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제58 화 막간(??) 2 가장 고매한 위선자 (2)
* * *
덜컹…
덜컹…
지하철이 기분 좋게 흔들린다.
비록 오늘 선배와 단둘이서 공연에 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더라도 무척이나 설레고 기대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밤에도 긴장과 흥분으로 잠을 못 이룰 뻔했지만, 선배에게 퀭한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어서…
조금이라도 선배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억지로라도 푹 잠을 청했었다. 덕분에 굉장히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또렷했었다.
그런데도 전철의 기분 좋은 진동이 몸을 감싸자 안락함과 함께 살짝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 차였다. 푹 쉬고 최선의 상태로 나온 자신도 그럴진 데 밤늦게까지 궂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쪽잠을 자고 온 선배가 쪽잠에 빠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선배가 아이처럼 곤히 잠들어 곁에서 쌔근쌔근 고른 숨을 내쉰다.
다 큰 어른이건만 무심코 꼭 안아주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남들에겐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에겐 귀엽게 보였다.
슬슬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점점 빈자리가 하나씩 하나씩 메워져 간다.
그러면서 조금이지만 여유를 두고 있던 선배와의 거리도 좁아져만 갔다. 1~2분에 한두 번 닿을락 말락 했던 서로의 어깨가 빈 좌석이 없어지자 이제는 딱 맞닿게 되었다.
두근…
두근…
‘따뜻해…’
비록 옷을 사이에 두고 있었음에도 선배의 따스한 체온이 잘 느껴졌다.
‘어떡하지……, 지금도 이렇게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데, 나중에 선배의 맨살을 접하면…….’
꼼지락…꼼지락…
선배의 품에 안겨 그의 따스한 체온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하반신이 근질거려 무심결에 허벅지를 꼼지락 꼼지락거리고 말았다.
분명 선배는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결코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꾸미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멋질 수 있다고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선배가 자신과 사귀게 되면서 이마와 뺨에 키스하면서 나직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상황을 떠올리자 살짝 젖고 말았다.
‘하우으…’
이제 막 성에 눈뜬 남중생도 아니고 대체 어쩌다가 자신이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 한복판에서 야한 상상을 하다가 발정이 나버리게 된 건지.
어떻게 되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자괴감에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매며 속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때였다.
툭…!
“하읏……!”
미처 속으로 삼킬 틈도 없이 순간적으로 느껴진 낯선 감촉에 긴장감으로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두 손으론 하반신을 꾹 누르고 있었다.
혹시 누가 들었을까 봐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타는 듯이 뜨겁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들 이어폰을 끼고 있거나 자기 일에 열중하느라 못 들은 거 같다. 고독사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게 요즘 사회문제로 뜨겁지만, 이때만큼은 도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게 너무도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설마설마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조금 전 자신의 어깨에 느껴졌던 기분 좋은 육중한 무게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아니나 다를까 선배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톡 기대고 편안한 얼굴로 꾸벅꾸벅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정말이지 보통은 반대 아니냐고요, 선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자신이 좋아하는 선배가 이렇게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게 자신을 허물없이 대하는 것처럼 느껴져 흐뭇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그녀였다.
…
톡…!
톡…!
“으음…”
흔들…!
흔들…!
“음냐…음냐…”
“다솜아…!”
“다솜아…!”
“으음…? 에에? 서…선배?”
누군가 자신의 몸을 툭툭 쳐도 무시하고 세상 편하게 자던 그녀는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에?! 에에에에에에?’
‘뭐…뭐가 어떻게 된 거지?’
눈을 뜨자 선배의 얼굴이 너무도 가까이서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어느새 선배의 몸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분명 선배가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졸고 있던 모습을 기분 좋게 지켜보고 있었던 거 같은데……어느새 자신도 잠들었나 보다.
“일어났니? 다음 역이야.”
“으…응! 미…미안. 내가 깨워준다고 했는데……이…일어났으면 미리 깨워주지 그랬어. 여자의 자는 얼굴을 보다니! 최악이야! 변태!”
부끄러워서 선배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곤 곧바로 후회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분명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선배에게 삐져서 그런 거리라.
이렇게 말을 막 한 자신에게도 선배는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사과했다.
“미…미안. 워낙 기분 좋게 자고 있길래. 깨우기가 좀 그랬어.”
그렇게 말하며 선배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내 입가를 쓱쓱 닦아주었다.
‘에…에에? 호…혹시 나 자는 도중에 침 흘린 거야?’
‘시…싫어!!!’
부끄러워 죽고 싶다. 선배에게는 언제나 이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런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다니.
그러는 한편으론 선배가 다정하게 자신을 보살펴 주는 게 기분 좋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수건으로 자신의 입가를 쓱쓱 닦아주는 선배의 얼굴이 오늘따라 눈부시게 보였다.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로.
우…우으…
자신의 마음조차 갈피를 잡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살짝 울먹이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선배를 째려본다.
사실 여자에 면역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는 선배가 이렇게나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챙겨줄 수 있는 건 그의 머릿속에 신혜민 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질이 나빴다. 하지만 정말로 화가 나는 건 그런 부스러기 같은 친절에조차 진심으로 들뜨는 자신이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선배의 그 머릿속에 나 하나만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주겠어.
조용히 속으로 몰래 선배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하지만 선배는 그런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착각을 했는지 난처한 듯 자신의 뒤통수를 긁으며 내게 급하게 사과했다.
“미…미안! 나도 모르게. 내가 주제넘었지?”
“아…아니야!”
‘후우…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으련만. 나에게는 그렇게나 용기를 줬으면서 왜 정작 본인은 저런 건지.’
그렇지만…그렇더라도 역시 정말 중요한 부분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혼자 있던 촌스러운 자신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어주었던 때처럼 선배는 그대로 누구에게나 편견 없이 상냥했다.
“내리자.”
“으…응.”
지하철에서 선배와 함께 내린다.
동시에…
아무래도 현재 국내에서 초월적으로 인기 있는 신혜민의 공연이 있는 만큼 역이 미어터질 정도의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내렸다.
파도와도 같은 폭력적인 인파.
그것을 변명 삼아……
반 발자국 정도 앞서가는 선배의 소매 끝을 살며시 붙잡는다.
선배가 의아한 듯 날 쳐다보자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선배에게 당돌하게 말했다.
“떠…떨어지면 안 되니까!!! 나…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거든!”
“으…응.”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갔다. 다만 나를 배려해서인지 조금은 걸음을 늦춘 것 같았다.
‘후우…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걸까. 여자가 이 정도로 했으면 이럴 때만큼은 “그렇다면 이러는 편이 더 좋겠지.”라고 말하며 선배의 소매 끝을 살며시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이끌어주는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줘도 좋으련만……’
하지만…
이런 선배의 숙맥인 점도 좋아하니까.
애초에 선배가 그 정도로 적극적이었다면 지금쯤 분명 다른 멋진 여자와 사귀고 있었을 것이다.
후우…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도 평소와 같은 점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려나…….
어쨌든…
이러니저러니 해도 선배의 가장 곁에 있는 건 자신이다.
선배의 좋은 점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지금은 비록 이렇게 소매 끝을 붙잡는 정도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선배와 다정하게 손을 붙잡고 나란히 걸어가겠어.
이때의 나는 자신이 선배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다.
이때의 나는 몰랐다.
꿈에서조차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설마…
나보다 훨씬 전부터 선배의 좋은 점을 알아차리고 주시하며 선배의 미래에 덫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자가 있었을 줄은…….
그녀의 이름은───────.
송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올곧게 미친 여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