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제25 화 오랜 폭풍우 뒤의 무지개
* * *
어떠한 섭리가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되어 내 앞을 가로막으려는 것만 같았다.
이 또한 신혜민 그녀가 가진 천운일까.
하늘로부터 모든 은총을 부여받은 그녀다. 모종의 가호가 그녀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수준의 잘못된 인과의 오류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신혜민이 지닌 그녀만의 특별함이 너무도 규격 외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서준을 향한 나의 참사랑의 뿌리에 도달한 이 늙은이의 존재는 나한테 있어서 진실로 성가신 가시였다.
나는 반드시 신혜민 그 여자를 내가 더럽혀진 것보다 더욱 철저하게 더럽힐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보다 더욱 소중한 서준을 상처입히고 망가뜨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내 모든 것인 서준에게 그런 가혹한 짓을 하는 게 가능한 이유는 마지막의 마지막엔 서준이 행복해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의 이 두 손으로 기필코 그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니까.
하지만…
서준이 행복해진다는 미래 자체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이 늙은이의 존재는 나한테 있어서 단 하나뿐인 선택지를 강요하는 훌륭한 외통수였다.
이 늙은이의 입을 막아야만 했다.
필요하다면 그 어떤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최악의 경우 내 모든 계획과 지금까지의 준비가 전부 수포로 돌아갈 위험성도 높았다.
그렇더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
이딴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서준의 행복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흐리게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를 다진 다음 피식 웃으며 노인에게 답했다.
“시시한 이야기네.”
“네, 정말이지 시시한 이야기지요.”
서로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줄곧 아무것도 없는 정면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는 이제야 고개를 돌려 서로를 노려보았다.
노인에게서 더 이상 능글능글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언제 터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불이 붙은 화약고와 같은 상태.
나와 노인이 서로를 노려보며 서로의 긴장감이 높아져만 간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대치상태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을 깬 것은…
“할아버지~!”
멀리서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7살에서 8살 사이로 보이는 한 소녀였다.
“할아버지, 어디 갔었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소녀는 노인에게 달려와 그대로 노인의 품 안에 폭 안기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하, 미안하구나. 그만 아는 사람을 발견했더니 반가워서 말이다.”
“흐음…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요.”
“그래, 그래, 이 할아비가 잘못했다.”
“헤헤”
소녀는 그렇게 해맑게 웃으며 노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내게 신경이 미친 듯 고개를 빼꼼 내 쪽으로 돌리며 노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 예쁜 언니는 누구예요?”
어린데도 말을 참 이쁘게 하는 아이다.
저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가 표정이 헤벌레 풀어져서는 손녀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평범한 팔불출 노친네가 된 게 이해가 갔다.
“아…이 언니는 말이다…음…그러니까……”
노인이 날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난감해할 때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내가 소녀에게 내 소개를 하려 할 때였다.
소녀가 나를 향해 밝게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사실은 알아요. 예쁜 언니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그렇구나…….”
조금 머쓱하다.
“꼬마는 이름이 뭐니?”
“장보경이라고 해요.”
“그래, 좋은 이름이구나.”
“네!”
…
“자자 보경아, 이 할아비는 이 언니랑 중요한 할 얘기가 남아있으니 잠시만 저쪽으로 가서 놀고 있어 주려무나.”
“싫은걸…할아버지랑 같이 있고 싶어.”
“그러지 말고 착하지. 자, 보렴. 언니도 난처해하고 있잖니.”
소녀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날 지그시 올려다보며 내게 물었다.
“언니, 제가 여기 있어서 난처해요?”
나는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니. 이렇게 예쁜 공주님이 있는데 난처할 리가.”
“헤헤, 봐요. 할아버지. 언니도 괜찮데요.”
“허허……”
“하지만 보경이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요 앞에서 놀고 있을게요.”
“고맙구나.”
그렇게 말한 뒤 보경이라는 소녀는 노인의 품에서 떨어져 쪼르르 달려갔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마냥 밝은 미소로 아무것도 없는 공원 여기저기를 뛰어다닌다.
‘아이는 순수하니 좋구나…….’
그저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심신이 치유되는 기분이다. 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와 서준의 아이도 저럴 테지.
으응, 저것보다 몇 배는 더 사랑스러울 것이다.
아이는 몇 명이 좋을까.
서준과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몇 명이더라도 똑같이 사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으면 아이들에게만 애정을 쏟다가 서준에게 소홀해질 수도 있으니…너무 많은 것도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을지도.
혹시 내가 아이들에게만 신경 쓰다 보면 서준이 질투해주려나.
그건 그것대로 행복한 미래 같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공원 한쪽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내 옆에 앉아있는 노인에게 입을 열었다.
“친손녀가 아니군.”
내가 알기로 이 노인에겐 자녀가 없다.
“네. 그렇죠, 뭐.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게 된 아이인데, 딱히 친척도 없다 보니 어쩌다 제가 맡게 된 아이랍니다.”
“이야…이거 참 이 나이 먹고서야 처음 애를 돌보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가…”
노인은 그렇게 익살맞게 죽는시늉을 냈지만 꽤나 행복하게 보였다.
“보경아!”
나는 큰 소리로 소녀를 불렀다. 소녀가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쪽을 보더니 이내 종종걸음으로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벤치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쪼그리고 앉아서 소녀와 시선을 똑같은 높이에 맞췄다. 그리고는 소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가 좋으니?”
“응!”
소녀는 눈부실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그런 건가…….”
나한테 있어서는 심히 성가신 참견쟁이 노친네에 불과하지만, 이 작은 소녀에게 있어서는 나한테 있어서 서준과도 같은 단 하나뿐인 태양인 것이다.
“노친네가…운이 좋군.”
이 소녀에게서 노인을 영원히 떨어뜨리는 건 나한테는 무리다. 다른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겠다.
눈앞에 있는 소녀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어린 시절의 내가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지금까지 중에 가장 부드러운 미소로 소녀를 한번 껴안아 준 다음에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말 잘 들어야 한다.”
“응! 명심할게, 언니.”
“후후, 그래.”
나는 다시 한번 소녀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리고 옆에서 송나은의 그런 모습을 본 황요한이라는 이 정년을 코앞에 둔 늙은 형사는…
커다란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만 같은 충격에 빠졌다.
왜냐하면…
송나은이란 소녀의 그 미소가…
오랜 폭풍우 뒤의 무지개였기 때문이다.
…
이 세상에 도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도덕적인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송나은이라는 소녀의 과거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노인은 착잡했다. 소녀는 울고 있었다. 모두가 소녀를 외면했다.
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들만큼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아이들이 없었다. 걔들에겐 어떨 땐 오히려 부모가 있는 게 독이 되었다.
때문에 그녀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저 속으로 피눈물 흘리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학대를 묵묵히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그런 소녀가 지금 저렇게나 부드럽게 타인을 향해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게 가능한 건…역설적이게도 그녀를 외면하지 않은 한 씻을 수 없는 죄인의 헌신 때문이었다,
죄란 도대체 무엇일까? 노인은 이제 그걸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단 하나 확실한 건 하나의 죄 덕분에 눈앞의 소녀가 확실히 구원받았다는 것.
지금의 자신은 도저히 그 죄인을 심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있는 자신의 손녀를 껴안는다. 손녀가 활짝 웃으며 자신의 뺨을 자신의 뺨에 비빈다. 수염 자국 때문에 따끔거려서 기분 나쁠 텐데도 손녀는 그런 건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한결같이 천진난만하게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래, 지금의 자신은 도저히 그에게 뭐라 할 처지가 못 되었다.
비록 피가 이어지지 않았지만, 자신 역시 이 손녀의 미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것도 저지를 수 있을 테니까…….
그런가…그랬던 건가……이게 바로 올곧게 미친 자의 마음이란 말인가. 아니, 정말로 미친 건 미치지 않고서는 누구 하나 구할 수 없는 이 부조리한 세상일 것이다.
후…뭐랄까, 손녀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끊었던 담배가 무척이나 땅겼다.
그나저나 당시 송나은에게 손녀에게 있어서 지금의 자신과 같은 그런 존재는 없었다. 그렇다면…경찰의 수사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사건 바로 전까지 송나은과는 일면식이 없는 생판 남이었단 소리다.
대체…그는…어떤 심정으로……
후…
노인은 송나은에게 들으라는 듯이 체념 섞인 큰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깊숙하게 등을 기댔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송나은에게 그는 말했다.
“정말이지 노인네의 시시한 얘기였습니다. 이런 얘기로 당신의 시간을 빼앗아 면목이 없군요. 제가 했던 말은 전부 잊어주십시오. 늙은이의 망상에 불과했으니.”
“왜 갑자기?”
지금까지 시종일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그녀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딱히 승부를 겨룬 건 아니지만, 묘한 승리감을 얻었다.
“뭐, 굳이 이유를 대자면 제 소관이 아닌 일이라서랄까요. 전 딱 월급 받은 만큼만 일하자는 주의입니다. 그리고 혹시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남아있는 이 아이가 큰일이니까요. 위험한 일은 최대한 피해야겠죠.”
“……?”
“이런, 제가 말 안 했었나요? 저는 그 사건 이후로 강력계에서 소년과로 옮겼습니다. 이 아이도 거기서 알게 된 거죠.”
“그래.”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의 말은 진심처럼 느껴졌다. 신뢰해도 되겠지.
“그럼. 다시는 보지 않길 바라지.”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잘 있으렴.”
“언니, 다신 못 만나는 거야?”
“으음, 어떠려나. 그건 언니도 잘 모르겠단다. 하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될지도.”
“응…….”
“행복하렴.”
“응! 언니도!”
나는 보경에게도 작별인사를 하고 아무런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노인이 뒤에서 날 불러세웠다.
“잠시”
“……?”
노인은 날 불러 세워놓고도 노인이 하려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망설이는 듯했다. 뭐, 지금까지 어울려준 거다. 조금 더 기다려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뜻밖에 잘 매듭지어졌으니 이 정도 서비스는 싼 편이다.
나는 묵묵히 노인의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네 결심했는지 노인이 천천히 운을 뗐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간절함이란 검은 불꽃을 계속 꺼지지 않게 하면, 아무리 하찮은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점차 절대적인 자연력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길은 무척이나 험난하고 고독한 길입니다.”
“빛 한점 없는 어둠 속을 무작정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빛이라면 이미 찾았어.”
“그렇습니까. 괜한 참견이었군요.”
“당신은 파랑새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군요.”
“고마워. 감사 인사 정도는 해둘게.”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다. 나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
빛이라면 그날 이미 찾았다.
아니, 빛이 날 비춰주었다. 나만의 태양이 날 찾아주었다.
후후…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그는 내가 정말로 그를 원할 때에는 반드시 내 앞에 나타나줄 거라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건 이미 내게 절대적인 신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앞에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무척이나 경쾌한 발걸음이다. 무언가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그에게 좋은 일이 있었다니 나 역시 기쁘지만 순간, 그에게 저렇게나 기쁨을 준 건 내가 아니라 혜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외에는 그가 저렇게 기뻐할 일이 딱히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어찌됐든 상관없단 걸 깨달았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엔 서준은 신혜민 그녀의 품이 아니라 내 품 안에 있을 테니까.
지금 여기서 정말 중요한 건……
내가 그를 부르기 전에…………………………………………
봐, 지금도 이렇게 그가 먼저 뒤돌아서 날 알아보고는 내게 미소짓잖아.
마치, 그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변함없는 미소로 그가 나를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교차로에서 알아차려 주었다.
그래,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잘 지내는 것 같네.”
그거면 충분했다.
지금 당장은…………………………
후훗…
후후후……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핫……
마음속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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