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4화 〉 번외편: 글로리 웜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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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쪽팔린 순간은 언제일까?
오필리아는 바로 지금이었다.
[동물귀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따듯한 사랑을 전달하는 후원의 밤.]
“…어린 낸시는 철창을 움켜잡으며 절규했어요. “아빠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목소리는 3단 고음으로 올라갔지만 몽롱한 의식은 생사의 경계를 헤맬 뿐이었죠.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상대는 애비를 죽인 원수야! 게다가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병든 노모와 병든 아내, 병든 딸과 병든 강아지의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요.”
심금을 울리는 사연 낭독에 좌석에 앉아있는 청중들은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흑흑흑흑.]
[정말로 감동적인 이야기에요!]
[솔직히 수인 따위는 더러운 몬스터 하고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가슴 깊이 반성합니다! 저렇게 가련하고 기특한 아이들이라니…]
[인간이 미안해!!]
“대체 이게 뭐시여…”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서 쳐다보니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두 명의 여성이 벙찐 모습으로 있는 게 보였다.
수군수군
[어머, 저 여자들은 뭐야?]
[이렇게 뜻깊은 행사에 참석하면서 왜 저렇게 야하게 입었데? 남사스러워서 정말…]
[병이야, 병. 노출병!]
[그만 하세요. 젊은 사람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러는 겁니다.]
호랑이 가면을 쓰고 있는 나이 지긋한 노부인의 말에 순식간에 철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그녀들은 새빨개져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어 들어가고 싶은 기분.
사실은 클럽 입구에서부터 어렴풋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줄을 서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점잖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젤에게 전달받은 장소가 확실했던 데다가 클럽 이름도 하렘왕이어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무대포처럼 밀고 들어간 것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하렘이 자신들이 생각한 하렘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는 남자들이 출입할 수 없는 여성 전용 살롱이에요. 돈과 시간이 넘치는 교양있는 숙녀들을 위한 클럽이죠.]
[하지만 이 행사를 개최한 사람은 남자잖아요?]
[돈이 모자라서 스폰서를 받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인심이 후한 분이라서 오늘 열리는 행사를 개최할 수가 있었어요. 하렘왕이라는 칭호는 단순한 말장난으로 감사의 인사를 담아서 붙여드린 이름인데…]
[그, 그러면 어째서 미녀만 참석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는 겁니까?]
[추녀만 참석할 수 있다고 하면 여성분들이 오시겠어요? 마음이 예쁜 분들을 기분 좋게 해드릴고 써놓은 멘트인데…아니, 애초에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보시는 것이 정말로 이상하군요.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경위로 참석하신 거죠? 저희가 발송한 초대장을 읽어보셨다면 이런 오해를 하실 리가 없는데…]
행사직원의 말에 세 사람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리한의 실체를 파헤치려고 했다가 오히려 가슴이 훈훈해지는 미담만 고구마처럼 줄줄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오필리아는 이렇게 훌륭한 사위를 의심했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마저 느꼈다.
이대로 머물러봐야 망신밖에 당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세 사람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 순간에 그녀들에게 다가온 종업원들이 일제히 메시지 카드를 건넸다.
[3층에 있는 vip룸으로 와주십시오.]
‘설마 후계자로부터 직접 초대가 오다니…’
가면도 쓰고 있고 신원 체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젤이 배신했다면 자신들의 정체는 이미 들켜버린 셈이나 마찬가지라서 초대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잘됐어. 이렇게 된 김에 정체를 밝히고 떳떳하게 대면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세 사람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vip룸으로 향했다.
중간에 자연스럽게 일행으로 합류했지만 말하지 않아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불필요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어차피 정체도 금방 밝혀질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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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세 사람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리한이라는 사실을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여성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
‘재미있는 조합이군. 장모님과 샐리, 그리고 모니카라니…’
오필리아가 찾아온 것은 솔직하게 예상 밖이다.
하지만 나머지 두 사람의 이유는 충분하게 짐작이 갔다.
기자인 샐리와 군인인 모니카.
그녀들의 공통점은 최근 감옥에 갔다 왔다는 것이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극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거꾸로 앙심을 품고 덤벼드는 게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인 데다가 캐치 앤드 릴리스를 즐기면서 가지고 놀기에 딱 좋은 두 사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
“아, 정체는 밝히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처럼 익명성을 보장하는 자리인데 서로가 누구인지 알면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네???”
이미 서로에 대한 정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 상태에서 리한이 시치미를 떼자 그녀들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듣자 하니 여러분께서는 이런 행사가 처음이신 모양이더군요. 유난히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시는 분들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봤습니다. 자세하게 설명도 드릴 겸…아, 혹시 쓸데없는 배려였습니까?”
“아, 아니에요!”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예전부터 후원 행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거든요!!”
누가 봐도 수상하기 이를 데가 없는 모습으로 과장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고오오오오!
‘정체를 들키지 않았으면 사위의 됨됨이를 알아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야!’
‘후후후후. 내 변장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군.’
‘녹음 준비는 완벽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하나같이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속내가 보여도 너무 뻔히 보이는 리액션에 리한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이야기하기 쉽도록 술이라도 한 잔씩 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술…이라고요?”
“취하게 해서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고 보니까 마나 사용을 금지한다고 했죠? 내공을 사용해서 알콜을 분해하지 못하게 하려고요.”
“하하하하! 마나 사용을 하지 못하게 결계를 쳐둔 이유는 단순하게 행사 중에 사고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으려는 조치입니다. 술이 싫으시다면 차나 커피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저는 조금 마시겠습니다. 알콜이 돌아야 입이 가벼워지는 스타일이라…”
“입이…”
“가벼워진다고요?”
“그, 그렇다면 당연히 마셔야죠! 호호호. 저희 눈치는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신들에게 술을 권하는 것도 아니고 자진해서 입을 가볍게 만들겠다는데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오필리아들은 차를 마시고 리한은 혼자서 독작을 시작했다.
몇 차례 잔을 기울이자 얼굴이 빨개지면서 휘청.
그러면서도 애써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자세를 바로 하려고 애쓰는 모습에 여자들은 실소해버리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술을 잘 못해서…미녀분들 앞이라서 평소보다 긴장한 모양입니다.”
“어머 그게 뭐야, 귀여워…가 아니라! 크흠. 괘, 괜찮으시겠어요? 취해서 쓰러져버리시면 오히려 본말전도인데…”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온 오필리아가 빠르게 수습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괘, 괜찮습니다. 우리의 뜻에 동참해주시는 후원자분들을 한 분이라도 더 설득시키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은…읏!”
위태롭게 기우뚱하자 그녀들도 움찔거렸다.
하지만 어찌어찌 수습하면서 설명을 이어나가는 모습에 자신들도 모르게 대견하다는 생각과 함께 경계심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리한의 노림수였다.
일부러 술에 취한 척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성애를 자극하는 작전.
동시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사업 내용이 무엇인지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터였다.
“현재 저희가 주력하는 사업은 동물귀 소년·소녀 가장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이종족 전체가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자치 구역을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만…”
“취지는 알겠지만 어째서 그런 사업을 하시는 거죠?”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과 인류를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을 위해서라고요???”
“네. 다들 교양이 있는 분들이시니까 어느 정도 알고는 계시겠지만 현재의 인류는 자연을 무자비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잔인하게 착취해서 생태계 자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사례가 하나둘이 아닙니다…”
리한은 홀로세 대멸종의 개요를 가볍게 설명하고 생태계 순환이 망가져 버린 사례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상위 포식자가 사라진 숲에는 멧돼지나 카빙 위즐, 고라니, 등이 이상 증식을 거듭해서 사람과 농가를 덮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세계가 멸망해도 살아남을 거라는 곤충마저 40%가 멸종.
사정이 위태로운 것은 바다도 마찬가지라서 크라켄이나 상어, 고래 같은 상위 포식자들이 거의 멸종 직전에 도달하여 산호들의 백화 현상이 곳곳에 목격되고 있다.
모두 인류가 저지른 잘못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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