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제37 화 뜻밖의 수치플레이
* * *
으음…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해보자 시간은 오후 12시를 조금 지나 있었다.
몇 번이나 절정한 끝에 한 번에 피로가 몰려와 실신한 거라 엄청나게 오랫동안 잠든 줄 알았는데 그렇지않았나 보다.
비척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난다.
방안은 여전히 음란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시킨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자 이번에는 온몸의 식은땀과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 끈적끈적한 애액이 기분 나빴다.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알몸인 상태 그대로 욕실로 향한다. 샤워 꼭지를 틀고 뜨거운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쓰자 온몸의 피로가 풀리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멍하니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머리로 맞고 있었다.
…
그 뒤 어느 정도 컨디션이 회복된 나는 가볍게 씻은 뒤 캐주얼한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청바지 위에 흰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조금 펑퍼짐한 청잠바를 걸친다.
마지막으로 뒷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이것만으로도 인상이 180도 변해 충분할 거 같았지만……
소녀의 마음이란 게 그렇지만은 않았다.
‘마스크를 어디에 뒀더라……’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주섬주섬 마스크를 찾는다. 짐도 얼마 없는 방이건만 막상 필요할 때 찾으려니 안보인다.
조금 번거롭긴 하다만 약국을 한 군데 더 들를 필요가 생긴 거 같다.
어떻게 보면 그저 그뿐인 이야기였다.
나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으며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곧바로 집 근처에 있는 약국으로 향한다. 입구 근처에 다양한 마스크가 진열되어있었다. 대충 훑어본 다음에 그중 제일 싸구려로 한 장 산다.
위생 목적이 아니라 그저 얼굴을 가리려는 용도로 쓰고 말 거기 때문에 마스크 자체의 성능 따윈 어떻든 간에 상관없었다.
약국 문을 나서 버스 정류장까지 한참을 쭉 걸어간다.
약 10분 정도 걸었을까. 멀리 정류장에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뒤에 줄을 서고 대기하는 동안 마스크를 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타려는 버스가 왔다. 버스를 타고 복합 쇼핑몰센터나 백화점이 즐비한 여기서 좀 떨어져 있는 시내로 나간다.
나름 번화가라 그런 걸까.
월요일 낮인데도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 돌아다니고 있었다. 걔 중에서 팔짱을 끼고 사이좋게 걷고 있는 연인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그늘 없는 그들의 밝은 미소가 눈부시다.
물론 그들도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과 다르게 내면에는 그들만의 깊은 고민을 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서도…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쯧…!
팔자도 좋군.
속으로 혀를 찬다. 커플 따위는 전부 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
‘나도 언젠가는 반드시 서준과……’
마음속으로 나도 그들과 같은 미래를 손에 넣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기필코……
…
번화가에 도착한 내가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또다시 약국이었다. 딱히 이곳 지리에 밝은 것도 아니기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확 들어온다는 것은 그만큼 커다란 약국이란 의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목이 좋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안으로 들어오자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 약국 안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약사에게로 다가간다. 훤칠한 키에 직업을 고려해보면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하는 남성이었다.
약사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
혹시 ‘나는 굉장한 실수를 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저쪽에서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을 열심히 상대하고 있는 여자 약사를 기다릴 걸 그랬나.
아니, 오히려 이런 걸 의식하는 게 더욱 부끄러운 거다. 게다가 대체 무슨 약을 팔려는 거길래 살짝 호기심이 들 정도로 외로운 노인들의 말 상대도 겸하고 있는 거 같아서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스크 안에서 조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저…피임약 사러 왔는데요….”
“네, 평소 어떤 제품을 애용하셨나요?”
“라니아로 한 상자…아니, 두 상자 부탁드려요.”
아마도 피임약을 복용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 한 상자도 과분하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 기왕 사는 김에 두 상자 사기로 했다.
“네, 또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저…저기……”
제일 중요한 게 남아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썼는데도 이 모양이다.
“저…그러니까 그……”
“그…콘돔…세 상자……아니……, 네 박스로 부탁드려요.”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순간 내 앞에 있는 약사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 떠지려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헛!
내 뒤에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젊은 남자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가뜩이나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더웠는데 화끈거려 미칠 거 같다. 가능만 하다면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을 정도였다.
약사가 몸을 돌려 물건을 가지러 가려고 할 때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에게 작게 말했다.
“저…최대한…얇은 거로 부탁드려요.”
“네?”
아무래도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보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에 묻혀 그가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려다가 여기서 더 부끄러워 봤자 얼마나 더 부끄럽겠냐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최…최대한 얇은 거로 부탁드려요!”
“…”
“…”
“…”
…
순간 팔한지옥의 차가운 바람이 한바탕 몰아치고 간 것처럼 약국 안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목소리가 너무 컸나보다.
자극이 너무 강했는지 내 등 뒤에 있던 남자가 입을 쩍 벌리고 얼어버린 걸 뒤돌아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혹시 여자 경험이 없는 남자였던 걸까.
그렇다면 그에겐 무척이나 미안한 짓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현실에서 도망칠 정도로 나는 무척이나 부끄러움에 빠져있었다. 실제로는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에게는 영원과도 같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서 약사가 내가 주문했던 물건을 가져왔다.
나는 허겁지겁 현금을 꺼내 내려놓은 뒤
“거…거스름돈은 괜찬하요.”
말끝에 혀를 씹을 정도로 허둥거리며 약국 안에서 재빨리 도망쳐 나왔다. 등 뒤의 소란을 뒤로하며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건만 꽁지가 빠져라 한참 동안을 달렸다.
내용물이 비치지 않게 새까만 봉투에 담아준 약사의 상냥함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움을 느끼며……
…
허억…
허억…
얼마나 달렸을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인적 드문 골목길 안쪽으로 급히 꺾어 그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이고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허억…
허억…
후우우…
고작…고작해야 그 본질은 의료용품인 물건을 사는데도 이 모양 이 꼴이다. 무척이나 용도가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특수한 거긴 하지만 말이다.
사장과 단둘이 있을 때는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끄럽고 음란한 행위도 아무렇지 않게 몇 번이고 서슴없이 저질렀는데…
아마 앞으로 평생 두 번 다시는 만날 일 없는 사람들 상대로 이렇게 부끄러워하다니…그것도 나인지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다른 사람처럼 꾸미고 마스크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는데 말이다.
이런 내가 이보다 더 남사스러운 물건을 살 수 있을까. 속옷 본래의 기능인 위생적인 면이나 보습을 완전히 팽개쳐주고 오롯이 남자를 기쁘게 하는 것만을 위해 만들어진 자극적인 속옷을 살 수 있을까.
…
무리! 무리! 무리! 무리!
절대 무리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이렇게나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그런 걸 사러 갔다간 심장이 멈춰 버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럴 순 없겠지.
이대로 주저앉은 채 물러설 순 없겠지.
나는 사장의 장난감이니까……
그가 내 몸에 질리면 그 순간 곧바로 버려지고 얼마든지 다른 여자로 대체될 수 있는 사장에게 안기길 바라는 수많은 성 처리 도구 중에 하나에 불과하니까……
‘그럴 순 없다.’라는 예전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내가 그를 떠나기 전에는 결코 그에게 먼저 버려지진 않을 거란 확신이 가슴 속에 있었다.
같은 상처를 입은 자들만이 가지는 일그러진 유대감이 우리 두 사람을 묶어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이다.
내게서 과거의 자신을 겹쳐봐서 사장은 내게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려고 했다.
그에게선 정말이지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았다.
그렇기에……적어도 내가 그의 곁에 있는 동안에는 나 역시 그에게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
마음을 줄 수 없는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건 몸뿐이니까……
적어도 내 몸을 이용해서 그를 기쁘게 하는 데에 있어서는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타협해서는 안 되겠지.
그렇게 나는……
여자의 전쟁터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