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제15 화 유년기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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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오만가지 추억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그녀는 나의 태양, 언제나 앞장서서 내 손을 잡고 이끌어주던 나의 태양이었다.
그녀는 어느 한 가지에 푹 빠지면 다른 걸 잊고 그 하나에만 몰두했는데, 그건 그녀의 장점이자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단점이었다.
목표로 정한 것 하나에만 모든 주의를 쏟기 때문에 정작 그녀 자신에게 소홀해진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야무지지만,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은근히 덜렁이일 때가 많은 그녀였다.
나를 남자로 의식하지 않고 편한 동성 친구 즈음으로 여긴 거겠지.
그건 좀 ‘여자로서 어떨까?’라는…
그녀에게 푹 빠져 그녀의 어지간한 행동은 전부 어여쁘게 보이는 내가 봐도 참으로 여자로서 안타까운 모습도 종종 보여줬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는 보여주지 않고, 나에게만 보여주는 모습.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난감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항상 위태로운 그녀를 챙겨주고 보살펴주었다.
특히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젓가락질이 매우 서툴렀는데, 젓가락질이 서툰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와 같이 한 달이 넘게 나무젓가락으로 콩을 한쪽 접시에서 다른 접시로 옮기는 젓가락 훈련을 곁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그녀는 달고 상큼한 것을 좋아하는 다른 여고생들과는 다르게 비린내가 나는 고등어조림을 무척 좋아했는데, 여전히 젓가락질이 서툴러서 그녀가 고등어조림을 먹으러 갈 때는 꼭 나를 데리고 가서 나에게 생선 가시를 전부 발라달라고 부탁했다.
고등어는 비교적 가시를 발라내기 쉬운 부류에 속하는 생선이지만, 그래도 잔가시가 많은 갈비뼈 부분을 깔끔하게 발라내는 건 내게도 꽤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시를 제거한 후 그녀의 접시에 놓은 고등어를 그녀가 맛있게 먹는 걸 보기만 해도 나는 흐뭇해져 내 몫으로 나온 고등어까지 그녀에게 넘겨주곤 했다.
방학 마지막 날에는 언제나 아침 일찍부터 나를 찾아와서 곤히 자는 내 몸을 흔들어 억지로 깨운 다음에 밀린 숙제를 도와달라고 내게 조른다든가, 같이 고깃집에라도 갈 때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고기를 구웠다.
고기를 굽는 건 몇 토막 안 되는 생선 가시를 바르는 것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엄살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은근히 팔도 아픈 귀찮은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한창 고기를 굽고 있을 때 그녀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자, 아~ 해봐.”라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한 점 집은 다음 내게 먹여줄 때는 고기를 굽는 수고로움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었다.
물론 이렇게 소소하면서도 훈훈하고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따스해지는 추억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실용댄스를 혼자 배우러 다니기 외롭다면서 실용댄스 교실에 내 이름까지 그녀가 멋대로 함께 등록해 버린 적이 있었다. 몸치였던 나는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그녀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실용댄스 교실에 그녀가 질릴 때까지 다니게 되었었다.
가뜩이나 대다수가 여자들인 곳에서 혼자 붕 떴는데, 어색하게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여자들이 추는 섹시 춤을 따라 해야 했는지라 그때는 정말 난처했었다.
뭐, 그것도 결국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며,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체념한 채 열심히 다녔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디서 무슨 이상한 영향을 받은 건지 혼자 자아를 찾는 여행을 떠나겠다며 겨울 산에 올랐다가 조난을 당한 그녀를 밤새도록 찾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이렇게 돌이켜보니 내 인생은 항상 그녀에게 끌려다니며 휘둘리기만 했군.
그렇지만…딱히 불만족스러운 인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내게 그동안 줄곧 그녀와 함께 있어 준 답례로 처음만큼은 내게 주고 싶다고 말했지만…
내 곁에서 언제나 밝게 웃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를 향한 그녀의 아무런 사심 없는 천진난만한 미소.
‘이래서야…타산이 맞지 않는군.’
오히려 내가…내 쪽이 그녀에게 받은 게 너무도 많다.
거스름돈이 부족할 판이다.
아마 이 선택을 평생 후회하겠지만…
놓아주어야겠지.
그것도 가급적 웃는 얼굴로…
알고 있다. 알고 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내게 남아있는 건…
내가 이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녀의 사랑을 축복하는 일뿐.
그런 건 내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하지만 역시 싫다.
싫다.
그녀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의 것이 된다니. 이대로 돌아가서 다른 남자에게 안겨 사랑을 속삭이며 그를 받아들인다니.
상상만 해도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내가…평생 동안…얼마나 곁에서 애지중지해온 그녀였는데, 다른 남자가 그녀의 몸을 갖게 된다니…
그런 거 남자라면 맨정신으로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미래, 애써 외면해왔던 가능성…
그녀가 내 곁에 없는 나날을 상상하고 만다.
언제나 멀리서 날 먼저 발견하고는 주위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내 이름을 크게 불러주던 그녀.
그녀의 작고 아름다운 입술이 이제는 내 이름이 아닌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는 그동안 그녀와 가장 가까운 남자였던 내게만 보여줬던 아니, 나조차도 볼 수 없었던 여자의 얼굴을 하고 기쁘게 다른 남자를 반기는 장면을 상상하자 팔다리가 뜯겨 나가는 것만큼 고통스러웠다.
특히 그녀를 줄곧 곁에서 지켜봐 온 나는 알고 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마음을 놓은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응석 부리기를 좋아하고, 자기 멋대로 휘두르기를 좋아해서 그녀와 사귀면 그녀의 뜻을 받아주느라 남자가 굉장히 피곤함을 느낄 수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녀는 무언가 하나에 푹 빠지며 그것 하나에 모든 걸 쏟아붓기 때문에 자기 자신마저 소홀히 하는 여자다. 그런 그녀가 진심으로 남자에게 빠지게 되면…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남자에게 온몸과 정성을 다 바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요구하면 그 무엇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성벽이라면 그 어떤 부끄러움도 참고 남자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지. 굉장히 서툴지만 성심성의껏 남자에게 봉사하고, 그에게 격렬하게 안기며 쾌락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떠올린다.
심장이 멎는 것만 같다.
동시에 야비한 계산을 끝낸 내 마음은 악마가 되어 나에게 속삭인다.
그럴 바에는…
그녀가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더럽혀질 바에는…
차라리…
차라리…
내가…!!!!
속으로 절규한다.
하하하…
대체…그게 머 어쨌단 거냐. 좋아하는 여자에게 그동안 상냥한 것? 냉정히 얘기해서 그 정돈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거다. 그저 착하기만 하다? 자상하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준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잘해준다. 그딴 건 살인마조차 쉽게 할 수 있는 거다. 그 어떤 쓰레기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겐 한없이 상냥해질 수 있다.
그것만으론 안된다.
마음만으로는 안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진정으로 그녀가 필요로 하는 걸, 원하는 걸 내가 이루어줄 수 있는가…
그녀의 재능을 내가 빛나게 해줄 수 있는가?
그 답은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벽에 머리를 찧는다.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무언가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꼴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겠지.
그렇지만…
이 짧은 한순간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후우…
깊은 한숨을 쉬며 눈을 한번 질끈 감는다.
마음을 다잡은 후 눈을 뜬 나는 구석에 그녀가 가지런히 벗어놓은 옷을 들고 와 그녀에게 건네주며 간신히 말했다.
“행복해야 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가 건네준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미안.”
이라고 작게 중얼거린 뒤 방을 나섰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언제나와 같은 밝은 미소로 날 향해 말했다.
“고마워, 너도 행복해야 해.”
“아아…”
무리해서 화제를 꺼내지 않아도,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녀 곁에 있기만 해도 마냥 행복했던 그 나날들은 이제 돌아오지 않겠지.
그래도…
만족한다. 이걸로 된 거다.
적어도 그녀를 마지막까지 울리진 않았으니.
내 추억 속에서 그녀는 언제까지고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내 이름을 불러줄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