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제29 화 파국의 프렐류드(??曲)
* * *
한 가지를 얻었지만 그만큼 지불한 것도 컸다.
내가 얻은 것은 정보.
잃은 것은 신뢰.
꼭 필요한 지출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안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한 번 잃은 신용을 다시 회복하는 건 신뢰를 처음부터 쌓는 것 이상으로 무척이나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아직 그렇게 비관할 정도는 아니고 경계심을 조금 사버린 정도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지만……
배드 엔딩의 끝에서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나한테 있어서는 그 조금의 경계심이란 게 무척 까다로운 장애물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내 사소한 실수 하나가 미래의 나에게 치명적인 비수로 돌아올지도 몰랐다.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를 완벽하게 기만해야 한다.
그나마 한가지 나에게 다행인 점은 타인에게서 내 본심을 들키지 않도록 할 때 가장 중요한 표정관리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저 서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절로 내 입가엔 따스한 미소가 지어졌으니까.
자아…우선은 그의 경계심부터 풀도록 하자.
그러면…첫수를 어떻게 두느냐인데…….
그와 나 사이에 놓여있는 테이블 위에 가상의 바둑판을 떠올린다. 내 본망을 감추고 상대를 기만하며 상대를 내의도로 움직이게 하는 걸 이미지화하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그의 경계심을 푼다는 건 중원이 아닌 외곽에서부터 돌려 깎는다는 의미.
그렇다면…
지금 나한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 정도인가…….
세력이냐, 실리냐.
화점에 두어 일상적인 얘기를 하면서 서서히 그의 경계심을 풀다가 핵심적인 정보를 이끌어낼지, 아니면 삼삼에 두어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접근해 실리를 취할 것인지…….
나는 오른손으로 가상의 바둑돌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돌을 쥐고 힘차게 따악하고 기분 좋은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바둑판 위에 두었다.
“최근 좋은 일이 있었나 봐?”
내가 선택한 수는 삼삼침입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역시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복잡한 변화를 시도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그에게 내 의도를 들키지 않고 내가 원하는 화제로 유도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선 조금 과감하게 나가면서도 간결한 변화를 통해 그의 움직임을 끌어내도록 하자.
아니나 다를까 그에게서 내가 예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응, 조금.”
어떤 일이야? 라고 직접적으로 묻지 않는다. 그것만큼은 반드시 피해야만 했다. 하나의 종막에서 절망한 그가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왔을 때 모든 것의 시작이 여기서부터라는 걸 깨닫지 못하게 해야 했다.
최악의 경우 어렴풋이는 눈치채더라도 적어도 내 악의에 대한 확신만은 가지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잠시만, 마실 게 떨어졌네. 가지러 가는 김에 네 것도 가져올게. 칼라만시면 괜찮겠지?”
“응, 부탁할게.”
이 자리의 흐름을 한 번 왜곡한다.
단순히 그가 얘기한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걸 넘어서 그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던 걸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는 내가 속 시원하게 긁어주는 모양새가 되도록 뒤틀어버린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에게서 얘기를 듣고 싶어 다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의도적으로 발걸음을 느리게 한다.
내가 먼저 이 화제를 꺼내긴 했지만, 그건 마치 단순히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흔하게 안부를 묻는 것에 불과할 뿐 자세한 내용을 못 듣는다고 해서 아쉬울 건 딱히 없다는 태도를 필사적으로 연기한다.
“자, 여기.”
자리로 돌아온 나는 그의 앞에 잔을 내려놓은 뒤 내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느긋한 태도로 컵 안에 든 음료를 홀짝였다.
결코 먼저 말하지 않는다.
기다린다.
언제까지고 기다린다. 그가 먼저 입을 열기까지.
잠시 후 내가 잔을 반 정도 비우고 식탁에 다소곳하게 내려놓자, 마찬가지로 목을 축인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서두를 떼기 시작했다.
“이번에 일이 좀 잘 풀려서…졸업하면 곧바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다운 겸손한 대답이었다.
“흐음…다행이네.”
“뭐,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그의 말을 끝으로 잠시 뜸을 들인 후, 나는 남아있던 잔을 마저 비운 다음 그에게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가 바로 분수령이었다.
그건 즉 나에게는 사람다움의 마지막 갈림길이었다.
나는 그 말을 입에 담는 거에 속으로 죽은 피를 한 사발 토하면서도 겉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정말로…정말로 잘됐어. 선배…아니, 언니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아서.”
그리고 돌아온 것은 너무도 경쾌한 반응.
예상했지만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상상 이상이었다.
“응, 안 그래도 올해 안에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려고.”
…
그런가. 그럴 테지. 무의식중에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하염없이 흘러내리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는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잖냐.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는데, 난 대체 뭘 상처받고 있는 거냐.
지금은 그보다 해야 할 게 있지 않느냐.
빠르다. 무척이나 빠르다. 물론 서준이 혜민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올해 안이라니. 몇 달 남지도 않았잖은가.
지금부터 그사이에 서준이 혜민에게 최고의 프러포즈를 하기 적당한 날이라면 크리스마스뿐.
촉박하다. 너무도 촉박하다.
신혜민을 망가뜨리려면 크리스마스 전에 최소 순수하게 일주일이란 시간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외에 이것저것 준비하려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달이 채 안 된다.
시간에 맞게 댈 수 있을까?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서준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내게 말했다.
“슬슬 돌아갈까.”
“응. 덕분에 잘 먹었어. 내가 낼게.”
“아냐, 내가 오자고 했는걸. 모처럼이니까 내가 계산할게. 정 뭐하면 다음에 사줘.”
“응…….”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아마 다음에도 자신이 계산하려 하겠지. 나야말로 그에게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데…
하지만 남자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도 여자의 미덕이다.
순순히 그의 호의에 기대도록 하자.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나를 전철역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
개찰구 앞에서 그가 부드러운 미소로 날 배웅한다.
…
이렇게 또 그와 헤어진다니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아직 들켜선 안 되는 마음. 아무도 모르게 나 홀로 고인 간직해야 하는 마음.
그렇기에 나는 그를 향한 이 사모의 정이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일부러 조금 과장되게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장난치듯이 얘기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조금 아까워. 서준에게는 내 매니저를 부탁하고 싶었는데.”
“고마워. 신경 써줘서. 마음만으로도 기뻐.”
읏!
그는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더니 나를 여동생 취급하며 내 머리를 예전처럼 다정하게 쓱쓱 쓰다듬었다.
“그럼, 들어갈게.”
“응.”
그렇게 말하며 그는 뒤돌아서 전철역에서 나갔다. 나는 방긋 웃으며 그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그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 나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간신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곧바로 눈에 보이는 아무 칸이나 닥치는 대로 들어간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 위에 앉은 채 재빨리 하의를 내린다.
팬티는 이미 더 없이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하아…
하아…
허억…
헉…
더…더 이상은…한계였다. 가뜩이나 그와 같은 공간에서 그가 내뱉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 끊임없이 야한 기분이 들어 제정신을 유지하기 버거운 상태였다.
간신히…정말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조금 전 서준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준 게 결정적이었다.
이미 남자에게 개발된 몸이 욕심을 부리며 그를 원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천박하게 가랑이를 벌리고 주위에 내 신음성이 들리지 않게 상의를 들어 올려 입에 꽉 문다.
읏!
응!
웁!
우웁!
상의를 들어 올려 그 끝자락을 입에 물은지라 훤히 드러난 브래지어 안으로 왼손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오른손은 상스럽게 벌린 허벅지 안쪽의 은밀한 곳에 가져다 대고 이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격렬하게 문지른다.
눈을 감고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서준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온화한 시선. 그의 나직하면서도 감미로운 목소리.
그와 팔짱을 끼고 걸었을 때 느꼈던 그의 우락부락하진 않았지만, 무척이나 탄탄했던 팔근육.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의 부드러운 손길.
손가락에 살짝 굳은살이 있던 실로 남자다운 손을 떠올린다.
읏!
찔꺽…찔꺽…찔꺽…찔꺽…
그 손으로 내 가슴을, 내 음부를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하게 애무해준다는 상상을 하자 절로 허리가 뒤로 젖히고 다리가 쭉 펴지며 몇 번이고 절정에 이르렀다.
내가 변기 위에 축 늘어졌을 땐 변기 주변과 그 아래가 내 애액으로 흥건하게 더럽혀졌다.
하아…하아…
하아…하아…
하지만……………
부족하다…………………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
혼자서는 아무리 해봤자 이 근질거림은 진정되지 않는다……
이건 이미 남자가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원초적인 정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길 가다가 아무 남자나 붙잡고 그에게 강간당하듯이 거칠게 안기고 싶었다.
하아…하아…
여자도 때론 걷잡을 수 없이 남자에게 온몸이 망가질 때까지 안기고 싶을 때가 있는 거다.
지금의 내가 그랬다.
그래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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