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4화 〉 재의 귀인(H이벤트 포함)(8)
* * *
“이해할 수가 없군. 승산이 없는 상대에게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어리석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네 말이 맞아.”
쿵! 쿵!
리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바닥으로 쌍검을 꽂아 넣었다.
터무니없는 태세 전환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애쉬.
“…”
“그래도 이렇게 만난 것이 인연인데 말이야. 심심하면 옛날이야기에 빠져보는 것은 어때? 예를 들면 나의…아니, 우리의 잃어버린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 입으로 직접 말해주는 것도 괜찮아 보이고 말이야.”
“거절하지. 네가 알아봤자 의미는 없어.”
얼굴에 있는 불꽃 흉터를 보여주면서 살며시 압박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리한은 물러서지 않으며 재차 요구했다.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가해자인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 이렇게 잘생긴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흉측한 상처를 새겨버리다니 너무하잖아. 게다가 너만 보고 있으면 흉터가 욱신거리는데,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책임질 거야?”
“불의의 사고였다. 그냥 받아들여라.”
“그렇게까지 해서 감추고 싶은 과거가 뭔데?”
“…”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좋아. 가르쳐주고 싶지 않으면 마음대로 해, 사실은 들을 필요도 없어.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뭐라고?”
“지금 반응을 보고 확신했어. 네가 일천월환쌍극진경의 진짜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필사적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 그것을 네가 어떻게…?”
무표정한 애쉬가 처음으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옛날이야기를 해주지. 쓸데없이 입이 무거운 너를 대신해서 말이야. 우리 아슈킬 가문의 진실과 네가 지난 천 년 동안 지켜온 비밀에 대해서 남김없이 까발려주겠어.”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물론이야.”
눈매가 가늘어지고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금방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거둬버리면서 자신의 쌍검을 뽑아서 땅바닥 꽂아버렸다.
“좋아, 자진해서 스스로 떠들어주겠다면 마지막까지 들어주도록 하지.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해봐야 하니까 말이야.”
“사실이라면 그 기억마저도 제거해버릴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정말로 융통성이 부족한 녀석이군.”
터무니없는 협박을 들었지만 리한은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여유롭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나갔다.
“첫 번째 실마리는 우리 가문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되었다는 거였어.”
“…”
애쉬는 계속하라는 것처럼 고개를 까닥거렸다.
“흑발흑안에 황색이 감도는 피부. 뭐, 이 정도는 유레시아 대륙. 특히 오팔 왕국처럼 다양한 유색인종이 뒤섞여버린 나라에서는 대수로운 신체 특징이 아니지. 우리 가문의 역사를 봐도 초대 가주들은 동방인이라고 불렸지만 무려 천 년 동안이나 이 땅에 눌러앉아서 살아왔으니까 말이야. 이제는 누구도 아슈킬 가문을 동방 출신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아. 애초에 그런 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많은 인종이 섞여버렸으니까 말이야.”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고지식한 너에게 인간 세상의 천년이라는 시간이 그만큼 길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싶어서 말이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터무니없이 길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 결심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동방…아니,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 누구도 우리 가문의 부활과 귀환을 기다리지 않아. 네가 하려는 일은 조용한 세상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려는 거야. 그것도 아무런 명분도 없이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혈겁血?에 불과할 뿐이지.”
“…”
고오오오오오오오!
입술을 깨물며 적의로 가득한 시선으로 살기를 뿜어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우리 가문이 얼마나 잘나서 너처럼 강력한 존재를 하수인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가주만 출입할 수 있는 금서고를 뒤져서 역사를 공부해봤지. 그랬더니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줄줄이 튀어나오더군.”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는 리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예를 들면 우리 천년 가문을 섬기는 4대 세경가가 사용하는 무공이라는 것들이 말이야. 커딩가 가문에서는 혈마血?가 사용했다는 혈풍도법, 투크 가문에서는 구양신공을 계승하고 있지. 모두 중원에서는 희대의 마공??으로 불리는 것들인데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전수받아서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
살기는 사라졌지만 애쉬는 여전히 입술을 깨물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을성 있게 마지막까지 들어볼 요량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아스트라세 가문이 사용하는 설영빙천공도 마찬가지야. 머리가 백발로 변하는 무공…이름을 흔적도 없이 바꿔버리기는 했지만 원래는 소수마공?手??이라고 불리는 것과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더군.”
“…정말로 쓸데없는 지식까지 깊숙하게 파고들었군.”
“처음부터 이상한 무공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예를 들면 평정심을 유지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는 조건. 뭐, 부동심 자체는 무공 수련에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소양이라고 하지만 설영빙천공은 그게 너무 심해. 멘탈에 따라서 위력이 터무니없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정종의 무공이라고 보기는 어렵잖아?”
“큭.”
“더 재미있는 사실은 말이지. 이 희대의 마공들이 정작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인 중원에서는 완벽하게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거야. 왜냐면 하나만 돌아다녀도 세상에 혈겁을 일으키는 정신 나간 무공들이니까 말이지. 무림??에서 작정하고 싹을 잘라버렸다고 하더군.”
잠시 숨을 고른 리한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실마리가 바로 이거야. 중원에서는 그렇게 철저하게 탄압당한 마공들이 어째서 유레시아 대륙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시간 끌지 말고 말해라. 정답을 알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냐?”
애쉬가 으르렁거리면서 말했다.
“맞아. 누군가가 중간에서 문제가 되지 않도록 무공 자체를 고쳐버린 거야. 위력을 약화시키는 대신에 부작용을 없애버린 거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설영빙천공이야. 베이스가 되는 소수마공은 오직 여자만…그것도 천음지체라는 특수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수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 게다가 수명을 깎아서 젊은 나이에 요절시켜버리는 무시무시한 마공이지.”
혈풍도법은 피에 미쳐서 피를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무공이고 구양신공은 구음진경을 선행해서 익히지 않으면 양기를 주체하지 못해서 머리가 터져 버린다.
하지만 세경가에서 계승하고 있는 무공들에는 이런 부작용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억눌러져 있다고 해야 옳았다.
“오죽하면 동방에서 찾아온 여행자들이 세경가에서 사용하는 마공들의 이름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가, 직접 감상하고 난 후에‘이름만 똑같고 파생되어서 만들어진 별개의 무공이다’라고 평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겠어?”
“…”
동양에서 넘어온 무공들이 유레시아 대륙에서 변형되어 다른 이름으로 전파되는 것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만한 소지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워버렸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며 정착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지.”
리한이 재차 입을 열었다.
“도대체 누가 이 무공들의 마성??을 억눌렀을까? 희대의 마공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무공들을 이렇게 완벽하게 뜯어고치는 작업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야. 차라리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편했을 거야. 누군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무공들이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전수해주지 않았다면 말이지.”
으드드드득
어느새 수비적인 자세로 팔짱을 끼고 있는 애쉬.
어깨에서 피가 나도록 힘껏 부여잡으면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정말로 대단하지 않아? 세상에 이렇게 많은 마공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 존재하고 있다니 말이야. 도대체 얼마나 많은 원한과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으면 이렇게 극단적인 무공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냈을까? 그리고 그 증오를 천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못하는 너 같은 복수귀까지 데리고 있고 말이야.”
저벅
리한이 한 걸음 다가섰고 자신도 모르게 위축당해버린 애쉬가 한발 물러서 버리고 말았다.
“일천월환쌍극진경. 아무리 그래도 이 이름은 지나치게 길지.”
“…그 이상은 말하지 마라.”
“조금 더 간략하게 줄여서 이렇게 불러보는 것은 어때? 일월신공 아니…”
“그만!”
“마교의 천마신공이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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