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제22 화 이별로의 카운트다운
* * *
두근…두근…
두근…두근…
혜민을 와락 끌어안은 서준의 귀로 자신의 것인지 혹은 혜민의 것인지 모를 심장 고동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심장 소리를 이렇게나 가까이서 듣는 건 그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품에 쏙 얌전하게 안겨있는 그녀에게서 그녀의 체취가 났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그 어떤 미약보다도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극상의 살내음이었다.
허억…허억…
허억…허억…
그녀를 안고 있는 서준의 숨이 점점 거칠어진다.
팔만사천 개의 번뇌라는 진흙 속에서 그녀를 안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일념이 연꽃이 되어 피어난다.
시온에 울리는 함성 같은 기세로 그녀를 향한 터질듯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은 것까지는 일사천리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막히고 말았다.
서준은 그다음이 망설여졌다.
물론 당장이라도 그녀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몇 종류 안 되는 얇은 천 쪼가리들을 찢어내서 그녀를 알몸으로 발가벗기고 싶다.
그 뒤 자기 안에 존재하는 이성과 도덕 따위 전부 날려버리고 천박한 짐승으로 전락하여 개처럼 질펀한 섹스로 알몸이 된 그녀를 더럽히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둘이서 세상과 단절한 채 이 좁은 모형 정원 안에서 일 년이고 십 년이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서로의 몸을 섞으면서 한평생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 그의 등을 떠밀어준 건 혜민이었다.
그녀는 몸에서 힘을 빼고 자신의 몸을 완전히 서준에게 맡겼다.
오늘 그에게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전부 받아들일 각오를 했다.
아니, 그녀에게 그런 각오 따위야 진즉부터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마음 씀씀이를 모를 서준도 아니었다.
여자가 여기까지 해준 거다. 그것도 혜민이라는 만인의 아이돌인 그녀가 단 한 남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준 거다. 여기서 멈추면 남자가 아니었다.
서준도 남자였다.
그것도 그 어느 때보다 불끈불끈한 나잇대의 남자였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하루에도 열 번 스무 번 1년 365일 그녀를 안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그는 지금 멈췄다. 갈등했다.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의 형태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고 거기에는 정답이 없다.
그렇지만 그의 사랑은 그중에서도 참사랑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몇 종류 안 되는 지고지순한 것이었다.
그녀의 몸을 사랑하는 것도, 그녀의 사랑을 사랑하는 것도 아닌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했으니까.
그 어느 순간에도 그녀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다. 필요하다면 그 어떤 악행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여기서 그녀를 안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허억…허억…
서준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됐다.
그동안 그는 실로 오래도록 참아왔다.
연애와 학업을 병행한다. 누구나 한번 즈음은 동경할 정도로 정말 멋지고 달콤한 말이다. 연애가 학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도 많다.
가능만 하다면 최선의 선택이다. 그보다 건강한 관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그래, 가능만 하다면…….
하지만 서준에겐 그게 불가능했다.
서준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는 스스로를 싫을 정도로 너무나도 잘 알았다.
아니, 그녀에 대해 정확히 알았다.
극도로 아름다운 여인은 하나의 나라조차 위태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에게 혜민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세계.
그에게 있어 혜민은 세계조차 뒤흔들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였다.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자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의 젖과 꿀을 맛보고 한번 그녀에게 빠져들면 일상으로 헤어나올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지금 이 순간의 뜨거운 정염도 물론 소중하다. 아니, 더없이 소중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평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한 둘도 없이 소중한 여자.
지금 이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소중한 감정이지만 두 사람의 미래가 그보다 더욱 중요했다.
그래서 거리를 뒀다.
작은 떨어짐으로 한평생 같이 있기 위한 길을 택했다.
창자가 끊어지는 심정으로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길을 걸어왔다.
비록 그녀와 비교하면 개자씨 한 알만도 못하게 여겨질 정도로 초라하지만 적어도 그 자신의 손으로 그녀와의 생활을 책임질 수 있게 될 때까지는…….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했다.
그동안 불안해서 미칠 것만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녀가 몸 담그고 있는 연예계는 완성된 자들만의 세계였다.
풋내기인 자신과는 다르게 이미 원숙한 열매를 맺은 매력적인 남자들이 발에 차이도록 넘치는 하늘 정원이었다.
그들이 그녀를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물론 그녀를 믿고 있기에, 그녀의 인격을 잘 알고 있기에 그녀가 그녀를 향하는 그 어떤 유혹에도 넘어갈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시야 밖에서 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접근하는 것 자체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후회한 적도 많았다. 이렇게 후회할 바에는 그녀 곁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며 후회한 적도 많았다.
허억…허억…
이제 그런 건 싫다.
그녀의 온몸을 찬찬히 맛보고 싶다. 아니, 빼앗고 싶다.
세간의 시선을 피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외딴곳으로 가서 그녀의 몸과 마음 그 모든 걸 빼앗고 그녀의 안을 자기 자신만으로 채워 넣고 싶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정액으로 절여놓고 모공 하나하나에 자신의 정액이 스며들게 하고 싶었다.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그저…
그저………………
그녀와 나 사이에 놓여있는 육체라는 벽을 부숴버리고 당장이라도 그녀와 영혼까지 하나로 이어지고 싶을 뿐이다.
연인을 가진 남자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품게 되는 너무나도 평범하면서도 그 무엇보다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그가 자각하고 인정한 순간 서준의 품 안에서 혜민은 평범한 소녀가 되었다.
이 순간 서준의 안에서 수미산이 한 알의 개자씨가 되었다.
그리고 개자씨에서 자라난 나무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드는 내적 성숙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새로이 깨달은 게 아니었다.
그의 본래 모습이었다.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차별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혜민 역시 그에겐 다른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힘든 일은 힘들고, 슬픈 일은 슬픈 평범한 소녀였다.
그에게 있어서 혜민이란 소녀는 지닌바 재주가 너무도 뛰어나서 주위로부터 의지 받기만 하고 그녀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소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고독한 그녀의 안식처가 되고 싶었고, 혜민 또한 그런 서준 앞에서는 평범한 소녀가 되어 평범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는 팔에서 힘을 빼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며 그녀에게서 살짝 몸을 떨어뜨린다.
혜민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거기엔 더 이상 모든 오만한 남자들 위에 군림하는 여왕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평범한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품에 안겨 그에게 몸을 맡긴 채 애타는 시선으로 연인을 바라보고 있는 사랑스러운 소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과 있을 땐 이랬다.
자신의 별거 아닌 일에도 웃어주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응석을 부리고 정말이지 평범한 소녀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아아…스스로 벽을 치던 건 나였던가. 그녀가 나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범한 소녀로 있을 수 있는 영원의 안식처가 되길 자처했으면서…자신만큼은 언제까지나 그녀를 평범한 소녀로 대하겠다고 다짐했거늘.’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주눅 들었었단 말인가.’
어쩌면 꼴사납게도 그녀에게 열등감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남자보다 뛰어난 여자와 사귀는 걸 고통스러워하는 남자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건 자신보다 여자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받기보다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는 자신의 한심함에 화가 난 거다.
그녀가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게 없는 못난 자기 자신이 미운 거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못나더라도 말이다.
그저 곁에만 있는 거로는 부족한 걸까.
이제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말아야겠지.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지상이라는 동굴의 벽에 일렁이는 여신의 그림자 따위가 아니었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인 아이돌로서의 신혜민이 아니라, 자신의 연인인 평범한 소녀 신혜민에 불과했다.
서준은 혜민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첫 경험은 남자에게도 특별하지만, 여자에게는 더욱 특별하다. 살면서 단 한 번뿐인 상실의 아픔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분위기에 몸을 맡기고 그녀와 구름과 비가 만나는 정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그녀에겐 역시 첫 경험으로 최고의 추억을 선사하고 싶다.
자신과의 첫 경험을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
서준은 그녀의 입술에 새가 쪼듯이 닿을 듯 말 듯 가볍게 입맞춤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어낸 뒤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선배, 저 선배와 비교하면 한없이 볼품없지만, 이번에 기업에 내정 받았어요.”
혜민이 서준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면서 당장이라고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아냐. 볼품없지 않아. 절대 볼품없지 않아. 많이 노력했구나.”
아직 졸업까지 1년이나 남은 서준이었다. 그런 그가 벌써 기업에 내정 받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을지 혜민은 잘 알 수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여자를 위해 잠을 아끼면서 노력한 거다. 볼품없다고 여길 리가 없다. 사랑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선배, 이번 크리스마스 때 선배의 모든 걸 제게 주실 수 있을까요?”
자신을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똑바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든 걸 원한다고 말하는 서준의 얼굴을 보며 혜민은 한순간 숨을 삼켰다.
남자는 삼일만 안봐도 몰라볼 정도로 변한다고 했는데, 서준이 한순간에 몰라볼 남자로서 정도로 성숙해진 게 느껴졌다.
자신의 연인이 비록 조숙하긴 하고, 때때로 자신보다도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보다 연하의 소년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완전히 남자가 되어있었다.
그녀도 모르게 새삼 가슴이 뛰고 서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 부끄러워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기쁨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그에게 힘차게 답했다.
“응! 줄게. 반드시 내 모든 걸 너에게 줄게.”
…
단언컨대……
그는 틀리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하지만……………………………
이날 서준과 혜민이 나눈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은 영원토록 없었다.
서준이 혜민의 방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황혼의 어스름으로 저녁놀이 불길할 정도로 붉게 물들어 가던 때였다.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고 있던 서준은 교차로에서 한순간 든 오한에 깜짝 놀라 몸서리치며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천 개의 바늘이 온몸에 구멍을 뚫고 지나간 것만 같은 서늘한 감각이었다.
당장이라도 차가운 총구가 뒤통수에 겨눠진 것만 같은 감각에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아본 그는 자신이 너무도 황당한 착각을 한 것만 같아서 허탈해진 나머지 허무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거기에는 그리운 얼굴이 있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소녀가 마치 혜민이 자신을 볼 때와 비슷하다고 한순간 착각할 정도로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바로 송나은이었다.
그가 송나은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인사를 하기 전에 송나은이 그에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잘 지내는 것 같네.”
“아아…그러는 너도.”
“그러게, 서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며 나은은 서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더 없이 따스하고 온화한 미소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