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럽혀진 아이돌-28화 (28/136)

〈 28화 〉 제27 화 탐색

* * *

서준과 같이 교차로를 건너 맞은편에 있는 지하철 입구로 향한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자 200m 즈음뿐이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는 시푸드 뷔페의 간판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좀 더 먼 곳에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할 걸 그랬나.

처음에는 비록 그의 마음속에 내 자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팔짱을 끼고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았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먼 여자는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간사한 생물이기에 지금은 이 행복한 시간이 좀 더 계속됐으면 하는 욕심이 마음속에 움튼다.

내 발걸음이 자연스레 축축 처지려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서준을 옆에 두고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비록 조금뿐이지만 그와 피부가 맞닿아있는 이 둘도 없이 귀중한 시간을 전력으로 만끽해도 모자를 텐데. 과분한 욕심을 부리며 그와 함께 있는 이 시간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다니…

나에게 어울려주고 있는 그에게도 무척이나 실례되는 태도다.

하지만…

“아…미안. 너무 빨랐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서…”

잘못한 건 그의 바로 곁에 서서 걷는다는 이 과분한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괜히 더 욕심을 부리려다가 딴생각에 빠져버린 나다.

그런데 오히려 서준이 보폭을 천천히 줄여 내게 맞추면서 사과했다.

깊이 사모하고 있는 남자의 이런 별것 아닌 사소한 배려가 내 가슴을 뛰게 만든다.

“아냐….”

그나저나 방금 그가 말한 익숙하지 않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는 그 자리의 머쓱함을 털어내기 위해 별 것 아닌 투로 무의식중에 덧붙인 말일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이 얼떨결에 튀어나온 사소한 말.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정보는 그런 사소한 곳에 깃든다.

조금 전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 한마디가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거대한 희망으로 다가왔다.

서준의 성격상 나와 걷는 게 익숙하지 않다는 말로 한 건 절대 아닐 거다. 여자와 이렇게 나란히 걷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 주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보폭대로 걷고 말았단 의미로 한 말이겠지.

하지만…

단순히 그것뿐일까? 좀 더 그 이면에는 다른 의미도 있는 게 아닐까? 여자와 나란히 걷는 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는 건 알겠다. 그것도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게 익숙하지 않다는 건 알겠다. 나와는 달리 혜민이 보이는 곳에서 서준과 이렇게 팔짱을 끼고 걸었다면 그 날로 나라 전체가 뒤집혔을 거다.

‘보이는 곳’에서는 그렇다 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만약 서준이 ‘여자의 몸’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거라면…….

후후…단순한 내 희망 사항에서 온 제멋대로인 편리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한창때의 사랑하는 두 남녀가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니, 그쪽이 더 말이 안 되었다. 내가 만약 혜민이었다면 꼭두새벽부터 서준의 씨를 받기 위해 그의 정액을 쥐어 짜냈을 거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일이 재밌어지겠어.

서준은 내가 하늘처럼 떠받드는 남자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자존심에 흠이 가는 건 내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의 남자의 긍지를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정보를 끌어내는 건 무척이나 다난하겠지만 반드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어.

남자보다도 남자의 몸에 대해 샅샅이 알게 된 지금의 나라면 그 정도는 반드시 해낼 수 있어…

내가 그렇게 속으로 새로이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두 분이신가요?”

“네.”

나는 서준과 점원의 대화에 퍼뜩 놀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전혀 예상치 못한 희망의 산봉우리를 발견한 탓에 어지간히도 깊은 생각에 잠겼나 보다.

엘리베이터를 탄 기억도 없는데 나는 어느새 서준과 함께 3층에 있는 씨푸드 레스토랑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두 분 들어갑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깔끔하게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단정한 검은 제복을 입은 여점원이 소형마이크에 대고 그렇게 얘기한 다음 우리에게 말했다.

“안쪽으로 가시면 직원이 안내해드릴 겁니다.”

“네.”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안쪽 복도를 쭉 걸어가자 남직원이 다가왔다.

“두 분 맞으시죠?”

우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남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혹시 원하시는 자리 있으신가요?”

“아뇨, 딱히…….”

서준이 그렇게 말끝을 흐렸을 때 내가 옆에서 살짝 말했다.

“그래도 혹시 구석진 자리가 있으면 그쪽으로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그렇게 우리는 남직원에게 안내받아 창가 구석에 있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입고 있던 카디건을 의자에 걸어놓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에 음식을 담아오려 할 때였다.

서준이 그런 날 만류하면서 말했다.

“오늘 피곤한 거 같은데 앉아서 쉬고 있어 줘. 내가 가져올게.”

“그…그럴 수는.”

“괜찮아. 무엇보다 내가 오자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하게 해줘.”

“응……고마워.”

내가 서준에게 하나라도 더 대접하고 싶었지만, 서준이 저렇게 말하니 순순히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자.

“혹시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으면 내가 대충 가져올게.”

“음…나는……”

서준이 좋아하는 거라면 아무거나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나는 급하게 말끝을 흐렸다.

지금 그런 대답은 좋지 않다는 걸 다행히도 늦기 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면 아주 조금이라도 더 그의 경계심을 허물 필요가 있었다. 그가 결코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렇다면 지금부터 밑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머릿속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모든 남자의 마음 밑바닥에 은밀히 주입된 싸구려 영웅 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그에게 응석을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삶은 문어랑…광어 초밥으로 부탁할게. 특히 광어 초밥의 경우 어지간하면 투명한 부위로 만들어져 있을 텐데 혹시 살짝 분홍빛을 띠는 새하얀 부위로 만들어져 있거나 검은 부위로 만들어진 게 있으면 그것들을 중점적으로 부탁할게.”

부탁하는 입장에서 이 무슨 뻔뻔한 주문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여자의 응석이야말로 실은 남자를 속이는 핵심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입에서 쏟아져나온 복잡한 주문에 서준이 조금 어이없어하면서도 이내 여동생이나 딸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는 인자한 아버지와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알았어.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줘.”

“고마워.”

“아냐, 이렇게 확실하게 말해주는 게 오히려 편한걸. 음료는 칼라만시가 상큼하니 평이 좋던데, 그걸로 괜찮을까?”

“부탁할게.”

그렇게…

조금 즐거운 모습으로 요리를 가지러 가는 서준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문득 나는 생각이 미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서준은 오늘 어디 갔다가 돌아오는 길일까…….

당장이라도 서준이 돌아오면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의 일이라면 뭐든지 알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혹여 만약 그의 입에서 지금까지 혜민과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다가 왔다는 말이 나온다면…

상상만으로도 질투로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것만 같다,

그런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묻기가 두려워졌다.

여자는 배짱이라며 각오를 다지고 싶어도 안타깝게도 내 인생은 하나부터 열까지 신혜민이라는 여자에 대한 패배로 점철되어있었다.

무엇하나 그녀를 이겨본 적 없다 보니 자존감이 바닥을 기는 나한테 그건 너무 어려운 주문이었다.

아무리 남자 경험이 많아도 정말로 사모하고 있는 남자 앞에서는 그딴 건 관계없이 그저 한없이 겁 많고 소심한 소녀로 되돌아간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서준이 양쪽 손에 먹음직스럽게 음식을 담은 접시를 가져왔다.

“다녀왔어. 자, 여기. 최대한 주문에 맞추려고 했는데 맞게 가져왔는지 모르겠어.”

“완전 마음에 들어. 고마워.”

접시에는 내가 부탁한 그대로에다가 그 외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스시롤이 몇 개 더 있었다. 특히 게살이 얹혀져 있는 롤이 맛있어 보인다.

한동안 나와 서준은 약간 어색한 침묵 속에서 접시를 비우기 시작했다.

절반 정도 접시를 비웠을 때…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한 내가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젓가락질을 멈추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저기…”

“저기…”

서준도 나와 같이 얘기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지 우리 두 사람의 말이 겹쳤다. 중요한 대화를 앞에 두고도 나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그와 내가 마음이 맞았다는 사실에 은밀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은 웃음을 한번 지으며 이 자리의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다.

나는 그에게 나는 괜찮으니 먼저 말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 갑자기 말도 없이 시설을 나가서 걱정했었어.”

“미안. 거기에 계속 있었다가는 두 사람에게 자꾸 응석을 부릴 것만 같아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떠났어. 말도 없이 사라진 건 미안해.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두 사람에게서 떠나는 건 불가능했다고 생각해.”

나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물론 완전 거짓말은 아니다. 서준은 아니라고 치더라도 혜민에게 기댄다니. 죽기보다도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이유는…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대로 있다가는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서준이 불행해지는 것마저 진심으로 바라게 될 것만 같아서…

나는 내 손으로 내 사랑을 더럽히기 전에 멀리 떨어지기로 마음먹었다.

전부 헛된 저항이었지만…….

내 말에 서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

“이해해. 나도…그랬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서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깨작깨작 접시에 담겨있는 요리를 입으로 옮길 뿐이었다.

턴이…

이쪽으로 넘어왔다.

자아…그럼 어떻게 할까…………

나는……………………

자리에서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가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후훗”

나는 그에게 요염하게 미소지은 뒤……

오른손으로 그의 왼손을 살며시 잡은 뒤에 그가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그의 왼손을 내 젖가슴에 가져다 댄 다음 내 가슴을 주무르게 했다.

그리하여 나는…

간절히 원하던 것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자아, 가자.

가자꾸나.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꾸나.

배드 엔딩, 그 너머에 있는 풍경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한 조각 부족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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