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9화 〉 정상결전(3)
* * *
하지만 이내 체념해버린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금제를 풀어주겠다.”
후우우우웅!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감싸며 흉터가 아물어갔다.
후계자의 10년 전 기억이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애쉬의 선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천마신공의 구결까지 전수해주다니 서비스가 지나친 것 아니냐?”
“아슈킬 가문을 부탁하지. 성격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너처럼 뻔뻔한 녀석이라면 말아먹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적으로서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지껄이는군.”
“하룻강아지가 짖어댄다고 일일이 반응할 수는 없지 않느냐? 나에게 도전하고 싶다면 천년은 수련하고 와라, 이형의 존재.”
“…터무니없이 얕잡아보는군.”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는 리한이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터무니없이 강하다.
어느 정도로 강하냐면 자신을 하룻강아지라고 표현한 것마저도 과분한 칭찬이라고 고마워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애쉬가 지금까지 자신을 상대해준 이유는 단순하게 변덕을 부렸던 것이다.
마르텔 대모의 죽음으로서 찾아오는 고립감.
자신에게는 아버지이며 정신적인 버팀목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아슈킬 가문의 시조 다리안과의 연결고리가 그것으로 완벽하게 끊어져 버리기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서가 불안한 상태에서 리한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마지막이었다.
각오를 다진 애쉬에게 이제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고집불통이로군. 역시 너는 조금 맞아야겠다.”
“후후후후. 너야말로 지나칠 정도로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지 않느냐? 뭐, 시간은 있으니까 조금 놀아줄 수는 있다만…”
“놀아주겠다고? 얕보지 마라, 애쉬. 설마 내가 정말로 아무런 승산도 없이 너에게 싸움을 걸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
여유로운 미소가 마치 손주의 재롱을 지켜보는 할아버지처럼 푸근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쩌저저적
하늘에서 발생한 균열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면서 아공간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뭣…?”
휘오오오오오오!
진심으로 당황한 애쉬가 놀랄 겨를도 없이 풍혈風?이라도 개방된 것처럼 눈을 뜨기 힘든 매서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확실히 지금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너를 이기지 못해. 하지만 아무리 잘나봤자 혼자서는 조직의 힘을 당해내지 못해. 마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애쉬!”
“네 녀석…”
후우우우우우웅
균열에서 나타난 비공정 한 척이 엄청난 속도로 강하해서 지면에 충돌하기 직전에 놀라운 호버링 능력을 보여주면서 기체를 안정시켰다.
새하얀 매를 연상시키는 날렵하고 매끈한 유선형의 동체.
중앙 마스트에는 자유를 상징하는 하늘색 바탕에 정의를 상징하는 희망의 등불이 새겨져 있는 앵커리지 공화국의 깃발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쿵!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른 리한이 사뿐하게 선수로 착지를 하자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 하나가 허둥지둥 경례해 왔다.
“후계자 전하을 뵙습니다!”
“후계자 전하가 아니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지, 카밀라.”
“크흠, 크흠! 체,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추근거리자 새빨개져서 헛기침을 해댔다.
끄트머리가 새하얀 검은 단발머리가 사랑스럽다.
지금은 특수한 약물을 사용해서 인간으로 변장하고 있지만 그녀의 진짜 정체는 강아지 귀와 꼬리가 잘 어울리는 흑견족 출신의 미소녀다.
참고로 이미 조교는 끝난 상태.
덤으로 공화국 첩보기관인 T7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간부 클래스(T5)로 오팔 왕국을 총괄하는 실세 중의 실세다.
“카밀라님에게서 떨어져라…아니, 주십시오. 후계자 전하.”
그런 그녀를 그림자처럼 호위하고 있는 남자가 불쑥 튀어나오면서 그렇게 말했다.
붉은색 피부에 거구, 검은 선글라스가 인상적인 에이전트 스미스였다.
“함부로 끼어들지 마세요. 전하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입술을 씰룩거리면서도 얌전하게 뒤로 물러섰다.
예전에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신분은 아니었지만, 현재 리한의 위상은 공화국 정부에서도 특별 지시가 내려와서 한 나라의 정부 수반에 필적하는 국가의 귀빈으로 예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다.
아무리 T7의 에이전트들이 공무원 위에 공무원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공무원.
국가의 명령에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카밀라나 스미스하고는 다르게 뒤쪽에 도열한 다섯 명의 사람들에게는 긴장한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이기 이를 데가 없는 모습들.
갑옷 대신에 특별하게 제작된 특이한 타이즈 코스튬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였지만, 하나같이 일반인 아니, 대륙 유수의 내로라하는 무장들조차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만약에 어떤 팬이 그들을 봤다면 졸도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앵커리지 공화국에서 최고의 실력과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슈퍼 히어로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얼마나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미지수(카테고리 아웃).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대륙 최강을 논하는 자리에서 누구 하나도 빼놓지 않고서 이름이 거론되는 검증된 실력자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면면을 살펴본 리한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투덜거렸다.
“레이디 나이트에 라 호라크티, 브라더 기간테스, 미스 주피터, 플래시 보우…엠프리스에게는 최고 중의 최고만 선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말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애매한 라인업이군.”
“죄, 죄송합니다!”
카밀라는 잽싸게 허리를 숙이면서 사과했지만 슈퍼 히어로들의 눈동자에서는 불똥이 튀어올랐다.
“뭐가 어쩌고 저째?”
“S급도 안되는 조무래기 새끼가 감히 우리 실력을 평가절하하다니 간덩어리가 배밖으로 튀어나왔구나?”
“고용주면 다야? 사람이 기껏 바쁜 시간을 쪼개서 왕림해 주셨구만…”
“후후후후. 건방진 모습도 가련히 사랑스럽군. 여의 하렘에 초대해서 밤새도록 우는 소리를 들어보고 싶구나♡”
“…”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레이디 나이트를 제외하면 모두가 한 마디씩 시끄럽게 떠들어댔지만, 리한은 가볍게 무시해버리고 카밀라를 다시 한번 질책했다.
“로드 데우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소드 엠퍼러 정도는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T7의 섭외 능력이라는 것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느냐?”
“저, 정말로 면목 없습니다. 뭐라고 사과해드려야 할지…”
“야!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노란 머리를 빗자루처럼 세워 올리고 있는 플래시 보우가 화를 내면서 다가왔지만 리한이 다섯 손가락을 펼치자 순간적으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당 천만 대륙은화다.”
“…응? 아, 아니…네???”
“너희들을 고용하기 위해서 내가 지불한 돈이야.”
“아…고용주님이셨구나. 진작 말씀을 해주시지…크흠.”
“짖어.”
“멍멍!!”
한순간에 충실한 애완견으로 돌변한 그는 바짓가랑이에 머리를 문질러대면서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부렸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라.”
“충성!”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저희가 비록 국가에 귀속된 신분이라서 이렇게 좋은 액수로 계약하는 경우가 드물다고는 하지만 도대체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고…”
“성공 보수로는 두 배를 지불할 예정이다.”
쿵!
“어떤 새끼를 조져드릴까요? 고용주님.”
재빠르게 무릎을 꿇어버린 라 호라크티가 손바닥을 비비며 딸랑거렸다.
“여는 돈보다는 그대하고 보내는 진한 하룻밤을 보수로 받아가고 싶다만♡”
“너어는 진짜…”
옷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새하얀 천 하나로 은밀한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리며 떠 있는 반란의 여인, 미스 주피터가 신음처럼 토해내는 음담패설에 브라더 기간테스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 때, 다른 일행들하고는 다르게 지상을 응시하면서 시종일관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레이디 나이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이 계약…성급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좋겠군.”
“레이디 나이트?”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천만 대륙은화라고! 천만 대륙은화!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만한 벌이가 웬 말이냐고! 솔직히 나는 억지로 끌려왔다고 생각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부폐하 만만세라고 외쳐버리고 싶을 지경인데…”
“돈이 아무리 좋아도 목숨하고 비교할 수는 없잖아?”
“…뭐???”
쿵! 쿵! 쿵! 쿵!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발 머리와 조그마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레이디 나이츠가, 묵직한 발걸음으로 지축을 울리면서 다가와 질문을 했다.
“우리가 쓰러트려야 하는 상대가 설마 저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터무니없는 괴물은 아니겠지?”
이 말에 리한은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그래도 하나 정도는 쓸만한 녀석이 있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