금장치가 풀렸다.

조심조심 문을 열고 안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는 바로 직전에 그렇게나 당황하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쾅 소리가 크게 주변으로 퍼질 정도로 당황해선 문을 있는 힘껏 닫아버리고 말았다.

순간 주위의 시선이 자신에게 확 쏠리고 말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향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허둥지둥 급하게 사과했다.

그가 그랬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의 등 뒤로는 지금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그가 평생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어마 무시한 양의 돈뭉치가 들어있었으니까.

‘대체 저게 얼마지?’

너무 놀라서 보자마자 문을 있는 힘껏 닫아 버려서 자세히 확인하진 못했었다.

그러나 얼핏 본 것만으로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연봉은 아찔하게 넘을 것만 같았다.

이쯤 되면 무언가 위험한 일에 엮인 건 아닌가 하는 걱정부터 앞섰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을 향했던 사람들의 관심이 슬금슬금 멀어지기 시작하자 그는 다시금 관물함의 문을 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작은 보관함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현금다발들은 그만큼의 박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발신자 불명의 얇은 흰색봉투가 한 장.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조용히 사물함 문을 닫고 보니 어느새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어디 남들 눈에 안 띄는 곳이 있을까.’

건물 뒤편으로 갈까 했지만, 그것도 왠지 위험하게 느껴졌다.

내키지는 않지만,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서 제일 안쪽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좌변기에 털썩 앉는다.

무의식중으로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켜며 불을 붙였다.

평소였다면 싸구려 니코틴을 빨아들이면 팽팽하게 곤두섰던 신경이 조금은 느슨해지기 마련이건만 오늘따라 더욱 예민해지기만 했다.

“후우…….”

긴장과 흥분으로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가슴을 조금이라도 진정시켜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조금 전에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봉투를 꺼냈다.

이 정도의 현금을 준비한 거다.

자신에게 무언가 거창한 일을 시키리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걸 거부하지 못하리란 것도.

막대한 현금을 눈앞에 두고 고상과 고결함을 앞세워 거절한다?

그런 것들은 주머니에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살 수 없는 것보다는 살 수 있는 게 많았다.

적어도 평생을 돈 때문에 고생하면서 살아온 자신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발신자가 그런 자신의 사정까지 염두에 두고 자신을 골랐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어디 고용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한번 볼까.’

그렇게…그가 편지의 내용물을 확인하자 그는 너무도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신혜민은 존재 자체가 기적인 여자였다.

그건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그녀의 공연이 시작되면 그곳에 있는 모두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그녀의 존재감에는 그 정도의 강제력이 있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의 시선을 강탈한다.

이 말은 바꿔말하면 그만큼 절대적인 사각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사각은 이용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최악의 경우 말도 안 되는 상상이긴 했지만, 무언가 위험한 물건──.

그래, 예를 들자면 총기나 마약류 같은 위법한 물건의 운반책으로 이용되는 것까지 각오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봉투에 있는 내용물은──.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한 남자의 사진과──,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도 하찮은 부탁이 딸랑 하나 적혀있을 뿐이었다.

이따위 걸 들어준 것만으로 그 정도의 돈을 마음대로 써도 된다니───.

거기다가 자신은 우연을 빙자해서 작은 계기만 주면 그뿐, 그 뒤의 성패 여부는 상관치 않는다고 지금까지의 불친절한 태도와는 다르게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너무나도 자신에게 좋은 얘기만이 적혀있었다.

이렇다 보니 뭔가 커다란 함정이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상대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정확히는 자신 따위가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톱니바퀴다.

한번……, 많아봤자 두 번 이상은 쓰이지 않고 버려질 톱니바퀴에 불과했다.

자신이 무엇의 구성품인지 따위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역할만 충실히 하고 그렇게 떨어지는 단물만 빨아먹으면 그만인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그릇 정도는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넘어도 될 선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구분하는 것 정도는 정확히 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선택된 데에는 자신의 이런 성격마저 고려된 것이겠지.

쓸데없이 파고들지 않는…….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모처럼 자신에게 굴러온 큰 행운에 감사했다.

그리고는 속으로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그 자리를 떠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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