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2화 〉 번외편: 글로리 웜홀(5) (402/429)

〈 402화 〉 번외편: 글로리 웜홀(5)

* * *

****

평화로운 오후.

수도 오르드리에 위치한 아스트라세 가문의 저택 한복판에서 통렬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싫어어어어어!!”

“지, 진정하렴. 코제트, 네가 전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언니의 약혼식인데…”

벌써 2시간.

오필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딸을 달래기 위해서 노력했다.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요! 허니는 마이 허니라구욧!”

콩콩! 콩콩!

하지만 모친의 설득에도 소녀의 분노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빨간 구두로 죄 없는 바닥을 짓이겨댔다.

“아아아아! 불쌍하신 전하. 언니의 사악한 독니에 걸려들어서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전락해버리시다니…”

“응??? 사악한 독니??? 희생양???”

“물론이죠! 애초에 신부로 삼을 거라면 그렇게 나이 많은 노땅이 아니라 저처럼 싱싱한 영계를 고르는 게 자연의 순리라고요!”

“노땅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뭐가 되니…가 아니라! 언니에게 그런 말을 하면 못써요! 도대체 누구한테 그런 말을 배운 거야?”

어째서인지 복받쳐 오르는 서러움에 소리를 질렀지만 코제트는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시종인 한스가 가르쳐줬어요! 여성의 적령기는 6살부터 13살까지. 그보다 나이가 많으면 유통기한이 지난 거니까 썩은내를 풍기기 전에 불태워서 소독해버려야 한다고요! 아아아아. 불쌍한 마이 허니…”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렇게 말하자 잠자고 있던 백귀나찰이 세상에 깨어났다.

“어머? 그래요? 한스가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이 세상과 법치에 아무런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군요.”

고오오오오오오!

“히이이익!”

화사하게 미소를 짓는 오필리아의 실눈 속에서 지옥의 악귀들이 한스 아니, 변질자에게 솟짓을 했다.

딸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부하들에게 조용히 신호를 보내서 처리해버린 직후.

“애초에 정략결혼이라면 굳이 언니가 아니라 제가 해도 되잖아요! 아니, 백번 양보해서 약혼을 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저도 함께 치르겠어요! 부탁드려요, 아버님!”

“음???”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신문을 읽고 있던 루돌프는 자신에게 갑자기 불똥이 튀자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헛기침을 했다.

“크흠, 크흠! 뭐…약혼 정도라면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도…”

“만세!!”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씀이에요, 당신?!”

“아니…전하 같은 영웅이라면 다수의 여성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하니까 말이오. 게다가 종가와 사돈을 맺는 것은 비문의 영광이기도 하고…”

“싫어요! 아무리 그래도 소중한 딸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내보내라니…”

“싫어요라니 당신은 어린애도 아니고…”

“코제트는 어린애라고요! 아직 엄마의 곁을 떠나보내기에는 이르다고요! 그렇다면 그런 줄 아세요!! 잠깐…너는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어느새 무릎을 꿇은 소녀가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 소녀는 마이 허니 아니, 서방님과 백년해로할게요.”

“싫어어어어어!!”

딸에 이어서 아스트라세 가문의 저택으로 울려 퍼지는 모친의 절규.

루돌프는 이런 수라장에 머무르고 있어봤자 곤란해질 뿐이라는 생각에 빠르게 신문을 접으며 꽁무니를 뺐다.

“크흠, 생각해보니까 영지 관리를 랜달에게 맡겨두기만 하는 것도 불안하구려. 사나그로 가보겠소. 뒷일은 부인에게 부탁하리다.”

“맡아달라니까요? 이리나의 약혼식은 내일 밤이잖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그때까지는 돌아오리다. 그럼…”

슈우우웅­

그렇게 말하고 눈 부신 빛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남편의 믿을 수 없는 배신(?)을 목도하고 할 말을 잃어버리는 오필리아.

“기, 기가 막혀…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블링크 스크롤로 도망치는 거야?”

“그러면 어머님. 아버님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소녀는 이만 서방님의 곁으로…”

“안 된다면, 안 돼에에에에!!”

****

그날 저녁.

저택을 탈출하려고 하는 코제트를 간신히 붙잡아서 가둬놓은 오필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아픈 머리를 감싸 쥐었다.

쿵쿵! 쿵쿵!

[포기하고 열어주세요, 어머님! 아무리 떼를 쓰셔도 허니와 저는 결국에는 맺어질 운명이라고요! 사랑의 폭주기관차, 코제트. 지금 출발합니다. 뿌뿌!!]

“도, 도대체 그런 말들은 어디에서 배운 거야???”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솔직히 너무 지쳐서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도무지 바닥을 보이지 않는 코제트의 체력에 자신도 모르게 “이것이 젊음인가.”를 중얼거리는 그녀.

‘아니. 나, 나도 아직 한창때니까 말이야!’

도대체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변명을 마음속으로 토하며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짜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코제트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어. 약혼식 준비 때문에 바쁘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시시콜콜하게 염치나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야. 사랑하는 딸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내가 두 발 벗고 나서야만 해!’

화르르르르­

두 손을 불끈 쥐면서 의지를 불태운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아시에스타 궁전으로 연락을 취했다.

지이이잉­

[…통신 연결했습니다…어머? 오필리아 사모님이 아니십니까! 이쪽 회선으로 연락을 주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시기에…]

화면 너머로 떠오르는 낯익은 얼굴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의 이름이 지젤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는 오필리아.

“약혼식 준비로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전하께 급하게 상담을 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는데 오늘 중으로 시간을 잡을 수 있을까요?”

이 말을 듣고 단번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모님의 부탁이니까 가능하면 들어드리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10분. 아니, 5분이라도 상관없어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가 지금 마음이 너무 급해서요. 빚이라고 생각하셔도 되니까 꼭 부탁 좀 드릴게요.”

[하지만…휴.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사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지금 후계자 전하와 약속을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연락을 취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애초에 궁전에 계시지도 않습니다.]

“약혼식 전날에 자리를 비우셨다는 말씀인가요? 도대체 무슨 심각한 사안이기에…”

[그게…말씀드리기가 대단히 곤란한 내용이라서요.]

“곤란한 내용이라니요???”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입으로는 도저히 말씀드릴 수가…]

다급하게 사과하면서 통신을 중단하려고 하자 눈이 뒤집혀버린 오필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멈추세요! 이쪽은 내일 전하에게 소중한 딸의 장래를 맡기는 입장이라는 말입니다! 장모로서 사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가르쳐줄 수 있잖아요!!”

우뚝­

[배,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만…으으으읏!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절대로…절대로 제가 가르쳐드렸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알겠죠? 아시겠죠???]

“무, 물론이에요.”

지젤이 울상을 지으며 애원하자 자신도 모르게 압도당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후계자가 무슨 용무로 궁전을 비웠는지를 전해 듣고 정신이 대략 멍해져버리고 말았다.

“총각…파티라고요?”

****

총각 파티.

그것은 인생의 자유를 빼앗기는 품절남들의 마지막 발악 아니, 판타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배우자와 배우자의 가족들에게는 철저한 비밀.

개중에는 불알 달린 친구들만을 불러모아서 건전하게(?)또라이 짓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검열삭제로 시작해서 검열삭제로 끝나게 된다는 사실을 오필리아도 알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 결혼식도 아니고 약혼식 전날에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리한이 다양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것처럼 세상 정직(?)하고 바른생활(?)로 유명(?)한 모범생(?)같은 후계자가 설마 난교 파티를 주최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지젤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은 그야말로 가관.

‘가면왕의 하렘 파티라고? 클럽 하나를 통째로 전세 내서 불특정 다수의 여자들과 즐기겠다니…미녀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프리 패스. 게다가 가면 착용으로 익명성 보장. 술에 취하지 않는 것을 금지하고 마나를 사용할 수 없도록 결계까지 펼쳐놓았다고? 세상에…’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히는 이야기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종가고 나발이고 약혼 자체를 취소해버리고 싶었지만 남편의 말처럼 영웅이 호색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은 시대적으로 어려운 분위기다.

게다가 남의 말을 듣고 이렇게 중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도 우스운 일.

가면을 착용한 오필리아는 리한이 주최하는 총각 파티에 몰래 잠복해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딸의 장래를 맡길 수는 없지. 전하의 사람 됨됨이를 오늘 이 자리에서 낱낱이 파헤치고야 말겠어!’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