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제26 화 멈추었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럴 수가…
하루 종일 서준의 집 근처를 어슬렁거릴 각오를 하고 왔었다. 그렇게까지 하고도 그의 모습을 먼발치서 잠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돌아갈 정도로 간절하게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랐었는데…
바라던 것 이상으로 그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렇게 그를 지금 내 눈앞 앞에 둔 지금 나는 속으로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나 서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막상 만나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부끄러워서 서준과는 눈도 똑바로 마주치기 힘들었다. 사장에게 접대하면서 남자의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거나 핥았다.
일련의 봉사를 통해 충분히 남자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마음 깊이 사모하는 남자는 완전히 별개란 걸 깨달았다.
사랑하는 남자는 이렇게나 특별하구나.
남자를 알기 전인 처녀였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둔 것만으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내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지금 서준의 마음속에는 아직 내 자리 따위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가 날 보는 부드러운 시선에 온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그의 목소리, 그의 냄새 그 모든 게 날 미치게 했다.
그렇게 내가 그와 인사를 나눈 후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 거리고 있을 때였다.
“왜 그래? 갑자기 아무 말도 안 하고…….”
그가 그런 내 태도에 걱정되었는지 내게로 한걸음 다가와서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들며 그에게 말했다.
“아…아무것도 아냐. 그냥 하도 오랜만에 만났더니 무슨 말부터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너무 그렇게 서먹하게 굴지 마. 진정한 친구는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다가 만나더라도 바로 엊그제 만났던 거 마냥 친숙하게 느껴진다잖아.”
그가 마치 어린 여동생을 대하듯이 내 이마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그렇게 말했다.
친구라…
알고 있다. 그가 나를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의 말 그대로 그는 언제나와 같은 변함없는 태도로 입가에 너무도 상냥한 미소를 띠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한 가지 확실한 건……
가슴에 대못이 박힌 것마냥 욱신거린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그에게 들켜선 안 된다. 아직은 이 외줄 타기처럼 위태롭게 연결되어있는 이 가느다란 끈조차 나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했다. 아직은 그와 난 친구라는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가면을 쓰고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그에게 말한다.
“그러게…….”
아직은…때가 아니다.
지금은 그를 향한 이 질척하고 추악한 사랑을 꾹꾹 눌러놓자.
내가 울적한 심정이 되어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서준이 내 얼굴에 그의 얼굴을 가까이 대며 내게 말했다.
“안색이 굉장히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혹시 어디 아프거나 너무 피곤한 거 아니야?”
나는 그와 내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내 눈앞에 그의 얼굴이 바싹 다가와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얼굴이 벌게지고 가슴이 벌렁벌렁거린다.
허억…
허억…
이건 심장에 상당히 안 좋다.
동시에……
읏…!
어떠한 애무나 전희도 없이…그저 그가 내 곁에 바싹 다가온 것만으로 하반신이 살짝 젖었다.
유두도 쓰라릴 정도로 빳빳하게 섰다…….
‘나…정말로 구제 불능이네.’
그가 지금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무 모텔이나 들어가서 서준에게 격렬하게 안기고 싶었다.
그의 물건을 게걸스럽게 탐하고 싶다.
사타구니 구석구석을 핥고 빨면서 그가 내 봉사를 받으며 황홀해 하는 얼굴을 보고 싶다.
이윽고 절정에 달한 그가 내 입안에 사정한 대량의 정액을 입에 한가득 머금고 삼킨 다음 그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지금 내 몸과 마음이 얼마나 서준을 원하는지, 나는 지금 당장 그에게 내 몸뚱이만이라도 사랑받을 수 있다면 그가 가지고 놀다가 버리는 여자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집에서 해주는 밥이 맛있더라도 사람은 집밥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가끔씩은 미치도록 밖에서 사 먹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막말로 신혜민을 본처로 두고 나는 신혜민에겐 비밀로 서준의 섹스파트너가 되어 가끔씩 그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안고 싶을 때만 날 찾아와줘도 되었다.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아니, 몇 달에 한 번 설령 1년에 단 한 번만 서준이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내 몸을 안고 곧바로 신혜민에게 돌아가더라도…
나는 그 하룻밤의 추억으로 다음 1년을 기쁜 맘으로 그가 다시 와서 내 몸을 안아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어쩌다가 하루 그의 씨를 받는 나날 속에서 우연히 그의 아이를 배게 되면 나는 결코 서준에게 매달려 그를 귀찮게 하지 않고 내 힘만으로 나와 그의 아이를 평생토록 행복한 마음으로 잘 키울 각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신혜민 그녀가 결코 용납하지 않겠지.
그리고…무엇보다도 서준이 불륜 따위를 저지를 리가 없었다. 서준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악행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남자다.
그렇게 다른 쪽으로는 한없이 융통성 있는 서준이지만…자신이 사랑을 맹세한 여자에게만은 해바라기보다도 더 한결같은 남자였다.
결혼하고 나면 다른 여자와는 사적으로 커피 한 잔조차도 하지 않을 한없이 성실한 남자.
그게 내가 반한 서준이었다.
결국…아무리 힘들고 험난한 길이더라도 신혜민을 철저하게 망가뜨려 그에게서 떨어뜨리고 그의 텅 빈 몸과 마음을 나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
그를 앞에 두고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팬티를 축축하게 적시고 허벅지를 꼼지락 꼼지락거리며 내가 이런 상념에 빠져 있었을 때였다.
“그나저나 이곳엔 어쩐 일이야?”
서준이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응…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어.”
차마 그를 스토킹하러 왔다고는 할 수 없어서 아무렇게나 둘러댄다.
“바쁜가 보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
“…”
“갑자기 사라져서…걱정했었어. 나도, 그리고 혜민 선배도……”
“미안…….”
“아냐, TV에서 널 봤을 땐 깜짝 놀랐지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한시름 놨었어.”
“고마워.”
“그러고 보니 같은 연예인인데 선배랑도 만나거나 해?”
“아니, 아무래도 소속사도 다르고…출연하는 프로나 서는 무대의 차이가 워낙 심하다 보니 그다지 마주칠 일이 없었어. 하지만 아마도 조만간 만날 기회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고 있어.”
“그런가…그땐 선배를 잘 부탁할게. 저래 봬도 은근히 외로움을 잘 타서. 가끔은 혼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고 있을까 봐 걱정돼.”
“응…….”
나한테 있어서 서준은 신이다. 그의 말은 신이 내리는 절대적인 지상명령.
그라니…
혜민을 잘 부탁한다는 말도 나는 반드시 지킬 것이다.
다만…내 방식대로.
쾌락이란 고통을 물로 희석한 것.
지극한 쾌락이란 지극한 고통 끝에 찾아온다는 걸 난 알고 있다.
그녀에겐 내가 책임지고 내 모든 걸 건 최고의 쾌락을 줄게.
후후…
후후후후……
“맞다, 저녁은 먹었어?”
내가 어떻게 신혜민 그 여자를 철저하게 귀여워 해줄지를 상상하며 속으로 음흉하게 웃고 있을 때 그런 내게 서준이 물었다.
“아니, 하루 종일 굶었어.”
“나돈데. 간만에 만났으니 밥 먹으면서 같이 회포나 풀자.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말해줘.”
“응, 그다지 재밌는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근처에 괜찮은 씨푸드 뷔페가 있는 거 같은데 거기로 갈까?”
“에스코트는 맡길게.”
“하하, 맡겨주세요. 공주님.”
안 그래도 한번 즈음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같이 갈 사람이 없다 보니 여자 혼자 가긴 뭐해서 그동안 갈 기회가 없었다만…
그의 대답을 끝으로 우리는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모처럼이니까 조금 정도는 더 욕심을 부려도 되겠지.
나는 내 옆에서 한걸음 정도 떨어져서 걷고 있는 그에게로 다가가 팔짱을 꼈다.
서준이 살짝 당황한 게 맞닿은 피부로부터 전해져왔다.
“나은?”
“후후, 모처럼 만에 만났으니 이 정도 응석은 봐줘.”
“나야, 영광이지만 너는 누가 이런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난처해지는 거 아냐?”
“괜찮아. 나 그렇게까지 얼굴이 알려져 있진 않은걸. 그리고 오히려 이렇게 인파 속에 녹아드는 편이 더 눈에 띄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아?”
“정말이지 어쩔 수 없네. 이번 한 번뿐이다.”
“응”
“그럼 가실까요, 공주님.”
“네, 기사님.”
그는 날 설득하는 걸 포기한 건지 나와 팔짱을 낀 채로 다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들이 볼 땐 우리가 평범한 연인이 데이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의 팔에 몸을 더욱 기댔다.
…
멈추었던 시계가…
지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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