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제35 화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어도…
* * *
꿀꺽…
꿀꺽…
후우…
강성우는 부엌에 있는 정수기에서 커다란 머그잔에 찬물을 한가득 따른 뒤 단번에 들이켜 온몸에 수분을 보충했다.
하도 급하게 마시다 보니 한줄기 물이 입 밖으로 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바닥까지 잔을 싹 비운 그는 호쾌하게 식탁에 잔을 내려놓은 뒤 손으로 턱에 흘린 물줄기를 닦고 거실로 돌아왔다.
거실에는 격렬한 정사 끝에 실신한 송나은이 소파 위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앉은 뒤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댄다.
이마에 흐른 땀이 축축하게 눌어붙어 축축하게 젖어있는 그녀의 앞머리를 무의식중에 매만지다가 테이블에 놓여있는 담배로 손을 가져간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기 직전에 손을 멈춘다.
“…”
실신한 채 고른 숨을 쉬고 있는 송나은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테이블에 담배를 다시 되돌려놨다.
‘정말이지 나답지 않군.’
그만큼 자신의 무릎 맡에 누워있는 소녀가 소중해졌단 거겠지. 먼 길을 떠날 여자에게 너무 빠지는 건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기에 자중하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나 보다.
‘무르군, 나도. 뭐……어쩔 수 없나.’
송나은은 마음속에 자신과 같은 상처를 안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와 같은 슬픔에 영원히 빠져있다는 걸 송나은 또한 알고 있다.
나만이 그녀의 아픔을 알고, 그녀만이 또한 내 아픔을 이해한다.
상대의 슬픔을 보고 슬퍼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이미 사랑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
아마 우리 앞에는 다른 미래 또한 기다리고 있겠지.
그래, 하늘 가는 밝은 길이……!!!!!!!!!!!!!!!!!!!!!!!!!!!!!!!!!
하지만……!
그녀는 그 길을 갈 생각이 없고, 나 역시 그녀가 죄로 젖은 길을 택하는 걸 말릴 생각이 없다.
소파 위에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곤히 자고 있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공주님을 안듯이 그녀의 몸을 밑에서부터 끌어안는다.
으음…
그녀가 얕게 신음하며 내 품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
아무렇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어쨌든 간에 그녀의 몸을 안고 손님용 방으로 가서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갈아입을 만한 옷을 몇 가지 침대 옆에 놔둔 다음 잠시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서준…….”
자고 있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이름이었다.
신기하게도…
가슴이 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질투의 감정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나 자신도 조금은 놀라울 정도로.
그녀의 감겨있는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줘야 하는 건 내 역할이 아니지만…지금 여기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것도 나 뿐이기에…
뭐랄까, 예전부터 정말 중요한 곳에서는 손해 보는 역할만 하는군. 아니, 그녀는 엄밀히 말하면 과거의 나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내 눈물을 닦아줬을 뿐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손해도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거실로 나온다.
‘이제 좀 맘 편하게 피울 수 있겠군.’
조금 전 내려놓은 담배를 가져와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며 한쪽 팔을 소파 위에 걸치고 담배를 깊숙이 마셨다가 내뱉는다.
후우…
‘서준이라……좋은 이름이군.’
저 녀석이 저렇게 푹 빠질 정도니 아마…좋은 남자겠지. 내 첫사랑이던 그녀 못지않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즈음은 직접 만나보고 싶군.’
‘후후…나는 손에 넣지 못했지만, 너는 원하는 바를 성취하길 바라마.’
과거 홀로 남겨진 뒤 어두운 방 안에서 줄곧 울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꿈에서조차 서준을 그리워하며 한줄기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송나은의 모습을 떠올린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모습이 포개어지며……
내가 송나은이 되고, 송나은이 내가 되었다.
한 알의 겨자씨가 수미산을 품고, 겨자씨가 무성한 숲을 이뤄 이윽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모든 것이 사라져 어둠만이 남았다.
일체(一?)가 만법(??)으로 갈라지고 만법(??)이 일체(一?)로 귀결되는 어둠 속에서 하늘로부터 하나의 거대한 문이 떨어져 내렸다.
둘이 아님(不二)의 문이었다.
망설임 없이 그 문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나는 눈을 떴다.
아아…
송나은이 오기 전에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곡을 최고의 형태로 완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너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도록 하지. 네가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도록.’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 올라간다.
책상 앞에 앉아 미친 듯이 펜을 휘갈긴다.
이 곡은…자신의 한(?)과 송나은의 한(?) 두 사람의 한(?)이 하나로 녹아든 형태. 자식을 남기지 않는 자신이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생의 흔적.
그것이 비록 남녀 간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송나은과 자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자식보다도 더욱 소중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연민의 증거.
질까 보냐…
그 누구에게도 질 수 없다.
그래, 그 ‘존귀한 이름’에게 조차도…….
이기지 못하더라도, 쓰러지지 않는다.
종막의 너머에서 송나은을 그녀의 빛으로 인도하는 소금이 되리라.
그렇다면…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자아, 나는 내가 할 일을 하자.
사람에겐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있는 법이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행복으로 꼭 이어지리란 법은 없더라도 말이다.
…
“으음…”
따스한 아침 햇살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나직한 신음성을 흘리며 송나은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대체 언제 잠들었던 걸까…아니, 의식을 잃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려나…….
그런 아무렇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려니…
윽…!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중간부터 의식이 날아가서 기억이 중간에 끊겼다.
현관에서의 정사가 한번 끝난 후 한참 동안 쉬다가 체력이 회복된 자신과 사장은 거실 소파에서 또 한 번 몸을 섞었다.
처음에는 소파 뒤에서 선 채로 소파 위를 두 손으로 붙잡고 엉덩이를 뒤로 쏙 빼고 허리를 아래로 내린 채 사장에게 두 손으로 허리를 붙잡히고 격렬하게 안겼다.
그다음은 소파에 누운 사장의 위에 내가 올라타 그의 몸 위에서 상체를 뒤로 꺾고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자세가 역전되어 내가 그의 아래에 깔려 일방적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기억은 거기서 끝났었다.
그저…
자신의 하반신에 아직도 끈적하게 눌어붙어있는 정액과 애액의 흔적들이 어젯밤 있었던 정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서준의 꿈을 꾼 것 같기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속에서 나는 울고 있었고, 서준이 그런 내 눈물을 상냥하게 닦아준 것만 같았다.
…
어제 사장에게서 조금이나마 서준을 떠올려서 그런 건가…….
그제야 사장에게 신경이 미쳤다. 소파에서 실신한 나를 여기 손님용 방까지 안고 옮겨준 건가…….
깨닫고 보니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가슴으로 가져다 대고 꼭 움켜쥐고 있었다.
그냥 놔둬도 됐을 텐데. 사장의 배려에 가슴이 따스해진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는 갈아입을 옷가지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일단은 씻어야겠지.
무의식중에 사장과 같이 씻으려고 사장에게 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마도 같이 씻을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다급하게 처리해야 할 무언가 바쁜 일이 생겼을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분명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떴을 거다. 급한 용무가 없는 한은 그가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란 묘한 믿음이 어느새 내 안에 있었다. 그건 확신과도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난다.
사타구니 안쪽의 은밀한 곳에 남아있던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애액과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정액이었다.
싫어도 어젯밤 내 몸 위에서 내 몸을 찍어누르던 사장의 단단한 몸이 자연스레 뇌리에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으며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의도적으로 지우려 한다.
허벅지 안쪽으로 손가락을 찔러넣었다가 한두 번 헤집은 다음 빼낸다.
아니나 다를까 손가락은 끈적끈적한 액체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이거 전부 빼내려면 시간 좀 걸리겠는걸…….
서둘러야겠군. 안 그래도 곧 있으면 고용인들이 올 시간이었다.
이런 모습이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겠지.
빨리 씻고 나온 다음 사장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가든지 하자.
욕실에 들어간다. 거울 앞에 서자 온몸에 낭자한 어젯밤 정사의 흔적들이 보였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 이상으로 격렬했군.’
‘사장도 참 정열적이라니까.’
살짝 미소지으며 샤워기를 튼다. 뜨거운 물을 맞으며 꼼꼼하게 몸을 씻기 시작한다. 음부 안에 남아있는 정액을 빼내는 데에는 특히나 정성을 기울였다.
씻고 나온 나는 옷을 입고 사장에게 인사하러 가기 위해 곧바로 계단을 올라 사장실로 갔다.
똑똑!
언제나처럼 공손히 문을 두드린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안쪽에서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려있다. 들어오도록.”
그리고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사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남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일하는 모습은 멋지단 말이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사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잠시동안 조용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때였다.
그가 펜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내게 말했다.
“제때 딱 맞춰서 왔군. 방금 막 완성된 참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내게 자신에게 오도록 손짓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가 나한테 한 장의 악보를 건넸다.
나는 그 악보를 받아 든 순간 눈을 부릅떴다.
왜냐하면………
…
너무도 예상외의 일이라 굳어 있는 내게로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너의 노래다. 너만을 위한 노래다.”
“너보다 음색이 좋은 자도, 가창력이 좋은 자도 많겠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너뿐이겠지.”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너의 노래로 듣는 이의 심령을 울리는 거다.”
아아…
사장의 말을 들으며 나는 두 개의 길을 보았다.
하나는 하늘로 향하는 밝은 길을…….
그건 너무도 편안하고 따스한 길이었다. 거기에 안주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나는 그 길을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걸 사장도 알고 있었다.
사장의 마음이 종이로부터 전해져왔다.
그는 대체 어떤 심정으로 이 곡을 썼을까. 내게 어떤 마음으로 이 곡을 건네준 걸까.
어쩌면 나는……
등불을 들고 빛을 찾아 헤매는 걸지도 몰라.
아니, 필경 그럴 거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다. 이 단 하나의 마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웃는 얼굴로……
사장에게 고개를 깊숙하게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