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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혀진 아이돌-1화 (프롤로그)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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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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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마음속에 나약함을 품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거기에 지지 않을 강인함 또한 가지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믿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지만…….

지금부터 내게 일어날 역겨운 일…….

아니, 내가 하고자 하는 구역질 나오는 일을 앞에 두고 나답지 않게 잠시 감상에 젖었나 보다.

또각, 또각, 또각

늦은 밤.

인적도 없는 어두운 보도 위로 내 구두 소리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또렷하게 울려 퍼진다.

한 걸음, 한걸음……

천천히 몸을 질질 끌다시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를 여기까지 몰리게 만든 갖가지 상념들이 떠오른다.

과거, 나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여자였다.

나 스스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신감 없는 건 똑같아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적어도 남이 나를 보면 무척이나 달라졌다고 생각할 거다. 특히 과거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대부분 못 알아보겠지.

그래,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으니.

어쨌든 과거에 나는 딱히 존재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남자와 인연도 없었다. 연애에 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딘가 나와는 상관없는 아주 먼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구애의 대상이 된다는 건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고, 나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강하게 원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체념하고 있었다는 말이 더 어울리리라.

그런 나였지만진심으로 한 남자를 원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고,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사랑스러워지고 싶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작도 하지 못했었다.

그거까지는 상관없었다.

이미 그에게는 같은 여자가 봐도 질투가 날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녀가 있었으니까.

남자와 얘기할 때 눈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던 소심한 나와는 다르게 남녀 모두에게 의지가 되면서도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봉사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그런 완벽한 여성이 애인이었으니까.

그녀가 나보다 그에게 어울리는 건 내가 그를 포기하는 데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정말 중요하고, 그리고 날 슬프게 만든 것은 그녀가 나보다 그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게 분명했단 점이었다.

그저 내가 실연의 아픔을 피하기 위한 비겁한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 마음을 우선하기보다는 그를 난처하지 않게 하고, 또 그의 행복을 위하는 게 내 사랑이라고 자기 자신을 세뇌했다.

그런 식으로 내 상처를 스스로 핥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가까워지고 당장이라도 몸과 마음이 하나로 연결될 것만 같은 두 사람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걸 상상하자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친구로라도 그의 곁을 서성이고 싶었지만, 이대로는 두 사람을 저주할 것만 같아서……, 내 사랑이 질척하고 추하게 변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뺨을 타고 흘러내리려는 서러운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고 웃으면서 두 사람의 미래를 축복한 후 조용히 그의 곁에서 사라졌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곁을 떠나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머지않아 괜찮아 지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짝사랑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는 게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이라는 걸 그동안 몰랐기에 더욱 마음의 허전함이 컸다.

그럴싸한 아무 남자나 골라잡고 그에게 안기며 그의 품 안에서 위로받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내게는 불가능했다.

첫사랑인 그 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허락한다는 걸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이미 내겐 마지막 사랑이었다.

그렇더라도 도저히 치유되지 않는 외로움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누구 한 사람의 여자가 될 수는 없지만, 대신 많은 사람들에게 얕은 사랑을 받자. 얕은 사랑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받으면 조금은 이 허전함이 채워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변하고 싶었다.

내가 만약 그의 애인인 신혜민, 그녀처럼 멋지고 아름다웠더라면, 그의 곁에 다른 여자가 있든 말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누구보다도 내가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내게 있었다면 당당하게 그의 마음을 쟁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가

그리고 같은 여자에게 가지는 열등감과 동시에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는 동경이 나를 무리해서라도 연예계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못난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한동안은 두 사람 앞에 나서지 못하겠지만, 아이돌로서 성공하면서 나도 나 나름의 행복을 찾게 된다면, 그때는 나도 진정으로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조금 씁쓸하겠지만, 그런 미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런 훈훈한 미래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나름 아이돌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어째서 신혜민 너는 그거로 만족하지 못한 거야?

아무리 내가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으면서…왜 그거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그걸 손에서 놓고 연예계에 뛰어든 거지?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그와 그녀로부터 도망친 끝에 간신히 찾아낸 내 작고 초라한 정원에 그녀가 멋대로 들어온 것이.

그러나 무엇보다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연예계에 발담기 위해 비록 형식적일지언정 서준과 헤어진 것이었다.

나였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서준과 헤어지는 척만 해도 톱스타 자리를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해도 나는 눈길도 안 줄 것이다. 어쩌면 화를 참지 못하고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한 사람의 뺨을 그 자리서 있는 힘껏 때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를………,

아니, 지금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나 자신보다도 사랑하고 있는 남자를 우선순위에서 내리다니, 복에 겨운 그녀가 너무도 증오스러웠다.

정말이지 죽이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원래부터 모든 면에서 완성되어있던 그녀는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도달하게 되겠지.

그녀에게 나는 이번에도 모든 것을 빼앗길 것이다.

지고 싶지 않아.

그녀에게만은 절대 지고 싶지 않아.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어.

내 몸이 아무리 더러워지더라도 상관없다.

그녀에게 지지만 않을 수 있다면…

각오를 다지자, 더럽혀질 각오를.

그리고

내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남자까지 망가뜨릴 각오를…

하지만…괜찮아…

그는 그 누구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망가지더라도, 그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되더라도

나만큼은 처음과 변함없는 마음으로 그의 곁에 남아 그에게 몸과 마음을 바칠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다른 여자가 아닌 내가 그를 행복하게 해주자.

이건 그 첫걸음.

그러니 더는 망설이지 말자.

어느새 거대한 저택 앞에 도착한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눈앞의 초인종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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