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제47 화 닫힌 세계의 두 사람 (8)
* * *
처음 욕실에 들어왔을 때는…
사장이 아래층서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재빨리 씻고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밤새 얼마나 많은 그의 씨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는지 씻어도 씻어도 정액의 냄새가 몸에서 빠지질 않는 기분이 들었다.
딱히 그의 정액을 불쾌하다고 여기는 건 아니지만…
단둘이서만 이곳에 같이 있는 동안은 그가 내 몸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냄새만 맡길 바랐다. 그게 소녀의 마음이었다.
거기에 더해 질 내에 잔뜩 사정한 정액을 하나하나 손으로 전부 긁어 내다보니 더욱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다.
어쨌든…
예상보단 시간을 잡아먹었지만 말끔하게 몸을 씻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번에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 지로 깊은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여자는 꽃이다.
그 자체로도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이지만…
자신의 남자를 돋보이게 해줄 때 더욱 아름답게 피는 꽃이다.
아름다운 여자를 지배하에 두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그 어떤 명품을 몸에 두른 것보다도 남자의 격을 높여준다.
뭐,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남자든 여자든……서로가 서로에게 최고의 장신구에 불과한 걸지도. 그런 형태의 관계도 있는 거겠지. 그런 형태의 사랑도 이 세상엔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를 속물적이라며 부정할 생각은 나에겐 없다.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오기와 열등감으로 가득한 속물적인 여자였으니까…………….
인간이 가지는 나약함, 간사함 그런 것들을 나만큼은 비난할 수 없겠지.
오히려 나는…
그 모든 더러운 욕망을 긍정해야 마땅하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사장이다. 희박하긴 하지만 그런 사장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같이 있는 나 때문에 사장에게 창피를 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런 한적한 마을에서 너무 화려한 옷은 그것대로 너무 튀어서 안 좋을 것 같고…’
역시 뭐든지 균형을 잘 잡는 게 중요하겠지.
젊은 애인처럼 보여서 사람들이 뒤에서 사장에게 손가락질하며 수군대게 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비서처럼 여겨지는 게 최선일 터.
밖에서는 사무적인 관계처럼 보이도록 최대한 단정하게 검은 정장을 입었다. 사장의 옷 입는 취향이 워낙 간결하고 깔끔한 걸 선호하다 보니 이런 옷을 입고 하는 것도 좋아할 거 같아서 혹시 하는 마음에 가져왔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아무래도 상당히 잘 한 판단이었나 보다.
화장을 끝내고 거울 앞에 서서 전신을 비추어 본다.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있긴 했지만 꽤나 그럴싸한 비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심 속으로 살짝 만족해한다.
이 정도면……
적어도 남들 눈에 사장의 내연녀처럼은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유능한 비서처럼은 보이지 않더라도 적어도 상사를 따라 나온 신입사원정도로는 여겨지지 않을까.
이제 문제는 이런 복장에 어울리는 구두를 신고 사장에게 맞춰서 얼마나 오랫동안 마을 안을 돌아다닐 수 있느냐인데…
그 부분은 여자의 의지로 어떻게든 버텨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준비를 끝내고 1층으로 내려가자 사장은 차분하게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딘가 그림 같은 비현실적인 멋진 모습이라 순간 말을 걸지 못하고 넋을 잃고 잠시 사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내 시선을 느낀 사장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내게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 툭 던졌다.
“잘 어울리는군.”
…
“감사합니다.”
사장이야 별 깊은 의미 없는 인사치레로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이런 말을 듣고 진정으로 듣고 싶은 남자는 분명 따로 있지만…
사장에게 듣는 것도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야…
같이 있는 동안은 좀 더 그에게 칭찬받고 싶다.
마음껏 어리광부리고 싶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을 때였다.
“자네도 한잔할 텐가?”
사장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온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내 윗사람인 사장이 모처럼 권하는 걸 거절하는 건 그다지 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하지만…내가 씻고 준비하는 동안 사장을 상당히 오래 기다리게 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미 사장이 자신의 잔을 거의 비운 것도 그렇고.
저게 첫 잔일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은 낮겠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장에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시길.”
“그런가.”
사장도 그런 내 의도를 이해했는지 마저 남은 잔을 깔끔하게 비우며 테이블에 내려놓은 뒤 자리에 일어서며 아무런 미련 없는 목소리로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럼 가도록 하지.”
“네.”
사장과 함께 밖으로 나온다.
주인을 모시는 시녀처럼 다소곳하게 반걸음 정도 떨어져서 사장의 뒤를 따른다.
서준과 함께 팔짱을 끼고 걸었던 것처럼 사장과도 팔짱을 끼고 담소를 나누며 걷는 것도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팔이 근질근질하지만 자제하기로 했다.
그런 것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그의 마음이 이 이상 심란해지지 않도록 그저 조용히 곁을 따르는 게 진정으로 내가 사장을 위해 할 수 있는 행동거지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서로 이렇다 할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조용히 길을 걸었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딱히 이 침묵이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가 레코딩 하우스로부터 나선 지 대략 20분쯤 지났을까…우리는 한 주택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지금까지 아무 말 없던 사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듣는 내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아련한 목소리였다.
“계기는 정말이지 별거 아닌 사소한 것이었다. 그저 집이 근처였을 뿐이었단 거였지.”
“하지만 내겐…그런 사소한 것마저 운명처럼 느껴졌었다.”
사장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사장을 뒤따를 뿐이었다.
…
그 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작은 유치원이었다.
분위기 자체만 놓고 보면 상당히 오래된 유치원 같았지만 최근 리모델링을 했는지 어떻게 보면 새로 지은 것처럼도 보이는 곳이었다.
사장이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진즉에 없어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껏 남아있었을 줄이야…….”
뭐, 요즘은 점점 아이를 낳는 부부들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추세다. 그러다 보니 이런 사설 유치원들은 점점 사라지고 나라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들만 간신히 살아남는 실정이라 사장이 이렇게 의아하게 여기는 것도 납득이 갔다.
나는 그런 사장에게 조심스레 물어봤다.
“안에는 들어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래, 관두도록 하지. 딱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정말 그런 걸까…라는 의구심이 잠깐 들었지만, 나는 그 이상 깊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서준 외에는 그다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나 사장이나 참으로 인간관계가 극단적이란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유치원 안쪽에서 문을 열고 한 어린 여자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6살에서 7살 정도로 보이는 절로 시선을 끄는 무척이나 귀여운 소녀였다.
나와 사장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녀에게로 모였다. 하지만 소녀는 다른 중요한 거에 정신이 팔렸는지 우리의 시선 따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보다 훨씬 커다란 문을 힘겹게 열며 문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무언가 그녀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거를 찾듯이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한 차례 둘러 본 뒤 원하는 걸 찾았는지 다다다다 뛰며 유치원 마당의 한쪽 구석으로 갔다.
저 어린 소녀가 무엇을 그리 찾는 걸까……
나와 사장도 호기심에 소녀가 달려간 방향을 보자 거기에는 또래들에게서 떨어져 한 소년이 혼자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소녀는 활짝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면서 소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소년의 손을 붙잡고는 자신과 함께 저쪽으로 가서 같이 놀아달라고 했다.
칭얼거린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응석을 부린다고 해야 할지…
다른 건 몰라도 무척이나 저 어린 소녀가 소년을 따른다는 것만은 오늘 그들을 처음본 우리조차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소년이 조금 소녀가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아마 소녀의 순수한 호의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모르는 걸로 보인다.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소년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소녀를 따라나서기 시작했다.
나처럼…
메마른 여자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훗…
옆에서 사장이 작게 웃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사장을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도 웃을 수 있구나, 이 남자는.’
사장은 무척이나 온화하고…
그리고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아련한 미소로 조금 전 그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너무도 온화하고 평온해서 어딘가 서준을 떠오르게 하는 미소였다.
읏…!
괜히 나까지 사장을 따라 가슴이 아련해진다.
그때 사장이 조용히 혼잣말처럼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녀도 저랬지. 음침한 구석이 있는 나와는 다르게 또래에 어울리는 무척이나 밝은 미소가 끊이질 않는 소녀였다.”
“어린 나이였음에도…그 꾸밈없는 미소는 반의 다른 모두에게 사랑받아 그녀는 언제나 반 아이들의 중심이었지.”
“그녀와 함께하길 바라는 아이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지만, 그녀는 어째선지 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내게 줄곧 손을 내밀어줬다.”
“모두에게 상냥한 그녀에겐 근처에 사는 외톨이를 혼자 놔둘 수 없다는……그녀에겐 지극히 아무것도 아닌 친절이었겠지만, 나는 그런 그녀에게 구원받았다.”
“아무것도 모를 어린 나이였음에도…지금도 그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내겐 그녀가 너무도 눈부시게 보였다. 앞으로 내 평생을 그녀에게 바친다 한들 조금도 아깝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사장의 나직한 회상을 들으며 나는…
어젯밤 이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사장의 곁으로 가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내가 그러고 싶었다.
지금은 오로지 그를 보듬어주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사장 역시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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