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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5화 〉 번외편: 글로리 웜홀(8) (405/429)

〈 405화 〉 번외편: 글로리 웜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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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에 따르면 인류가 노예나 그에 준하는 상태로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이종족들의 숫자가 전체 숫자의 70%를 육박한다고 하더군요. 생태계 회복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서식지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노예 해방이라…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귀족과 상인, 지주들이 그것을 받아들일까요?”

“그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공존하지 않으면 함께 멸망해버릴 뿐이니까요.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자연이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 버리기 전에, 그리고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종족 노예들을 몰살해버리기 전에 서둘러야 합니다.”

“…몰살이라고요?”

모니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 질문에 리한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최근에 앵커리지 공화국의 연금술사들이 이종족 노예들을 대체할 수 있는 골렘 개발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간단한 마력 충전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고, 빠른 시일 안으로 대량으로 양산해 자국의 라티푼디움과 공장에 보급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그건…”

“노예는 물론이고 인간 노동자들까지 일자리를 잃어버리겠군요. 실업자가 엄청나게 늘어나겠어요.”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단순한 노동에 종사해왔던 노예들의 가치가 폭락하겠죠. 헐값으로 내놓아도 팔리지 않을 테니까 그들에게 남은 길은…”

“살처분 당하거나 전쟁에 징집되어서 소모품으로 버려지겠죠. 어느 쪽이든 대량 학살은 피할 수가 없을 겁니다.”

심각한 이야기에 빠져든 그녀들은 자신들이 찾아온 목적도 잊어버리고 전염되는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여러분처럼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고 교양있는 여성분들께서 우리의 활동에 힘을 실어주시기를 바라는 겁니다. 우선은 작은 한 걸음으로 동물귀 소년·소녀 가장들의 자립을 위한 정착지원금 후원에 힘을 보태주십시오.”

“월 회비는 10대륙 은화입니다. 관심이 생기셨다면 여기에 싸인을 부탁드립니다.”

병풍처럼 서 있던 카트리나가 재빠르게 정기후원 서류를 세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물론이에요! 그렇게 뜻있는 활동이라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동참해서 힘을…앗?! 저, 저기…서명은 꼭 실명으로 해야 하나요? 기본적으로 익명 보장인 게…”

“당연히 실명으로 하셔야죠. 그래야 떳떳하게 세제 혜택도 누릴 수 있고 계좌정보를 정확하게 입력해주셔야 자동이체도 가능하니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여러분의 신상정보가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런 활동에 참가했다는 사실이 이종족 차별주의자들에게 알려지면 위험하니까요. 저도 공개적으로는 신상을 밝힐 수가 없는 처지라…”

“그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믿고 있었다니까? 역시 내 사위…”

“네???”

“아, 아니에요. 사위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저도 모르게…호호호호.”

“그렇군요. 저에 대해서 좋게 봐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사실은 내일 소중한 사람하고 약혼식을 올릴 예정이라서 가능하면 그녀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오늘 행사가 너무나 중요하다 보니…”

“어멋♡ 걱정하지 않으셔도 딸도 이해해줄 거예요.”

“네???”

“아, 아니. 그 아가씨도 이해해줄 거라고요. 홍차에 취했나 아까부터 저도 모르게 헛소리가…호호호호!”

리한에 대한 오해(?)를 완전히 풀어버린 오필리아는 전형적으로 사위밖에 모르는 바보 장모님 모드로 들어가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푼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머지 두 사람도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태도를 바꾼 것은 아니었지만, 악당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자의 훈훈하고도 인간적인 모습에 전의를 상실하고 현자 타임에 빠져버린 상태.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다.

“알아주셨다면 부디 후원 회원으로 가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모든 활동 내용은 투명하게 공개할 예정이며 여러분께서 살아갈 희망을 선물해주는 동물귀 소년·소녀 가장들과의 양자결연도 추진하고 있어서…”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후계…아, 아니. 여러분께서 좋은 뜻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래요! 서둘러서 좋은 것은 없으니까요. 행사에 몇 번 더 참석해보고 결정할게요. ”

“맞습니다.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이 더 많으니까요. 천천히…네! 천천히 알아보고 난 후에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께요!”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행사에 참석한 자신들의 정체가 들통나버리는 것을 두려워한 세 사람이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 모습에 리한은 버려진 강아지처럼 상처를 입은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알겠습니다. 기부는 마음에 우러나와서 하는 거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하윽♡ 미안해요, 사위님…이 아니라…꺅?! 주, 주최자님???”

갑작스럽게 그에게 두 손을 사로잡힌 오필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이 사진을 봐주십시오.”

그곳에는 빼빼 말라서 뼈다귀만 남아있는 여우귀 소녀가 두 귀를 슬프게 늘어트리고 있었다.

“제가 최근에 양녀로 맞아들인 마틸다라는 소녀입니다.”

“그, 그러니까 그게…”

“이 아이가 배부르다는 느낌을 알까요?”

“…”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회원 가입 서류에 서명했다.

원래대로라면 정체가 들통났어야 하지만 리한은 술에 취한 척을 하면서 일부러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카트리나에게 넘겨줘 버렸기 때문에, 그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희 동사모(동물귀 소년·소녀가장을 사랑하는 모임)의 식구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어떻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술이라도 한 잔씩 올리고 싶습니다만…”

“마,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오늘은 뭔가 여러 가지로 지쳐서 이대로 돌아가고 싶네요.”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오필리아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죠. 최소한 댁까지 직원들을 시켜서 댁까지 안전하게 배웅해드리도록…”

“이렇게 끝낸다고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죠!!”

목적을 달성한 리한이 미련 없이 그녀들을 돌려보내려고 하자 카트리나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손님들 앞에서…”

“소장님이야말로 귀한 곳에 귀한 분들을 어렵게 불러놓고 이대로 돌려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여러분의 친목을 한층 더 두텁게 다질 수 있도록 아주, 아~~~주 귀한 것을 준비해 왔습니다.”

“귀한 거라고요…?”

수군수군

세 사람이 동요한 표정으로 술렁거렸고 리한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주인님이야말로 무슨 짓이죠? 이렇게 꼴리는 암컷들을 여기까지 농락해놓고 그냥 돌려보내시려고 하다니 말이에요.]

[…오늘은 쉬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차라리 산소 없이 살겠다고 하세요. 암컷을 덮치지 않는 주인님은 붕어가 들어있지 않은 붕어빵입니다!]

[…그건 원래 그게 맞는 게…]

쿵!

카트리나는 문답 무용으로 술병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힘차게 내려놓았다.

“엘프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비장의 축하주. 천년수?의 과실주입니다!”

“천년수의…”

“과실주???”

“죄송하지만 그게 뭐죠? 처음으로 들어보는 이름인데…”

“후후후후. 들어보지 못한 것이 당연합니다. 엘프들조차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의 명주니까요! 여러분은 지금 제국의 황제조차도 누릴 수 없는 특권과 마주하신 겁니다. 소장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죽을 때까지 이 술을 꺼내지 않고 가보로 간직했을 테니까요. 딱 한 잔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딱 한 잔씩 나누어드리죠.”

똑!

그렇게 말하면서 술병을 개방하자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와서 코끝을 자극하고 군침이 고이게 했다.

꿀꺽­

“그, 그렇게 귀한 것을…”

“딱 한 잔이라면…”

오필리아들이 홀린 것처럼 멍하니 자리에 도로 앉았다.

[술이라고? 그따위 것으로 나를 네년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한 번 마셔보시죠.]

[이 년이…]

세상에 어떤 술이나 약물도 리한을 취하게 하거나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마도구를 설치해놨다고 하지만, 애쉬의 힘을 손에 넣은 그에게는 무의미한 장치였으며 굳이 내력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마스터 코어에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카트리나도 모르지 않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태연하고 권유하는 데는 그만한 자신과 속셈이 있을 것이 뻔했다.

[장담하는데 새로운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마셔보세요. 실패해봤자 여기에 있는 암컷들을 가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까? 물론, 이것을 마시고도 범하지 않으신다면…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저에게 무슨 짓을 하셔도 됩니다!]

[상품은 별로지만…좋다. 그렇게까지 말하겠다면 한 번 어울려주지.]

전음으로 그렇게 대답한 리한은 오필리아들과 함께 천년수의 과실주를 원샷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취하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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