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럽혀진 아이돌-17화 (17/136)

〈 17화 〉 제16 화 사랑의 형태

* * *

그녀가 내 방에서 나간 뒤 스르륵 문이 닫힌다. 동시에 나 역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문…잠가야 하는데…….’

그런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속 편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 자리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나는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

그녀를 향한 서운함과 울분이 시차를 두고 이제야 터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어떻게 내게 이렇게 잔혹할 수가 있나.

하지만…그런 것이다. 그녀가 딱히 나쁜 게 아니다. 그녀가 딱히 내게 매정한 게 아니다. 인간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다. 이로움을 추구하도록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 그 정도가 지나쳐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대로 움직이는 거에 선과 악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굳이 나쁜 걸 찾아야 한다면 바로 나. 원망하려거든 그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원망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쓱쓱 닦아낸다.

나는 이제 그녀가 없는 나날을 살아가야 한다.

어두운 망망대해에서 나침반 없이 홀로 떠도는 배가 된 거 같았다. 그녀라는 등대를 잃은 내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흐르는 눈물을 빛나는 용기로 바꿔야겠지.

그다지 자신은 없지만…….

베개를 적시는 사랑의 눈물을 그치는 게 쉬웠다면 베르테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을 게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한참을 무기력하게 지냈다. 상상 이상으로 그녀의 빈자리가 커서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가족들과도 모든 연락을 끊고, 편의점에 나갈 때가 아니면 방에만 틀어박힌 생활.

그렇다고 방안에서 창작에 몰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니…

어두운 방 안에서 낮이든 밤이든 불도 켜지 않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냈다.

문뜩 그녀가 웃고 있는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그때만이 내가 살아있는 순간이었다. 그 이외에는 언제나 죽어있었다.

그렇게 죽은 듯이 지내던 내가 다시 무언가라도 해야겠다며 삶의 의욕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뒤였다.

밤낮을 구별하는 게 의미 없어질 때 즈음이었다.

언제나처럼 거리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슬슬 뜸해지기 시작하는 늦은 밤에 일어난 일이다. 자주 애용하던 편의점에 질질 발걸음을 끌며 가던 나는 거리를 가득 메우는 익숙한 목소리에 절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한순간 심령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이 목소리는…

내가 잘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1년간 한 번도 못 들었지만, 이렇게 눈을 감고 살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바로 곁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귀에 생생하다.

너무도 그리운 목소리.

그녀가 부르는 노래가 온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가게를 하나 지나쳐 갈 때마다 그녀의 노래가 돌림노래처럼 계속해서 들려온다.

아까 전 지나갔던 가게에서 그녀의 노래가 끝나갈 때 즈음에는 내가 이제 막 눈앞에 둔 가게에서 그녀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 호프집이 밖에서도 볼 수 있도록 실내에 걸어둔 커다란 TV에서 그녀가 노래하고 있는 무대가 나오고 있었다.

값싼 편의점 도시락으로 대충 끼니나 때우려던 원래 계획 따윈 깡그리 잊어버린 채 홀린 듯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차가운 생맥주와 가벼운 안주를 주문한 뒤 멍하니 그녀의 무대를 봤다.

‘정말이지…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군. 다행이야…….’

화면 속에서 그녀는 그녀와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함께한 나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워져 있었다.

‘너는 실로 아름다운 나비가 되었구나.’

단순한 재능이 꽃핀 게 아니었다.

사랑을 하고 있어서일까…

진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뿐 아니라 호프 안에 있는 전원이 손을 멈추고 그녀에게 홀린 모습을 보며 내 일처럼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분하기도 했다. 너무도 분했다.

솔직히…

솔직히…이 순간까지 마음 한구석에서 어느 정도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녀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는 줄곧 냉정한 현실을 마음 한구석에서 외면하고 있었다.

나약한 나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었다.

나를 떠난 그녀가 잘못되기를…

그리고 상처 입은 그녀가 다시 내게 돌아오기를…

나는 그녀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녀에게 길들어져 있었건만 그녀는 내가 없어도 저렇게나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드디어 실감했다.

‘아아…그녀는 이제 정말로 내 손에서 떠나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구나.’

‘그녀에겐 이제 내가 정말로 필요 없구나.’

후…

잔에 남아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한입에 들이킨 다음 탁자 위에 조용히 내려놓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얽매여 있을 수도 없겠지.

그녀로부터 졸업하는 게 가능할 거 같진 않지만…

적어도 언젠가 먼 훗날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은 남자는 되고 싶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새로운 출발을 하는 의미로 기분전환을 겸해 방 정리부터 하기 시작했다.

뭐…정리할 거라곤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그동안 그녀를 위해 썼던 악보들과 관련 서적들뿐이지만.

‘이젠 필요 없겠지…….’

이제 작사나 작곡은 두 번 다시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면 내겐 의미도 없고.

가지고 있어봤자 씁쓸하기만 할 테니…전부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마지막 남은 한 가닥 미련일까.

그녀를 위해 마지막까지 쓰고 있던 곡.

도중에 막혀서 끝내 완성하진 못했던 곡 단 하나만은…어째선지 버릴 수 없었다.

후…

‘이거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나는 미완성의 악보 하나만을 고이 접어 상자 속에 간직한 채 나머지는 전부 처분했다.

공원 한쪽 구석에서 악보를 한 장 한 장 태운다.

활 활 타는 악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딱히 없었다.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녀가 하고 싶은 걸 도와주는 것이었다. 굳이 바라는 게 있다면 그녀가 꿈을 이룰 때 내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정말 소소한 바람 정도였다.

그렇다면 내가 잘하는 건 무엇일까? 이것도 딱히 없었다. 그녀가 부를 노래는 내가 작곡 작사하고 싶어서 그동안 그 둘에만 몰두했으니까.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작업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무엇보다도 이미 이쪽에선 철저하게 깨졌기 때문에 눈길도 주고 싶지 않았다.

피아노도 마찬가지.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연주하고 싶지 않았고…

...

정말 난 재미없는 인간이군.

대체 그녀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그녀를 뒷바라지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그녀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었나 보다.

내 장점이라…

내가 잘하는 거…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공부를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다고 말솜씨가 좋은 것도 아닌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었다.

그런 게 나한테 있는 걸까?

어라…혹시 나 완전 글러 먹은 인간인 게…

필사적으로 자신이 잘하는 걸 떠올리려고 머리를 굴려본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나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닌 그녀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녀가 웃고 있는 얼굴만이 떠오른다.

그리고…조금 전 무대 위에서 내가 지금까지 봤었던 그 어떤 연예인보다 더욱 밝게 빛나고 있던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내가 그래도 여자 하난 잘 봤군.’

비록 보답 받지 못한 사랑으로 끝났지만, 그녀는 내가 인생을 건 것이 후회 없을 여자였다. 그녀에게 인생을 걸었던 사실에 자부심까지 느끼게 해주는 훌륭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과연…그런 건가…….’

‘나는 또 너에게…마지막까지 이렇게나 받기만 하는구나.’

그녀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그녀에게 심취해서 줄곧 그녀 곁에 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말해주던 꿈을 이뤄 이렇게나 훌륭한 가수가 되었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여자다.

그 사실만큼은 내게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내 안의 유일한 불변의 진리.

‘아아…나도 잘하는 게 있었잖냐. 세계 최고의 여자를 제일 먼저 찾아낸 나다. 여자 보는 눈만큼은 확실하단 거겠지.’

그녀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은 그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빛나게 되는 것,

보답 받지 못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보답 받았다.

그래, 남녀 관계의 종착점이 꼭 애인이나 결혼일 필요는 없다.

서로에게 있어서 최선인 상태가 있다면 그거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게 나와 그녀의 사랑의 형태인 거겠지.

그녀는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을 우리의 꿈을 이룸으로써 훌륭히 증명해내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을 증명할 차례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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