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제38 화 새벽을 찾아 떠난다.
* * *
조용히 전의를 가다듬은 나는 여자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골목 밖으로 나왔다. 우선은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며 자신의 현재 위치를 확인한다.
‘어디 보자…’
여기서 조금만 더 가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지하철역 근처에 커다란 쇼핑몰센터가 있는 게 보였다. 백화점과 쇼핑몰센터가 나란히 붙어있는 곳이었다.
달리 갈 곳도 없으니 그곳으로 향한다. 잠시 후 쇼핑센터 안에 들어온 나는 에스컬레이터를타고 여성용 의류 브랜드들이 입점해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기왕 온 김에 우선은 속옷 이외에도 다른 뭐 살만한 옷이 없나 하고 한 바퀴 돌아다녀 본다. 하지만 그다지 마음에 닿는 물건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으며 처음 봐두었던 여성 전용 속옷매장 안으로 들어간다. 곧바로 친절해 보이는 직원이 다가와 나를 맞아주었다.
“혹시 따로 생각해두신 물건이 있으신가요?”
“…”
분명 있긴 있지만…
속옷 본래의 기능을 전부 제거하고 오로지 남자를 기쁘게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 자극적인 속옷을 사러 왔다고 아무리 같은 여자에게라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뇨. 딱히…일단은 천천히 좀 보면서 생각해보려고요.”
무난한 말로 흘려넘긴다.
“알겠습니다. 그럼 느긋하게 둘러 보시기를.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과연…이렇게 고급스러운 매장에서 일하는 만큼 교육을 확실하게 받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눈치가 좋다고 해야 할까.
점원은 끈덕지게 들러붙거나 하지 않고, 곧바로 물러섰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매장 안을 둘러본다.
확실히 동네에 있는 옷가게와는 다른 제법 큰 매장다웠다. 무척이나 다양한 브랜드의 속옷들이 진열되어있었다.
그런데…
분명 보다 화려하고 종류도 다양하긴 했지만 그래 봤자 평소 내가 동네에서 다니는 가게에서 파는 물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다지 맘이 동하진 않는다.
‘지역 경제도 무시할 게 못 되는군.’
오히려 과도한 장식이 달린 게…부담스럽다고 해야 할까. 내 취향이 이상한 건가 싶었는데 설명을 보니 30~40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상품이라고 적혀있었다.
흠…
과연…
속으로 잠시 안도한다.
그렇게 매장 안을 좀 더 돌아다니다 보니 오히려 속옷보다는 잠옷들에 눈이 갔다. 토끼 잠옷이라든가 펑퍼짐한 곰 잠옷이라든가…
귀여울 뿐 아니라 손으로 만져보니 촉감도 보들보들한 게 입고 자면 굉장히 잠이 잘 올 것만 같았다.
‘…’
정 살 게 없으면 돌아갈 때 토끼 파자마 정도는 사갈까…….
어쨌든 뭐, 남의 시선도 있고 하니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자극적인 속옷이 공공연한 곳에 진열돼 있을 리는 없겠지.
매장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상대적으로 꽤나 구석진 곳에 있는 음습한 곳이었다.
예상대로 이곳엔…
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코너보다 상대적으로 내가 원하는 거에 가까운 속옷들이 있었다.
대충 훑어보니 종류는 크게 두 가지였다.
음부와 유두를 간신히 가리고 그 이외의 다른 부분이 전부 얇은 끈으로 되어있는 속옷과 음모와 유두가 비쳐 보일 것만 같은 시스루 란제리.
가끔 일체형에 사타구니가 깊게 파여있는 하이레그도 드문드문 보였다.
대충 이런 종류의 속옷들이 다시 크게 검정, 빨강, 아이보리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흐음…
이건…조금, 아니 확실히 상당히 민망하다. 예전 같았으면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정도다.
하지만…나는 지금 날 위해 여기에 온 게 아니었다. 나에게 많은 것을 준 남자에게 보답하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몸으로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하기 위해서 온 거였다.
그런 시선으로 보자면 이것들도 조금 부족하달까…….
확실히 어딘가 밋밋했다.
다른 곳으로 가볼까.
“조금 더 둘러보고 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나온다. 그다음 같은 층에 있는 다른 속옷매장들도 둘러봤지만 다 거기서 거기였다.
흠…아무래도 이곳은 튼 거 같았다. 옆에 있는 백화점으로 가볼까.
백화점도 그다지 기대는 되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시간을 확인한다. 저녁때까진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조금 걸으면서 공기라도 쐬자. 어차피 시간은 남아도니까.
그러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그렇게…
쇼핑센터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나왔을 때였다. 조금 걸어가자 시야 한구석에 성인숍이 들어왔다.
…
보자마자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만 쉽게 안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진 않았다.
뭔가 안 좋은 선입견 때문이랄까. 여자 혼자 저런 곳에 들어갔다가 큰일 나는 게 아닌가 싶어 선선히 들어가지 못하고 살짝 망설여진다.
하지만…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며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두운 조명에 담배 찌든 내가 나는 그런 칙칙하고 켕기는 게 많아 보이는 우중충한 곳을 상상했는데,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그러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어지간한 가게보다 인테리어에 공을 들인 게 여지없이 느껴졌다.
무척이나 따스한 조명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허브 향기로 긴장이 풀리며 분명 처음 오는 곳임에도 익숙한 곳에 찾아온 것만큼 기묘한 기시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혼자 온 여성을 배려해서인지 점원은 내게 공손하게 인사한 뒤에 시선을 내게서 거뒀다.
얼핏보면 무성의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내겐 그런 무관심이 필요했다. 속으로 배려에 감사하며 모처럼이니 느긋하게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일 근처에 있는 건 남성용 물품이었다. 여성의 성기를 본뜬 그로테스크한 물건들이 진열되어있었다.
저런 게 정말 기분이 좋은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스스로는 확인할 수단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그저 어딘지 모르게 사용 후에 청소할 때 꽤나 귀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건 씻고 나서 햇볕에 잘 말려야 할 텐데 말이다.
혼자 살더라도 상당히 난이도가 높겠는걸…….
남자들이 저런 걸 손에 들고 헐떡이며 열심히 수음질 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남자의 경우 여자의 몸처럼 성감대가 전신에 고루 분포된 게 아닌 하반신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단조롭게 자신의 물건을 쥐고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든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하고 원초적인 행동일수록 그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어서 내 얼굴이 무척이나 뜨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사장이나 서준도 그러는 걸까. 두 사람도 남자다. 가끔은 혼자 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사장이나 서준 같은 남자가 그렇게 경망스럽게 자신의 성욕을 배출하려는 모습은 잘 상상이 안 가지만…….
흠……
사장이야 여자가 끊이질 않는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지금은 언제든 내가 대기하고 있으니 괜찮겠지만 서준은 과연 어떨는지…….
두근…!
두근…!
남자가 자위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가끔 사장이 내 얼굴에 사정할 때 쿠퍼 액과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자신의 물건을 오른손으로 꽉 움켜쥐고 격렬하게 흔들던 모습을 코앞에서 봐왔다.
그때야 워낙 나도 흥분하여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다 보니까 아무런 생각도 없고 얼굴 위에 뿌려지는 정액의 뜨거움과 그 뒤에 코와 입을 파고드는 백탁 액 특유의 비릿함에 정신을 빼앗겼지만…이렇게 곰곰이 떠올려보니 마치 원숭이 같은 게 상상 이상으로 천박하고 추잡했다.
서준의 그런 모습 따위 떠올리고 싶지도 않지만…서준이나 사장같은 멋진 남자의 그런 망가진 모습은 무척이나 배덕감이 느껴져서 오히려 몹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해줘도 쓸 거 같진 않지만…
그렇다면 내가 직접 해 주는 건 어떨까……
꿀꺽…
여자아이에게 부끄러운 짓을 당한다는 굴욕에 수치심으로 몸을 떨면서도 밀려오는 쾌락에 저항하지 못하는 사장과 서준의 모습을 떠올린다. 두 사람 다 여자아이처럼 사정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헐떡이며 얌전하게 내 손길을 받아들이다가 부르르 떨며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오나홀 안에 정액을 토해낸다.
나…나쁘지 않을지도…
한두 개 사갈까…….
뭐가 좋으려나……
쭉 둘러본다.
더럽혀진 순결 소녀, 음란 여교사, 여선배의 비밀, 미육의 향기, 죄에 젖은 미망인……
…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이름들뿐이다. 읽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 중에서……
‘소녀의 헌신’이라………
흠………괜찮군,
나쁘지 않은 이름이다.
사장용으로 한 개, 서준용으로 또 하나 집어 든다. 그리고 이곳에서 볼일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자리를 뜨려는 순간 나는 하나의 물건에 시선을 사로잡혀 그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악녀의 유혹이라고 적혀있는 물건이었다.
마치 미래의 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이건 확실히 쓸만 하겠어.
생각에 잠겨 잠시 앞을 내다본다.
1수 앞…
2수 앞…
3수 앞…
4수 앞…
그리고…배드 엔딩.
과연…이건 내가 안배해둔 마지막 장기 말을 움직일 때 상당히 효과가 좋으리란 계산이 섰다.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걸 구했다.
이것만으로도 오늘 여기 온 보람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쯤 되자 다른 것들도 기대되었다.
나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즐겁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서 더욱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