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제14 화 젊은 날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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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렉스 엔터테인먼트의 사장 강성우는 자신의 품 안에서 녹초가 되어 알몸으로 곤히 자는 송나은을 지그시 바라보며 깊은 감회에 젖어있었다.
‘이렇게 여자를 안으면서 만족스러웠던 적이 언제였던가.’
이 업계에 몸을 담근 지도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저마다의 개성과 재능을 가진 많은 소녀들이 자신을 찾아왔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의심치 않고 마음속에 찬란한 씨앗을 품고 있는 소녀들. 자기들이 있던 곳에서 하나같이 내로라하던 소녀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싹이 돋되 피지 못하였다.
피었어도 끝내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연예계란 여자들의 잔혹한 무덤이었다.
송나은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평범하디 평범한 소녀. 개화(?花)의 편린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소녀.
그것이 송나은이었다.
물론 지극히 평범하단 건 비범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개성이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만들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만 그녀에게선 패배자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세상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온 것도 그저 무언가로부터 눈을 돌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친 끝에 왔다는 게 피부로 전해졌다.
다른 중역들이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이곳에 찾아오는 무수한 경쟁에서 승리만을 해온 검증된 소녀들을 놔두고 패배자에게 시선을 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과거의 내 모습을 겹쳐봤으니까.
송나은은 이미 죽은 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건 평생을 노력해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재능을 접하고 자신에게 끝없이 절망한 사람의 눈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잘것없는 자기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는 죽은 눈동자 안쪽 저 깊은 곳에는…
그렇기에 바뀌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의 자신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걸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부조리도 받아들일 수 있다.
비슷한 절망을 맛보고 지금도 그 열등감을 마음 한편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그걸 알아볼 수 있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줄곧 함께였던 한 소녀를 떠올린다. 목소리가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귀여운 외모와 더불어 밝고 모나지 않은 성격.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가끔 한쪽 구석에서 그런 그녀를 몰래 바라보며 무척 눈부시다고 생각했었다.
반의 중심이었던 그녀는 그 상냥한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집이 근처라는 단순한 이유였을까. 반에서 겉돌던 나를 종종 챙겨 주었는데, 내가 유치원 끝나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우리 집에 수시로 놀러 와서 내게 피아노를 쳐보라고 졸랐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터라 그렇게 잘 치는 것도 아니라 다른 사람 앞에서 치는 게 무척이나 부끄러웠지만, 나는 겉으로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무척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의욕만 앞선 어수룩한 연주. 아니, 연주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그저 건반을 누를 뿐인 단순한 행위.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서툰 피아노를 정말 기쁜 표정으로 언제나 끝까지 들어주었다.
단순한 기본 동작만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시기라 무척 지겹게 느껴지던 피아노가 즐겁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같은 초등학교에 진학한 우리는 유치원 때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새 학기 첫날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딱히 소개할 것도 없는 난 무난하게 이름을 말한 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무뚝뚝하게 한마디 덧붙인 다음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훗날 세계적인 여가수가 될 여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를 잘 모르는 다른 아이들은 한바탕 웃고 그녀의 말을 흘려넘겼지만, 나는 그녀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녀에게 용기를 내서 말했다.
“나 작곡가가 될게. 네가 노래할 곡을 내가 썼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나를 와락 끌어안으며 내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그녀도 조금 부끄러웠는지 배시시 웃으면서도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주었다.
“기뻐. 기대할게. 같이 무대에 서자. 네가 쓴 곡을 내가 부르고, 네가 연주하고.”
“으…응”
하지만…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재능에 반하고 만다. 몸도 마음도 이끌리고 마는 것이다.
나와 그녀가 밴드를 결성한 뒤, 그녀가 아직 유명세를 타기도 전이었다. 한 남자가 그녀라는 원석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접근해왔다. 한창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유명 프로듀서였다.
그리고…날 배려해서 내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매료된 곡들을 쓴 천재 작곡가였다.
그는 그녀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봤었고, 그녀는 진즉에 그의 재능에 반해있는 상태였다. 그저 계기가 없었을 뿐.
비범한 두 남녀가 만난 순간 서로의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두 사람과 달리 평범한 내가 소외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곳에 있어도, 같은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함께 있는 시간은 여전했지만, 나는 고독을 느꼈다.
대화를 따라가기조차 버겁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감성을 내가 알기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없다. 그녀 하나만을 위해 내가 몇 날 며칠을 밤을 새가며 작곡을 해도 그가 장난삼아 즉석에서 양산한 멜로디만도 못하다.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아아…세상에는 있구나.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는 진짜 천재라는 게…….’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같은 곳을 보는 것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
그녀가………………………………………………………………………………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하지만…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도 해줄 수 있었다. 오히려 더 잘할 뿐 아니라, 내가 못하는 것까지 그녀에게 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그런 건 사소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할 테지. 실제로 그녀는 이런 생각 따위 하지 않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나 스스로 그녀에게서 멀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무엇이 진정으로 그녀의 행복을 위하는 것인가?
그녀를 줄곧 사랑해온 남자로서…
그리고 그녀의 재능을 바로 곁에서 줄곧 지켜봐 온 그녀의 팬으로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시름을 달래기 위해 밤늦게까지 혼자 익숙하지도 않은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신 날이었다. 술기운에 몸을 맡기고 몽롱한 기분으로 비틀거리며 쓰다가 내던진 악보로 엉망이 된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문은 열려있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서 와, 오늘 꽤 늦게 왔네.”
내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술기운이 전부 날아갔다. 그녀였다. 어째선지 그녀가 늦은 밤에 내 방에 와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내가 술에 취해 헛것을 보고 있는게 아닌가란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녀는 속옷 차림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은 채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속옷만을 입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서……?”
내가 의문을 입에 담자 그녀는 내 의문에 답하지 않은 채 내게로 살며시 다가왔다.
그리고 날 부드럽게 안아준 뒤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애썼구나…. 이렇게나…나를 위해서…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그녀의 말을 들으며 눈물이 흘러내리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녀가 알아주었다. 내가 얼마나 그녀를 위하는지 알아주었다. 그것만으로 지금까지의 내 외로움과 슬픔이 전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초개처럼 버릴 수 있다.
그녀가 내게서 살짝 떨어진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그 사람과 앞으로 평생 함께하려 해.”
그게 누구인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처음은…너에게 주고 싶어서 찾아왔어. 지금까지 줄곧 내 곁에 있어 준 너에게.”
어쩐지 이렇게 되리라 예감하고 있었다. 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원망스러웠다. 미웠다.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내가…내가 전부 못났기 때문이다.
온 세상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아니할 때에 그녀만이 나를 사랑해주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의 사랑을 사랑한다.
그러니 나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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