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제57 화 막간(??) 2 가장 고매한 위선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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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신혜민에게 현민이라고 불렸던 청년이 공연장에 오기 전…….
그는 강의실 제일 뒤쪽 구석에 있는 창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지 않으며,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큽니다.”
교탁 앞에서 교수가 아까부터 뭐라고 열성적으로 떠들고 있었지만, 그의 귀에는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거기에는…
그가 늦은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미 그의 마음이 이곳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훌훌 날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오후에 그가 무척이나 경애해 마지않는 신혜민의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공연장에서 조금 있다가 여신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에는 워낙에 설렁설렁 강의를 해서 월급 도둑이란 소리까지 들으며 주어진 시간보다 일찍 끝내주는 교수가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열정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그러면 칭찬을 해도 모자란 판이지만 오히려 그는 이런 중요한 날에 빨리 끝내지 않고 시간을 꽉꽉 채우는 교수가 야속하게까지 느껴졌다.
살짝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강의가 끝날 시간은 진즉에 지나있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동아리방에 동료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함께 사이좋게 공연장으로 떠났을 터였다.
하지만 쉬는 시간 종이 울린 지 한참 지났건만, 교수는 수업을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으면 자체 휴강할 걸 그랬나 라는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그 선택지는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신혜민 그녀가 자신의 팬이 일상을 제쳐놓으면서까지 그녀를 위해 희생하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들에겐 부끄러워서 절대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속으로 은밀하게 자신을 신혜민의 사도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바칠 수 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녀에게 그만큼 큰 은혜를 입었다.
뭐…자신의 하찮디 하찮은 목숨 따위 그녀가 바라지 않겠지만.
그녀를 위해서 누군가 희생한다니…
그녀가 그런 걸 바랄 리 없었다.
그녀는 굳이 말하면 자신이 남을 위해 희생하는 부류였다.
그녀 정도라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도 그녀는 속세에 초탈한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를 떠올리며 속으로 생각한다.
‘과연 그녀에게 욕망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동화…아니,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은 고결한 분위기. 몸짓 하나하나부터 목소리까지 너무나도 고결했다.
그의 안에서 그녀는 이미 대소변조차 보지 않는 요정과도 같은 존재였다.
‘아아…빨리 만나고 싶다.’
잠시 후면 그녀를 멀리서나마 실제로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졸음이 순간이나마 확 달아나고 엉덩이가 들썩들썩 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급식시간 5분 전의 남학생들이 종이 치자마자 재빠르게 달려가서 줄을 서려고 대기하고 있을 때의 기분이었다.
뭐…자신은 학창시절 교실에서 급식 따위 먹지 않고 혼자 도서실에 가서 책이나 읽다 보니 실제로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결국 그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강의가 끝나자 그는 재빨리 강의실을 벗어나서 동아리 방으로 향했다.
그는 평소 워낙 조용하고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언제나 강의실 구석에서 죽은 듯이 지냈었다. 그런 그가 무척이나 드물게도 오늘따라 몹시 서두르는지라 몇몇 사람들은 그가 도대체 오늘따라 왜 그렇게 급한지 호기심을 가질 법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조차 그에게 아예 관심이 없을 정도다 보니 그 누구도 그의 급작스런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다 같이 모여서 출발하기로 약속했던 시간에 혼자 한참을 늦은 관계로 강의실에서부터 쉬지 않고 부실까지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안에서 이런 속된 말로 오타쿠 서클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척이나 화려한 소녀가 약간 퉁명스런 목소리로 그를 맞아주었다.
“선배, 왜 이렇게 늦었어?”
머리는 갈색으로 전부 염색하고 무척이나 짧은 핫팬츠에 배꼽이 다 보이도록 반 팔 티셔츠를 허리춤에서 살짝 묶었다. 목에는 초크를 하고 있고 눈동자도 어딘가 날카로워 그와는 정반대로 정말 기가 세 보이는 소녀였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에도 그녀의 굳은 심지가 느껴졌다. 그렇게나 정반대인 두 사람이지만 의외로 같이 있는 데에 위화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해야할까. 보기에 따라서는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인 연하의 소녀에게 핀잔 섞인 인사를 들으며 그래도 그녀가 정말로 화가 났단 건 아니란 걸 깨달은 그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말도 없이 늦은 그를 걱정한 것 같았다.
항상 자신에게 날이 선 듯 퉁명스럽게 대하는 그녀지만 그래도 자신을 정말 싫어하는 건 아니란 걸 새삼 깨달아서 마음속에 약간 여유가 생겼다.
그제야 동아리실에 그녀와 자신뿐이 없다는 걸 깨닫고 그는 소녀에게 조금 의아한 목소리로 질문 했다.
“다른 두 사람은?”
말하고 나서 속으로 살짝 자책했다. 그래도 몇 안 되는 동아리 회원 중 하나다. 다솜아라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좀 더 살갑게 대하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아무래도 여자는 익숙하지 않다 보니 친하게 굴기 힘들다. 특히 그녀의 화려한 외모를 보면 괜히 주눅이 들어서 솔직히 연하지만 그녀에게 존댓말을 하고 싶은 게 본심이었다.
차라리 그게 더 마음이 편할지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살짝 시선을 피하는 그에게 그녀는 도끼눈을 치켜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두 사람은 먼저 가서 줄 서 있겠다며 아까 출발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는 느긋하게 와도 괜찮데.”
“그…그래. 나 때문에 두 사람에겐 미안하게 됐네. 가는 길에 이번에 새로 우리 여왕님이 광고 찍은 음료수라도 하나씩 사줘야겠어.”
“응…분명 두 사람도 좋아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사실 그 두 사람은 제가 선배와 조금이라도 더 단둘이 있을 수 있도록 저를 배려해준 거지만요.’
자연스레 현민이 오기 전에 있었던 작은 소동을 떠올리곤 얼굴을 살짝 붉힌다.
“그럼, 공주님! 소신들은 먼저 물러나겠소. 부디 건승하시길.”
“무운을!”
“저…정말이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오옷! 지금 그 표정 무척 좋소이다. 현민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구려.”
“음음…우리 공주님도 평소에 이렇게 솔직하다면 진즉 현민도 넘어갔을 텐데.”
“그…그러니까! 좀!!!”
자신을 향해 엄지를 척 치켜들며 씨익 웃는 두 사람에게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그렇게 필사적으로 부정해봤지만, 전부 소용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현민을 향한 마음을 그들에게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두 사람은 전부 이해한다는 인자한 아빠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향해 다시 한번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는 재빨리 도망치듯 동아리 방을 나섰다.
‘하아…그 정도로 순수하게 응원을 받으면 화낼 기운도 사라진다.’
그렇게 반쯤 체념한 그녀는 두 사람의 호의를 순순히 받기로 했다.
사실 부끄러워서 그렇지 내심으론 자신을 배려해줘서 선배와 둘만 남게 해준 두 사람에게 무척 고마워하고 있었다.
“얼른 가죠.”
“으…응”
둘이서 말없이 교문을 나선다. 뭔가 대화라도 나눴으면 좋겠지만 딱히 할 얘기가 없다 보니 침묵이 부담스러웠다.
전부 선배 탓이었다.
바로 곁에 이렇게나 괜찮은 여자가 있건만 그는 여자라고는 신혜민 말고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럴 때는 정작 신혜민 팬클럽인 동아리에 가입해놓고서도 정작 신혜민을 좋아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렇지만…그건 어쩔 수 없으리라.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푹 빠진 여자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여자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
아무리 그녀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비현실적인 존재라도 말이다.
‘으음…이렇게 말하면 선배가 불쌍하지만, 선배와 그녀의 거리는 2차원과 3차원보다도 멀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녀 따위 포기하고 슬슬 나한테로 눈을 돌리면 서로가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에 타자 운 좋게 빈자리가 있었다. 나란히 앉자 가끔씩 스치듯 맞닿는 그의 어깨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혹시 선배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 어쩌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자 그는 남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혼자 속편하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굉장히 손해보는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 손으로 그의 양쪽 볼을 있는 힘껏 꼬집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무척이나 부드러운 말이었다.
“선배 많이 피곤한가 봐? 또 밤늦게까지 일한 거야?”
“으응…”
“정말이지…그러지 말라니까.”
“그래도 그러면 굿즈들을 원하는 만큼 다 살 수 없으니까. 최소 3개씩은 사야 해. 이 신념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
그런 신념 따위 당장 뺏어서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는다.
대신 속으로 홀로 크게 한숨을 쉰다.
자기도 정말이지 참 바보 같다.
정말이지…어쩌다가 이런 남자에게 푹 빠져버린 건지.
하지만…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도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지금 모습을 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촌스럽고 음침했었다. 시골서 갓 상경해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세련된 도시 여자들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다 보니 열등감만 커져서 남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언제나 혼자 지냈었다.
그럴 때……그런 자신을 찾아내고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게 선배였다.
교정 구석에서 언제나 혼자 있는 자신에게 다가와 살짝 낯간지러운 듯 콧잔등을 긁으며 선배는 말했었다.
“너도 나와 마찬가지구나. 이거 줄게 속는 셈 치고 들어보면 반드시 힘이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생판 남인 자신에게 정말로 행복하게 웃는 얼굴로 신혜민의 음반을 아무렇지 않게 주었다.
선배는 그때…
신혜민의 노래에 내가 구원받을 거라 말했지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
아무런 흑심 없이 그저 순순히 언제나 혼자 있는 자신을 북돋아 주기 위해 말을 걸어준 선배의 선행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의 상냥함’에 구원받은 것이었다.
그날부터 자신은 변했다. 변할 수 있었다.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우선 사랑스러워지기로 했다.
그렇게 여자로서 한 꺼풀 벗은 후에 그를 찾으러 다녔다.
그렇게나 신혜민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분명 관련 동아리를 샅샅이 뒤지다 보면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온 동아리를 다 뒤지고 다닌 끝에 그를 발견하고 그에게 활짝 웃는 얼굴로 인사했을 때, 그가 자신을 못 알아본 건 충격이었지만……
선배는 가끔 이렇게 신혜민을 홍보하기 위해 자신이 산 그녀의 관련 상품이나 앨범을 아무렇지 않게 남들에게 선물하곤 했다. 그에게 전도란 흔한 행위다 보니 어쩌면 그가 자신에게 했던 친절도 그의 입장에선 별거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당시에 가뜩이나 인상이 흐릿했던 자신의 얼굴 따위 그의 기억에 남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자신에겐 너무도 가슴 뛰는 평생에 단 한 번뿐인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뭐, 어쩔 수 없나.’
남자의 약간 바보 같은 면을 용서해주는 게 여자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그에게 평소보다 상냥하게 말했다. 하지만 솔직해질 수 없어서 조금 퉁명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잠깐 눈 좀 붙여. 도착하면 깨워줄게.”
“고마워, 그럼 염치없지만 부탁할게.”
자신이 조금 쌀쌀맞게 말한 게 아닌가 하며 후회하고 있을 때, 현민은 그녀의 걱정과 달리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눈을 감고. 꾸벅꾸벅 다시 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곁에서 쌔근쌔근 졸고 있는 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혹시 그가 자다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진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하며 두근두근 가슴을 졸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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