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제23 화 그 만남은,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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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에서 서준과 나은의 재회로부터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혜민의 집으로 찾아온 서준에게 혜민이 정성이 깃든 헌신적인 봉사를 한창 하고 있을 때였다.
으음…
밤새 사장과 실신할 정도로 격렬한 정사를 나누다 의식을 잃은 채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던 나은은 정오가 되어서야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몽롱하다.
이렇게 오후까지 정신없이 잔 게 얼마 만이었을까…….
하지만 그렇게나 잤음에도 머리가 무거웠다.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하긴…
그렇게나 뜨거운 밤을 보냈으니…
몸을 조금 뒤척인다.
사장이 어젯밤 내 안에 얼마나 잔뜩 사정했는지, 몸을 조금 뒤적인 정도로 아직도 안에 남아있는 정액이 가랑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새벽까지 질펀하게 사장과 녹아내렸던 기억이 떠오르며 몸이 살짝 뜨거워진다.
그러고 보니…옆에 있어야 할 사장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먼저 돌아간 걸까…
깨워줬으면 아침상 정도는 간단하게 차려줬을 텐데…
이래 봬도 요리는 자신 있는 편이다.
어쨌든 그렇게나 내 몸을 원해 놓고, 볼일이 끝나자 매정하게 가버린 것에 ‘남자란 다 그런 건가?’라며 약간의 서운함을 느낀다.
뭐, 사장과 내 관계란 원래부터 이런 얄팍한 것이긴 하다.
때문에 선을 딱 긋고 이렇게 행동하는 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았지만……
어젯밤, 지금까지와 달리 격렬하게 서로의 몸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그 선이 일부분 녹아내린 것만 같다고 느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잠시 아픔을 뒤로 미룰 뿐인 그런 불건전한 관계.
애정과는 확연히 다른…망가진 자들의 우정 같은 왜곡된 동질감을 나는 사장에게 조금 느끼고 있었다.
아마 내가 사장에게 안기면서 다른 남자인 서준을 떠올리듯이, 사장 또한 나를 안으면서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라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우정이 존재하지 않고, 한쪽의 짝사랑만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나와 사장은 서로를 이용하고 버리는 관계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 만났더라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굉장히 기분 좋았지…
서준을 상상하며 사장에게 안기는 것은 굉장히 황홀했다. 서준을 떠올리며 혼자서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자극적이었다.
대체품으로도 이 정도다.
서준에게 직접 안길 땐 도대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한 것만으로 하복부가 근질거린다. 자연스레 가랑이를 꼼지락거리며 손이 그쪽으로 갔다.
그대로 손가락을 은밀한 곳에 찔러넣는다.
읏!
아무런 저항 없이 손가락이 쑥 들어갔다. 안이 끈적끈적했다. 손가락을 빼내자 아니나 다를까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후…대체 얼마나 싼 거람.’
‘이럴 때가 아니라 피임약부터 먹어야겠지.’
침대에서 가까스로 일어난다. 저혈압 때문인지 한순간 현기증이 나서 휘청거렸다.
하아…
간신히 무게중심을 잡고 피임약을 가지러 가기 위하여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책상으로 간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한 장의 메모를 발견했다.
사장이 떠나기 전에 남겨둔 메모였다.
깔끔한 글씨체로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먼저 돌아간다고, 주말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라고 적혀있었다.
마지막엔 머지않아 일주일 정도 여행 갈지도 모르니 미리 준비해 놓으라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묘한 배려가 느껴지는 메모였다.
특히 어쩔 수 없이 돌아간다고 적혀있는 부분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흐음…용서해주도록 할까.
…
뭘 용서해주겠다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피임약을 복용하자 잠시 후 기분 탓인지 약 기운이 돌며 가뜩이나 나른한 몸이 더욱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온몸에 말라붙은 땀과 정액을 씻어내려야겠다는 생각과 그냥 이대로 다시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하루 종일 서준을 떠올리고 싶다는 유혹이 공존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 한숨 더 잘까. 서준을 계속 떠올리다 자면 꿈속에서도 서준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건 무척 매력적이다.
푹 쉬라는 사장의 말도 있고 하니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게으른 주말을 보내자는 쪽으로 마음이 잠시 기울었지만…
역시 관두기로 했다.
모처럼의 휴일이다. 그러고 있기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준비를 하라고 한 거 보면 당분간은 아마 내 개인적인 시간이 없을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뭐 비는 시간에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도 아니지만.
어쨌든 그 이후의 일까지 생각한다면 내가 평범하게 보낼 수 있는 마지막 휴일이 될 공산이 컸다,
이런 날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서준을 내 품 안으로 가져오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데에 쓰는 게 바람직하겠지.
조금이라도 더 서준 성분을 보충하여 앞으로 내 행동의 원동력으로 삼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서준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역시 혜민 그녀와 둘이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자 우울해진다.
서준이 보고 싶다.
남자의 몸이 가져다주는 쾌락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남자에게 안기면서 서준을 향한 갈망만이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럼 만나러 가볼까…
어쩐지 예감이 들었다,
그와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그야 사랑에 빠진 소녀가 이렇게나 간절히 그와 만나기를 바라는걸? 온 우주가 나서서 나와 서준이 만나도록 도와줄 게 분명하다.
뭐, 설령 그 어떤 우연도 날 도와주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그의 집 앞에서 그의 모습이 비칠 때까지 하루 종일 죽치고 있어서 자력으로 만날 생각이니까…사실 크게 상관없지만.
얼굴만 잠깐 먼 발치서 몰래 보고 돌아오자.
후후…서준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주말 내내 그가 자주 가던 장소를 돌아다니거나 그의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그를 기다린다니
어떻게 해야 이보다 더 알차게 휴일을 보낼 수 있는 걸까.
만나도 좋고 만나지 못해도 좋다.
그저 그를 떠올릴 수 있는 장소를 돌아다니며 그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보람차다.
그렇게 내 발걸음이 향한 곳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공원이었다. 워낙 외딴곳에 있는 후미진 공원이라 주말 낮인데도 사람이 거의 없다.
그야 그럴 테지…
이렇게나 볼품없는 공원이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 리가 없다. 여태껏 유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없이 특별한 장소였다.
서준과 내가 처음 만난 내 모든 것의 시작인 장소였으니까.
공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공원에 놓여있는 벤치래 봐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못 알아볼리 없는 내게 있어 이 세상 단 하나뿐인 벤치에 살며시 앉는다.
몇 년 전 추운 겨울날…
민족 대명절이라 모두가 가족들과 함께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나는 홀로 이 공원의 벤치에서 이렇게 무릎을 끌어안고 궁상맞게 앉아있었다.
도저히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더없이 기쁘고 즐거운 보금자리가 내게는 지옥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몸을 의탁할 곳도 없어서…이렇게 공원에서 늦게까지 시간을 때우다가 술에 취한 그 남자가 제풀에 쓰러져 곯아떨어질 때 즈음 들어가는 게 내 일과였다.
그럴 때 한 소년이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도 집이 싫은 거야?”
고개를 올려다보자 무척이나 잘생긴 소년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렇게 다정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내 아픔 따위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선행을 빙자하여 자신보다 불쌍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같잖은 우월감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바라지 않는 동정 따위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하다.
쓸데없는 호기심을 발휘하여 흙 묻은 발로 타인의 상처를 파고드는 짓 따위 안 해주었으면 좋겠다.
“너는 몰라.”
어차피 다른 사람들처럼 남의 속도 모르고 입바른 말이나 늘어놓으면서 사람 속을 뒤집을 게 뻔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쏘아보며 퉁명스럽게 반응한 것도 당연했다.
후후…지금 생각하면 정말 좋은 추억이란 말이지.
하지만 그 소년은…
서준은 내 그런 싸늘한 반응에도 온화한 태도를 바꾸지 않은 채 가만히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내게 무척이나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 때론 가족은 남보다 못하지. 생판 남이라면 마음이 맞지 않거나 불편하면 영원히 피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가족은 그럴 수도 없어.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상처받는 최악의 관계여도 혈연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어. 그건 이미…하나의 저주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내가 그의 말에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역시 진정으로 날 이해해주고, 날 사랑해줄 수 있는 건 서준뿐이다. 그러한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며 깊은 감회에 젖어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이런 이런, 바로 오늘, 이 장소에서 올곧게 미친 자의 마지막 관계자인 당신을 만나다니. 대체 운명은 이 늙은이를 얼마나 부려먹어야 직성이 풀리려는지요.”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을 한 늙은이가 여전히 너구리 같은 도무지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아차차,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 주십시오. 뭐, 방금 건 가벼운 농담이었으니. 저도 올해로 정년입니다. 여기엔 농땡이 피우러 왔을 뿐이에요.”
“…”
내가 그를 대놓고 무시했지만, 그는 그런 걸 개의치 않은 채 멋대로 내 옆에 앉아서 벤치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는 자기 좋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그나저나 이 나이를 먹고도 세상 돌아가는 일은 참으로 모르겠단 말이죠. 자기 아버지의 잘린 머리를 끌어안고 웃고 있던 당신이 이렇게나 어엿한 숙녀가 됐을 줄이야. TV에서 당신이 아이돌로 출연한 걸 봤을 때는 놀라서 두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툭 던지듯이 싸늘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런 건 아버지가 아니야.”
하지만 그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차 실례, 의부였죠.”
후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서준을 추억하기만 하는 속 편한 휴일을 보내기는 아무래도 글른 것 같단 예감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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