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럽혀진 아이돌-25화 (25/136)

〈 25화 〉 제24 화 지독한 선(?)의 심연

* * *

뻔히 보이는 의도에 넘어가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눈앞의 지긋지긋한 늙은이에게 잠시 어울려주기로 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피했다가 오히려 끌지 않아도 될 상대의 관심을 끌어서 이 늙은이가 멋대로 파고들어도 곤란할 뿐이기도 하니까 어쩔 수 없나.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언제나 파국은 예상치 못한 데에서 급작스레 찾아오곤 한다. 특히 언제까지고 내 몸에 감겨있는 지긋지긋한 과거라는 사슬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목을 붙잡을 때가 많았다.

지금이 그것과 가까운 상황이겠지.

하지만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신혜민이라는 나보다 까마득히 위에 있는 여자의 머리를 변기에 처박고 울고 불며 매달리는 그녀의 머리를 짓밟고 내 발을 핥게 만드는 것. 그 하나만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신경을 집중해도 부족한데 다른 것까지 신경 쓸 여유 따위 없다.

오히려 내가 신혜민을 끌어내리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 전에 과거의 악연과 마주친 작금의 상황은 내게도 좋은 이야기였다.

호미로 막을 것은 호미로 막을 수 있을 때 그걸로 막는 게 최선이다. 괜히 뒤로 미뤘다가 가래로 막는 우를 범했다가는 그것 하나만으로 다른 일까지 꼬이는 수가 있다.

가능하다면 지금 이 자리서 귀찮은 것 하나라도 매듭지어서 내게로 튀려는 불똥 하나라도 쳐내도록 하자.

“후후”

“하하”

그와 내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본다면 나와 이 황요한이라는 늙은 형사는 흡사 할아버지와 손녀가 주말 오후 공원 벤치에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따스한 햇살을 쬐고 있는 것처럼 보일런지도 몰랐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겉으로는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상대방의 속내를 하나라도 더 캐내기 위하여 웃는 얼굴 뒤로 치열한 대국을 치르는 중이었다.

머릿속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하나의 바둑판을 떠올린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이제 곧 정년을 앞두고 있는 숙련된 형사. 이전에 봤을 때 보다는 배에 기름기도 많이 끼고 전체적으로 날카로움이 사라진 것 같지만 시종일관 능글능글한 웃음을 입에 달고 있는 게 예전보다 훨씬 까다로워진 거 같다.

첫수는…

흐음…

일단은 여기서는 무난하게 상대방을 좀 더 탐색하는 게 좋겠지.

“당신, 몰라보게 변했군. 원래는 훨씬 사나운 인상이었는데 말이야.”

“네, 저한테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으니까 말이죠.”

이렇게 나올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나한테 단서가 될 정보는 일절 끄집어내지 않으면서도 내 질문엔 훌륭하게 답했다.

그런가…

어떻게 할까.

좀 더 내 쪽에서 파고들까 아니면 상대의 말을 기다릴까.

나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침묵하기로 했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어디까지나 주도권은 나한테 있다는 걸 넌지시 상대에게 말한다.

“하하…이것 참…그래도 연예계라는 복마전에 몸담고 있다 이건가요. 이렇게나 어린 나이인데도 속내를 감추는 데에 능숙하다니 장래가 심히 기대되는군요. 제 부하들에게도 본받으라고 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다들 너무 솔직해서 한 손해 보는 성격들이라 말입니다.”

“뭐, 이 이상 서로를 탐색해봤자 시간만 아까우니 서로 속 시원하게 얘기해보도록 하죠.”

“무슨 의미지……?”

내가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말하자 그는 어깨를 한 번 크게 으쓱이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견제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제가 여기 온 건 당신과 마찬가지라는 걸 전하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나와…같다고?”

상당히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누군가 나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말하면 속이 뒤집힌다. 그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여전히 자기 페이스로 말을 이어간다.

아마 알고서 하는 거겠지.

상당히 성격이 나쁜 늙은이니까.

“그렇지요. 당신도 누군가를 추억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 아닙니까?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누군가라…….”

늙은이와 내가 접점이 있는 ‘그 날’이 아니라 노인과 나 사이에 공통분모가 없는 ‘누군가’를 추억하기 위해 온 게 아니냐고 은근슬쩍 이쪽을 찔러왔다.

바로 조금 전에 자기 입으로 서로 속내를 터놓자고 하더니 곧바로 유도신문이다.

정말이지 방심할 수 없는 노인네다.

“글쎄…짚이는 게 없는걸.”

“흐음…그렇습니까. 이것도 안 통하다니 이쯤 되면 당신과 대화하는 게 즐겁게 여겨질 정도군요.”

“민폐야.”

“하하, 이렇게 그날의 관계자들이 만난 것도 인연이고 하니 늙은이의 넋두리라 생각하고 잠시 들어주십시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는 강력반에서 오래도록 일한 베테랑 형사였지요.”

“자기 입으로 베테랑이라고 말하다니.”

내가 벌레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는 조금 기가 죽었는지 나잇값도 못하고 울먹이는 살짝 목소리로 반론했다.

“이래 봬도 꽤나 성실 했다구요?”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말이지.”

내가 그의 기름기가 낀 배를 지그시 보며 눈총을 주자 그가 머쓱해하며 답했다.

“하하…좀 봐 주십쇼. 곧 있으면 정년퇴직이라 무서울 게 없는 늙은이다 보니 말이죠. 이 늙은이가 농땡이 좀 친다 한들 누가 뭐라 그러겠습니까.”

“세금도둑이란 거군.”

“이야…그런 칭찬은 쑥스러운데 말이죠. 스스로도 뻔뻔하단 걸 알고 있긴 합니다만 공무원한테 있어서 최고의 칭찬을 들어버리니 이거 아무리 저라도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런 바보 같은 대화를 계속 주고받아야 하는 거지?

나는 그의 말에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 정말로 많이 변했군.”

“당신만큼은 아니지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할 얘기가 없다면 가겠어. 모처럼의 휴일이야.”

“알겠습니다. 농은 이쯤 하도록 하죠.”

그가 자세를 바로 하고 진지한 얼굴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강력반에서 오래 일한 형사다 보니 셀 수도 없이 많은 처참한 현장들을 봐왔습니다. 특히 살인현장을 많이 접했는데요, 아무래도 살인이라는 게 100가지 살인이 있어도 무엇 하나 똑같은 게 없이 다양하다 보니 현장 역시 전부 제각각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그 모든 현장에는 그동안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시겠나요?”

“동기?…아니, 감정인가.”

동기라고 말하려다 무언가를 떠올린 나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크게 기뻐하며 지금까지의 능글거리던 목소리가 아닌 격앙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바로 정답입니다. 과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가 얼마 전에야 깨닫게 된 이질감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

“너무도 당연해서 잊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습니다. 특히 살인은 그 죄질이 중하다 보니 극형을 면키 어려워요. 그래서 일반인들은 일반인과 범죄자 사이에 그어져 있는 선을 넘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평소에는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더라도 막상 죄를 저지르려고 할 땐 그게 브레이크가 되는 거예요.”

“상대를 파멸시키고 자기도 파멸하느니 조금…아니, 무척이나 아니꼽지만 자기가 꾹 참고 넘어가서 서로의 공존을 택하는 거죠.”

“하지만…그럼에도 그 모든 걸 뛰어넘는 감정. 자신의 파멸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의 격렬한 감정만은 그 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도록 만듭니다.”

“그게 어떤 감정이냐는 중요하지가 않아요. 증오든 쾌락이든. 혹은 사랑일 수도 있겠죠. 정말 중요한 건 닿기만 해도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격렬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면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그건 무척이나 익숙한 이야기였고…

과거의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였으며…

지금의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신혜민을 향한 오기와 열등감으로 그녀를 파멸시키기 위한 대가로 내 몸조차 아무렇지 않게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허락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알겠어. 하지만 지금 그 얘기와 내가 무슨 상관이지?”

아무리 형사의 감이라는 게 날카롭다지만 지금 내 마음을 알 리는 없을 테니 이건 분명 모든 것의 시작인 그 날과 관련된 얘기일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질이 나빴다.

최악의 경우에는…

모든 계획을 백지장으로 되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늙은이를…

“여기서부터 본론입니다. 저는 당신과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올바르게 미친 현장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마치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도살한 것만 같은…그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현장이었습니다.”

“사람을 그 정도로 토막을 냈는데, 정작 살인범은 상대에게 아무런 증오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느껴졌습니다.”

“당연히 죽어 마땅한 인간…아니, 짐승을 당연하게 죽였다. 그런 거였죠.”

“가뜩이나 당신 의부는 평소 행실이 개차반이라 경찰은 짙은 원한이 얽혀있는 관계로 보고 그 중심으로 주변 수사를 시작했습니다만…당연히 수사는 미궁에 빠졌죠.”

“시간이 흘러 그 사건은 점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저 역시 그 뒤로 그 사건을 잊으려 노력했었습니다만…미련이랄까요.”

“이렇게 정년을 앞에 두고 딱히 할 것도 없다 보니 자꾸 외면하고 있었던 그 사건만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그렇게 나이가 들어 그 사건을 다시금 마주하다 보니 한가지 새롭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 현장엔 감정이 없다고 당시의 제가 느낀 이유.”

“당시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있었던 건 감정이 아니라 의무감이었단 것을.”

“그래요, 범인은 살인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의무감으로 했다.”

“여기에 도달한 순간 저는 완전히 다른 시점으로 사건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내키지 않는데도, 자신에게 그 어떤 이득이 되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는 의무감 때문에 했다. 이건 수단만을 따로 떼어내서 그 본질만을 놓고 보면 진정한 도덕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독한 선의 심연을 엿본 것만 같아 온몸에 소름이 끼치더군요.”

“그렇다면 그 뒤는 간단합니다. 범인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것도 자신과는 일체의 이해관계도 없는 완전한 타인이었을 누군가를 위해서. 왜냐하면 그 방법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수단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

“당신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의부의 잘린 목을 들고 웃고 있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도착해 그 모습을 본 누구나가 어린 소녀가 눈앞에서 일어난 너무도 잔혹한 사건에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고 실성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사건의 진상에 관해 깊게 캐물을 수도 없었고, 무언가를 묻더라도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대답이 돌아와도 아무도 그걸 의심하지 않았죠.”

“하지만…당신은 혹시 정말로 기뻐서 웃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자신을 학대하던 의부가 죽었다는 걸 기뻐했다는 그런 1차원적인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런 일면식도 없었던 당신을 그저 구하기 위해 당신에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위험도 무릅써가며 살인이라는 극단으로 치우친 행위마저 저질러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단 하나뿐인…………………”

“누군가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기뻐하고 있던 게 아닙니까?”

“…”

하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왜 사람이란 이다지도 쓸데없는 일에 참견을 하려는 걸까.

그냥 가만히 놔두면 모든 일이 선을 이루어 머지않아 잘 풀릴 텐데.

꼭 누군가가 예상치 못하게 들쑤시고 다닌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후미진 공원은 참 좋다.

정말이지 늙은이면 늙은이답게 조용히 남은 여생을 보내면 될 것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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