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화 〉 에필로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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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숫자의 원정군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재정 부담과 보급 문제는 재무부 관료들의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트렸다.
전후처리비용까지 생각하면 이미 배보다 배꼽이 커져 버린 상태.
설상가상으로 왕국군은 쓰러트린 제국군의 장비를 입수해서 자신들의 무기를 업그레이드하고 그들의 전략과 전술까지 흡수하며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덕분에 이제는 초반처럼 일방적으로 승리하는 사례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달미나 왕국이 이렇게 끈질기게 버티면서 선전하는 모습을 보이자 참전을 망설이던 반 제국연합의 국가들까지 하나씩 합세해서 지원군을 보냈다.
거기에 새롭게 소집한 병력까지 정규군으로만 1500만이라는 대군을 보유하면서 제국군을 압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지크프리트와 일기토를 하겠다. 이 전쟁을 한 달 이내로 종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한켈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 됩니다! 아니, 애초에 상대편에서 그런 싸움에 응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 된다.”
“도대체 어떻게…”
“사로잡은 포로 20만 명을 해방하면서 소문을 퍼트리도록 해라. 제국의 총사령관이 온 세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1대 1대결을 펼치기를 바란다고 말이야. 거절하면 다음에 해방하는 20만 포로들의 왼쪽 팔을 잘라라. 다음에는 혀를 자르고 눈을 뽑아라. 겁쟁이가 아니라면 그쯤에서는 튀어나올 수밖에 없겠지.”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태연스럽게 말해버리자 백전노장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그런 방법을 사용한다면 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위험 부담이 지나치게 큽니다! 만에 하나라도 대원수께서 패배하시면 어떻게 뒤를 감당하라는 겁니까?”
지크프리트가 달미나 왕국의 자존심이라면 쥬란 신은 제국의 자존심이다.
아니, 후자의 경우에는 단순한 자존심을 넘어서 지나치게 비대해져 버린 제국군을 하나로 결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심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제는 바꿀 수 있어도 쥬란의 역할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런 그가 일대일 대결에서 쓰러져버리면 제국군은 자중지란으로 내부에서부터 무너져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이 정도 미끼를 내밀어야 달미나 왕국에서도 덥석 물어 당길 것이 아니냐?”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는 비책이라도 있는 겁니까? 세계 최강의 무장을 상대로…”
지크프리트 또한 천급의 무장으로 알려져 있기에 한켈의 우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무런 속임수 없이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쓰러트릴 것이다. 녀석들이 숭배하는 용사라는 환상을 철저하게 때려 부숴야 정부의 프로파간다에 세뇌되어 있는 말미나 왕국의 국민들이 미몽?夢에서 깨어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한 마디로 승패를 장담할 수가 없다는 거군요. 차라리 제국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여서 군대를 물리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우책 중에도 우책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달미나 왕국이 얼마나 기세등등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피해복구는 문제도 아니다. 이번 전쟁을 교훈으로 군대를 재정비하고 명실상부한 반 제국연합의 수장으로 우뚝 서게 될 거다. 그때는 지금의 몇 배 전력을 투입한다고 해도 쓰러트릴 수 없는 백년대적으로 성장해 있겠지. 대륙 정복은 완벽하게 물 건너가버리는 셈이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만 당신이 쓰러져서 제국이 멸망해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쥬란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면서 자리를 떠났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어.”
“…별로 안심할 수 있는 장담은 아니로군요.”
한켈은 한숨을 내쉬면서 청심환을 꺼내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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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란의 예측대로 달미나 왕국은 제국의 갑작스러운 대규모 포로 해방에 술렁거렸다.
죽었다고 생각한 아버지와 남편, 자식들이 살아서 돌아왔으니 일반 백성들이 열렬하게 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온 메시지는 제국에 맞서서 하나로 단결한 국민 여론을 분열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위대한 용사의 후예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제국은 그대들의 용맹을 영원히 기억하고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훌륭한 쌍방 양측에서 계속해서 피를 흘리는 것은 도리에 반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것. 따라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에 근거해 양군 총사령관의 일기토 대결로 이번 전쟁을 종결짓기를 바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제국 대원수의 도전장.
처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크프리트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비열한 속임수라고 생각하면서 이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쥬란은 그때부터 아스마 화산지대에 혼자서 머무르면서 대결을 기다리는 모습을 촬영해서 달미나 왕국 전역에 방송으로 내보냈다.
그곳은 용사가 드래곤 로드 니다그를 쓰러트렸다고 전해지는 장소였다.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나에게 맞서라, 지크프리트! 아니면 네놈이 계승한 것은 용사의 이름뿐인 것이냐? 네놈도 사내라면 비겁하게 백성들의 치마폭에 숨지 말고 도전을 받아들여라!]
방송을 듣는 지크프리트만이 아니라 달미나 왕국 전체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도발이었다.
용사에 대한 믿음은 왕국의 국민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떤 불리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절대악에게 맞서서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승리를 쟁취해 낸다.
물론, 전쟁이라는 것을 같은 선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사기는 감정에 지배당하는 생물이며 지금까지 국민 전체가 일치단결해서 제국에 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신들이 절대적인 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쥬란은 그 믿음을 근본적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못해도 지난 6개월 동안의 전쟁으로 왕국의 국민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이 더 이상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지는 유혹.
게다가 대결이 펼쳐지는 장소는 용사의 전설이 살아서 숨 쉬는 곳이다.
그곳에서 마왕이나 다름이 없는 적의 수장을 지크프리트가 쓰러트리게 되면 그야말로 인류가 승리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달미나 왕국의 손으로 다시 한번 재현해내는 셈이다.
곧바로 지크프리트가 나가서 대결에 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지만 수뇌부의 입장은 달랐다.
한켈과 마찬가지로 만에 하나라도 패배해버릴 가능성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특히나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이 결투에 결사반대를 외치는 사람은 달미나 왕국 최고의 책사, 에밋이었다.
그는 지금 국면이 유지되기만 하면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제국이 버티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게다가 쥬란 신을 쓰러트린다고 해도 의미는 없었다.
제국이 분열한다고 해도 그런 혼란을 틈타서 어떤 이득을 도모하기에는 달미나 왕국이 이번 전쟁으로 입은 피해가 지나치게 막심했던 것이다.
차라리 빠르게 전쟁을 마무리하고 전후복구에 주력해서 군대를 재정비하면 반 제국연합의 수장으로서의 공고한 지위를 확립해, 수년 안으로 과거 이상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쥬란의 도발 수위는 높아져 갔고 국민들의 불만도 높아져 갔다.
사람들은 어째서 용사의 후예인 자신들의 나라가 정정당당한 대결을 피하고 악의 조직 수장이 당당하게 싸움을 걸어오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실력에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면 모르겠지만 12대 지크프리트는 초대 용사의 환생이라고 불릴 정도로 역대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는 천급의 무장인 것이다.
왕국 수뇌부도 그런 그의 강함을 어필하면서 프로파간다 선전의 도구로 이용해왔기 때문에 어떤 변명으로 해명을 해도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의 실망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자 제국은 한쪽 팔을 잘라버린 20만 명의 포로들을 새롭게 해방했다.
[실망했다, 지크프리트! 이들이 팔을 잃어버린 이유는 모두 네놈의 비겁함 때문이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웠다! 하지만 정작 용사를 자처하는 네 녀석에게는 그들을 위해서 나설 수 있는 용기가 부족했던 모양이구나?다음에 해방하는 포로들은 팔에 더해서 두 눈을 뽑아버릴 것이다! 이를 데가 없는 네 녀석의 실체를 목격하느니 차라리 장님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하겠지. 아직도 네놈을 믿고 있는 불쌍한 국민들처럼 말이야!!!]
이 사건으로 왕국 국민들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사지 멀쩡하게 고향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던 가족들이 하루아침에 불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라 전체에 곡소리가 울려 퍼졌고 12대 지크프리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을 들고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것을 에밋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렸지만 병사들의 사기까지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수뇌부에서도 대결 요청을 받아들이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닷새가 지나고 장담했던 것처럼 눈이 뽑힌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에밋은 서둘러서 지크프리트를 진정시키려고 찾아갔지만 그는 이미 완전무장을 갖추고 아스마 화산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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