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6화 〉 2번째 번외편: 왕의 게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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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한은 투크 가문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에스메랄다를 새로운 가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자격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투크 가문의 총사령관으로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에스메랄다야말로 누구보다도 후계자로 어울릴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치명적인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하프 자이언트라는 것.
[말세군, 말세야. 이종족 혼혈이 세경가의 가주가 되다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어.]
[후계자에게는 단단히 실망했네. 예전부터 귀족 알기를 우습게 생각한다고 의심했지만 이제 보니 위아래를 구분하지 못하는 애송이였군.]
인간 국가의 귀족 가문은 인간이 이끌어가야 한다는 낡아빠진 사고방식.
딱히 법으로 정해져 있는 규칙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암묵적인 불문율이 왕국 전체에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종족의 피를 물려받고도 가주의 지위에 오르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몇 세대를 걸쳐서 평범한 인간하고 구분할 수 없을 정도면 가능하다.
그마저도 조상 중에 천한 이종족의 피가 섞여 있다고 죽을 때까지 손가락질당하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에스메랄다가 2인자는 될 수 있어도 가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유였다.
덕분에 가뜩이나 불만에 차 있던 기득권 세력들은 단단히 삐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모두 뒤에서 수군거릴 뿐이지 대놓고 티를 내는 사람들은 없었다.
리한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에스메랄다에게 약속한 대로 그녀의 가주 취임에 반대하는 세력을 전광석화처럼 평정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집안의 후계자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수완도 수완이었지만 속도가 비상식적이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
이 소식은 제니아에 있는 모든 귀족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마음만 먹으면 지푸라기 허수아비라도 세경가의 주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과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아스트라세 가문에 이어서 투크 가문까지 그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마담 로가에게 리한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그때의 일이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지금 당장 오르드리에 방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번에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을 겸, 장모님을 왕의 게임에 초대하겠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거절하시겠다는 말씀은 지양해주십시오.]
“큭!”
내용을 보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편지를 구겨버리지는 못했다.
‘이런 빌어먹을 애송이 녀석이! 절대권력을 손에 넣으니 이제는 아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반란을 일으켜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녀가 앞뒤를 가리지 않는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지금은 이 건방진 애송이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가 애쉬를 굴복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마담 로가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
만약에 리한 혼자서 이런 편지를 보냈다면 자신의 딸들을 인질로 잡아서 거꾸로 으름장을 놓았겠지만, 애쉬라는 괴물의 공포가 잠재의식에 뿌리 깊이 박혀있기에 감히 그런 일을 시도할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얌전하게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 내가…?’
편지에는 가능하면 서두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로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르드리에 다녀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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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을 대표하는 인물은 마담 로가, 포용력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숙한 여인을 대표하는 인물은 레이디 나이트.
리한은 그녀들을 포함해서 복수의 여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았다.
참가하는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앞서 언급한 여성들을 제외하고 오필리아와 미스 주피터, 거기에 카밀라와 애쉬, 에스메랄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도대체 우리를 여기에 불러모으신 저의가 뭡니까? 전하.”
로가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부세계와 완벽하게 차단된 아공간으로 끌려왔다는 사실도 불만스럽지만, 주변 배경이 하필이면 워터파크라서 모두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은 왕의 옥좌처럼 화려한 선베드에 누워있는 리한이 자신의 친구인 오필리아의 무릎을 베고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장모와 사위의 관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워 보이는 모습.
“지금부터 여러분과 함께 신나는 왕게임을 즐겨보려고 합니다.”
“왕게임이라고요?”
“네, 평소에 여러분이 저에게 품고 있는 불만을 합법적으로 표출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극상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한. 일종의 공인된 야자타임이라고 할 수가 있죠.”
수군수군
장내가 술렁거렸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로가가 고민하고 있을 때 레이디 나이트가 조용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전하에게 불만이 없는 경우는 어쩌면 좋을까요?”
“네,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 분께서는 이루고 싶은 소원을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흥. 바보 같군…보나 마나 더러운 꿍꿍이가 있는 거겠지. 난 빠지겠다.”
애쉬가 코웃음을 치면서 게임에서 빠지려고 했지만 리한이 손을 들자 거짓말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참고로 여기에 있는 분은 전부 강제로 참가해주셔야 하겠습니다. 거부권은 없습니다. 정 빠져나가고 싶다면 게임에 승리하고 소원으로 빌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큭…”
“승리한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말은…”
“네, 그러면 지금부터 규칙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크흠.”하면서 가볍게 목청을 가다듬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이 게임의 왕은 접니다. 참고로 이 지위는 게임이 끝날 때까지 여러분이 어떤 소원을 빈다고 해도 바꿀 수가 없으니까 주의해주세요.”
처음부터 쓰레기 같은 규칙이 나왔다.
망겜의 냄새가 솔솔 올라왔지만 로가는 참을성 있게 마지막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게임이 끝나는 시기를 정하는 것도 접니다. 소원을 빌어서 개인적으로 게임에 빠질 수는 있지만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리타이어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중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만…”
자신과 비슷하게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애쉬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규칙은 단순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라운드마다 한 명씩. 제비뽑기를 통해서 선발된 선수가 저하고 대결하는 겁니다. 대결 종목은 회전판을 돌려서 랜덤하게 정해집니다만 여러분의 특기에 맞춰서 체스부터 비무까지 다양한 게임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운이 좋으면 한 번에 이기는 것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살짝 맥이 풀린 로가가 그렇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패자가 승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단순한 게임입니다.”
‘후계자가 엄청나게 불리한 규칙이잖아?’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서 두려워했지만 이런 조건이라면 숫자가 많은 자신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일단 비무 대결은 애쉬가 있어서 든든했다.
그리고 싸움닭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로가의 체스 실력은 마스터급으로 왕국에서도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는 것이다.
게다가 회전판에 적혀있는 종목을 세세히 살펴보니 완벽하게 운빨에 의존하는 게임들이 많이 보였다.
승산이 충분하고도 넘치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게임을…”
“야자타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서로에게 오해가 쌓인 것 같아서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흉금을 털어놓는 자리를 마련해 영내의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려는 생각입니다.”
“흠…”
‘내가 후계자를 오해하고 있었던 건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로가였지만 그녀의 실책은 이 순간에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카밀라.
애쉬도 입술을 깨물며 표정을 굳혔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 것처럼 서로를 부둥켜 끌어안은 아만다 모녀와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해탈한 표정이 되어버린 오필리아까지.
각양각색의 다양한 반응을 뒤로한 체, 첫 번째 제비뽑기에서 레이디 나이트가 뽑혔다.
주르르르륵
버튼을 누르자 회전판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종목이 결정되었다.
“가위, 바위, 보!”
“…보!”
한 박자 늦게 내었는데도 불구하고 보자기를 펼친 레이디 나이트가 가위에 패배했다.
“승리했으니까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무엇이든지 말씀해주세요!”
더 원의 사도가 되어버린 그녀가 열정적으로 외쳤다.
“히어로네임이 아니라 진짜 이름을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이사벨라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사벨라양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외국의 귀빈께서 오늘부터 친구가 되어주시면 영광이겠군요.”
“서, 성은이 망극합니다. 전하!!”
“…”
앵커리지 공화국의 슈퍼히어로가 어째서 그렇게 감격스러워하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첫 번째 게임은 그렇게 더할 나위 없이 훈훈한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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