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화 〉 정상결전(10)
* * *
곧이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란드그리드!”
“오버레이 프로텍션!!”
“세트의 방패!!!”
겹겹이 펼쳐지는 강기의 보호막과 방어 마법들.
영웅들은 자신이 아니라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한 줌의 내력까지 모조리 끌어올렸다.
“쳇! 생각하는 수준은 모두 똑같다는 건가?”
“후후후후.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다니 그야말로 영웅에게 걸맞은 최후라는 거잖아!”
“예전에는 자기 보신이 최고라고 지껄이던 녀석이…”
“그래요! 어울리지 않게 나서지 말고 오늘만큼은 누나들의 치마폭에 얌전하게 숨어있으세요. 이 한 몸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소중한 동료 하나쯤은 지켜내 보이고 말 테니까요.”
“흥, 그렇게 빈약한 몸뚱이로 누구를 감싸겠다는 거냐? 대양처럼 커다란 내 등이 훨씬 더 아늑하고 안전할 거다. 증오스럽던 거인의 핏줄도 오늘만큼은 자랑스럽게 느껴지는군.”
하나같이 허세를 부리며 앞으로 나섰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정해진 결과는 바꿀 수가 없다.
휘오오오오오오오!
애쉬의 눈동자로 백련의 만다라가 떠올랐다.
양손에 만들어지는 무형의 검.
화르르르륵!
그곳에서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처럼 어두운 검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천마신공에 수록된 무공 중에서도 최강의 위력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검법이다.
그런 그가 양손에 검을 쥐었다는 사실은 용서 없이 본심을 발휘하겠다는 뜻이었다.
“후후후후. 크크큭, 크큭, 크하하하하하하하하!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다 못해서 불쌍할 정도로구나. 하지만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영혼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불살라주마!!!”
쿠오오오오오오!!
광기로 가득한 웃음소리를 토해내면서 한층 더 소름이 끼치는 심연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하늘에 반역을 일으킨 존재.
애쉬는 그런 천마들 중에서도 누구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불안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제는 저주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초대 천마의 원한과 분노에 사로잡혀서 지금처럼 언제든지 이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후계자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자신을 진심으로 분노하게 한 어리석은 버러지들을 아공간째로 소멸시켜버리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만약에 리한이 여기서 죽는다면 틀림없이 땅을 치며 후회할 터.
하지만 운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새벽 2시가 찾아왔다.
파지지지지지직!
세멜레의 지팡이로 만들어낸 분신의 업그레이드가 끝났다.
표면적으로는 기의 흐름을 탐지할 수 없지만 내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미증유의 힘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존재는 카테고리 아웃에 도달했다.
“…다시 한번 넘어섰군.”
“뭐라고?”
“분신인 내가 오리지널인 너를 초월했다. 후후후후. 지금의 나는 마음만 먹으면 알파인 너를 거꾸로 흡수해버릴 수 있어.”
새벽 2시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동기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보아하니 세멜레의 지팡이로 만들어진 분신이 합체를 거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일어난 하극상.
언젠가 머물렀던 휴양지하고 똑같은 상황이지만 리한은 또 하나의 자신이 어째서 갑자기 이런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를 흡수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서둘러!”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존재 자체가 소멸해버릴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더 원의 유지를 이어주기만 한다면 누가 알파가 되어도 상관없어. 목숨 따위는 기꺼이 희생해주마!!”
이 말을 듣고 당황한 것처럼 움찔했다가 시원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이런 장난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다니 어이가 없군.”
“어째서 갑자기 그런 농담을 하는 거지?”
“대단한 의미는 없어. 마지막으로 조그마한 변덕을 부렸을 뿐이야.”
“마지막이라니 그게 무슨…”
“반드시 이겨라. 네 덕분에 나름대로 즐거웠어.”
“잠깐!!”
슈우우우우우우웅!!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급하게 불러세웠지만 눈부신 섬광을 뿜어내면서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으으으으윽?!!!”
리한은 사지가 찢어지는 엄청난 고통에 가슴을 움켜잡으면서 허리를 꺾었다.
동기화로 매일 밤 경험하는 연례행사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 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변화를 마주하는 만큼 성장통도 차원이 달랐다.
쿠구구구구구구궁!!
“뭣?”
“저, 저건…”
리한으로부터 아공간 전체를 떨리게 하는 엄청난 힘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감지하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애쉬와 슈퍼 히어로들.
다음 순간.
펑!!
리한의 육체가 폭팔해서 터져 나갔다.
“????”
수천, 수만의 파편으로 조각나 흩어졌다가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춰지는 것처럼 다시 조립되었다가 부수고 합쳐지기를 반복.
그것은 환골탈태라고도 부를 수 없는 난폭한 작업이었다.
마치 터무니없이 업그레이드된 소프트웨어를 감당하기 위해서 그에 걸맞은 하드웨어를 수없이 갈아치우며 시험해보는 것만 같았다.
“이 녀석이…”
그 모습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애쉬가 무형검을 움켜잡았다.
아직 최종 오의를 사용할 준비는 끝나지 않았지만 지금 상태로도 얼마든지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혼섬뢰!!!”
슈우우우우우우웅!
미사일처럼 날아가는 거대한 강기의 파도가 리한을 덮쳤다.
아직 자신의 육체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대를 향한 무자비한 출수.
파아아아아앗!
하지만 그 공격은 적중하기 직전에 갑자기 소멸해서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뭣???”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놀라서 당황하고 있을 여유도 없이.
“후계자 전하를 지원해라!!”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진가를 보여드릴 때다!”
“사랑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이에게 승리를 바치기 위해서!”
“우리의 검과 방패로 글로리 로드를 열어드릴 것이다!”
“이런 죽지 못해서 뼈다귀만 남아있는 녀석들이!”
투콰아아아아아앙!!
리한이 비장의 수단을 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슈퍼 히어로들은 사기가 올라서 애쉬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현재의 그에게는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섣부르게 기술을 사용했다가는 그 힘을 흡수해서 최종 오의를 발동시킬 시간을 단축시킬 뿐이었다.
슈퍼 히어로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의미한 정면충돌을 피하며 애쉬를 견제했다.
리한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연막 작전.
다행이라면 지금의 그는 그런 단순한 도발에 넘어가서 길길이 날뛰어버릴 정도로 완벽하게 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슈퍼히어로들이 그렇게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에 리한은 마침내 자신의 힘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육체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슈우우우우우욱!
펑!!!
“젠장!!!”
애쉬는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이상할 정도로 과민한 반응이었다.
리한이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베이스로 삼은 대상들은 그의 능력에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카테고리 아웃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힘을 넘어설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본능이 리한에게서 일어난 변화가 위험하다는 경고를 발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냐? 애쉬. 너에게 이 싸움은 단순한 여흥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느냐?”
“닥쳐!!”
“아무래도 초대 천마의 저주로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모양이구나. 지금 바로 그 주박에서 해방시켜주마.”
“닥치란 말이다. 천마수혼참?????!!”
사아아아아아아아악!
펑!!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강기가 날아들었지만 리한은 그것을 성가시다는 것처럼 맨손을 휘둘러 쳐내서 소멸시켜버렸다.
“무, 무슨…무슨 짓을 한 거냐?!!”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멘탈이 나가버린 애쉬.
“네가 제정신이라면 스스로 깨달았을 거다.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맞혀 봐라!!”
슈우우우우웅!!
“오, 오지마! 오지 말란 말이다!! 일천월륜대폭산!!!”
퍼퍼퍼퍼퍼퍼퍼펑!!!
공중에서 요란한 폭발이 일어났지만 리한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화염 속을 맨몸으로 뚫고 나왔다.
“천마신공이라는 이름이 통곡하겠다! 도대체 어디까지 한심한 모습을 보여줘야 속이 시워하겠느냐? 애쉬!!”
“이런 괴물 녀…큭, 크하하하하하! 드디어 완성되었다. 네가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이번 공격도 받아보도록 해라. 천마신공의 진 오의! 천마…”
“파?!!!!”
투콰아아아아아아앙!!
손바닥을 내지르면서 발사한 정체불명의 장풍이 애쉬를 관통했다.
대미지는 제로.
하지만 최종 오의를 발동하기 위해서 응축해놓은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서 흔적도 없이 공중에서 분해되어버리고 말았다.
“네 녀석 설마 마나를…크으으으윽! 제운종…”
“도망치지 마라, 애쉬! 너에게 아직 다리안의 유지가 남아있다면 나에게 정면으로 맞서라!!”
움찔!
일단 후퇴해서 다음 수를 생각하려고 해단 애쉬는 이 말을 듣고 발끈해 멈춰서 자신에게 쇄도해 날아오는 리한을 향해서 주먹을 날렸다.
“네까짓 녀석이 감히 그 이름을 끄집어내는 것이냐아아아!!!”
“아무리 위대한 존재라도 넘어서야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아아아아!!!”
펑!!!!!
아무런 초식도 없이 서로에게 휘두른 펀치가 크로스 카운터로 얼굴에 박혀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