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화 〉 재의 귀인(H이벤트 포함)(7)
* * *
“이 녀석이…”
잠시 후에 허둥지둥 달려온 치료사가 간단하게 응급 처치를 했고 래리를 조심스럽게 들것으로 옮겨 실었다.
처음부터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그를 처형할 무대는 따로 있었다.
래리를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 기강과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재판에 세워서 사형 판결을 받게 해야만 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말이지.’
씁쓸한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면서도 미련을 버리고 돌아서려는 순간.
“리한!”
“무슨 일이십니까, 숙부님?”
“애쉬님을 쓰러트릴 생각이냐?”
‘스스로 그 이름을 언급하다니?’
얼굴을 찌푸리면서 인상을 쓰는 것을 보면 금제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주먹을 쥐고 사시나무처럼 떨어대는 것을 보면 단순하게 그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반드시…이겨라! 일천월환쌍극진경을 재현시킨 너라면…해낼 수 있어! 우리 가문…천년 숙원을 네 손으로…반드시, 쿨럭!!”
“아버님!”
창백한 얼굴로 피를 토해내면서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물러서라!”
서둘러서 상태를 살펴보니 뇌출혈이 일어나고 있었다.
금제에 저항하면서 생각하면 안 되는 일을 생각해버리고 꺼내면 안 되는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내 버린 대가가 돌아온 것이다.
정신력은 대단했지만 단순하게 응원 한 마디를 위해서 멍청한 짓거리를 했다.
그래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파지지지직!
리한은 마스터 코어의 힘으로 래리를 치료하고 미쳐 날뛰는 진기를 다스려주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물러서면서 당황한 것처럼 연기를 했다.
“숙부님의 용태를 살펴라, 어서 빨리!”
“네, 알겠습니다!”
진맥을 마친 치료사가 알고 있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무사하시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울혈을 토해내신 충격으로 기절한 모양인데…덕분에 용태는 오히려 안정이 되셨습니다. 안색도 원래대로 돌아왔고 호흡과 맥박, 진기의 흐름까지 모두 정상입니다!”
“다행이군요.”
데일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했다.
“숙부를 잘 돌봐드려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아, 네! 이래저래 감사했습니다. 형님 전하!!”
“…”
자신의 아버지를 눈앞에서 쓰러트렸는데도 불구하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배웅해 왔다.
존경과 선망으로 가득한 시선.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습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입맛이 쓰군.’
리한은 래리 일가를 철저하게 파멸시킬 생각이었다.
우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돌로레스는 이미 자신의 성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카트리나는 그녀를 철저하게 조교해서 이름과 과거, 외모와 정체성까지 모조리 붕괴시키고 오직 주인님에게 복종하는 완벽한 육변기로 훈련시키겠다고 말했다.
래리는 희생양으로 만들어진 가짜 돌로레스와 함께 광장에서 처형될 것이다.
데일은 약속대로 살려둘 예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이가 어려서 정상참작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불만 세력의 구심점이 될만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모아서 한꺼번에 싸그리 일망타진해버리는 것으로 완벽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할 생각이었다.
리한은 한술 더 떠서 이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마르텔 대모에게 맡기려고 했다.
겉으로는 모범적인 후계자를 연기하면서 배후에서 교묘하게 그녀를 조종해서 더러운 일을 모조리 처리하게 하고, 제니아의 개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은 상처 하나 없이 만백성과 온 세상의 축복을 받으면서 방백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야말로 악마의 계획.
가장 빠르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문제는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라고 되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악랄한 수법이었다.
더 원의 미래 하나만을 생각한다면 틀림없는 베스트 플랜.
자신들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며 멸망을 향해서 달려나가고 있는 인간 따위를 걱정하거나 배려해줄 필요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래리와 데일이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버리자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인간처럼 잔인해질 필요는 없어. 두 사람의 단전을 파괴하고 조용한 곳으로 유배를 보내버리자. 그곳에서 평화롭게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흔들어버렸다.
‘아니. 지금 당장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섣부르게 결정하지 말도록 하자. 일단 눈앞에 들이닥친 일부터 해결해야지.’
리한은 래리 부자에 대한 처분을 보류하기로 했다.
****
“애쉬님을 쓰러트릴 생각입니까?”
완전무장한 이리나가 새하얀 백발을 휘날리면서 살기등등하게 질문해 왔다.
“…요즘 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자주 들켜버리는 기분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다들 독심술이라도 터득한 건지…”
“도련님이 생각하시는 것쯤은 뻔히 보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일이니까요!!”
“후후후후. 열렬하게 사랑을 고백하다니 귀여운 녀석♡”
“스, 슬그머니 끌어안으면서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뭔데?”
“저도 이번 싸움에 참가하게 해주세요!!”
“안 돼.”
리한이 딱 잘라서 거절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 가망이 없는 싸움에 끌어들여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 둘, 아직 정확하게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너도 틀림없이 임신했을 거야. 아빠인 나한테 뱃속의 아기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라는 소리야?”
“그, 그건…”
“임산부는 빠져 있어. 아빠는 죽어도 자식이 살아있으면 유지를 이어나갈 수 있는 거니까 말이야.”
만약에 이번 싸움에서 자신이 죽으면 천년 가문은 이리나의 자식이 물려받을 것이다.
그리고 더 원의 새로운 퍼스트 선은 오리나의 자식이 계승시키도록 측근들에게 지시해서 실패를 대비해서 미리 신변을 정리해놓은 상태였다.
“도련님이 죽으면 유지 따위가 무슨 소용이죠? 제가 그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것처럼 보이세요? 아스트라세 가문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복수할 겁니다. 설령, 이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 나간다고 해도…”
“평온의 검사하고 싸우지 말라는 협박처럼 들리는데?”
“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이미 충분하지 않습니까? 도련님께서는 오르드리를 정복했고 제니아를 평정하셨습니다. 마르텔 대모님에게 인지를 받지 않아도 가주 자리를 물려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불만이라는 겁니까?”
“불만 따위는 없어.”
“그렇다면…”
“하지만 알아버렸으니까 어쩔 수가 없잖아? 눈앞에 세계 최강의 힘을 손에 넣을 기회가 왔는데 코앞에서 놓쳐버리다니 말이야.”
“네…?”
이리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마터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어. 하필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신해서 구슬리려고 하다니 말이야. 미안하지만 과거 따위로는 발목을 붙잡지 못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왔거든. 그러니까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고 본색을 드러내라…애쉬!”
화르르르르륵!
커다란 연극 장막을 불태우는 것처럼 주변 풍경이 일변하면서 새하얀 눈이 쏟아져 내리는 설원 한가운데 최종 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장소는 애쉬가 만들어낸 아공간이다.
검은색 단발머리에 공허한 눈동자, 가면 같은 얼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중성적인 외모.
아니, 애초부터 이 존재에게는 성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조차도 아니니까 말이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너에게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니군. 아슈킬 가문의 후계자와 결합한 이형의 존재여.”
“!!!”
감정의 고저 차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의 정체를 단숨에 까발려버리는 애쉬.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기는 했지만, 상대방의 능력이 자신을 초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범주의 사태는 아니었다.
“흐음,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제거하지 않다니…상당히 친절하시군? 아니면 우리 아슈킬 가문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린 건가?”
“틀린 말은 아니다, 이형의 존재여. 아슈킬 가문은 계약이 만료될 때까지 누구도 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핏줄을 수호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능하면 그대에게 뒷일을 맡기고 싶군. 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이형의 존재여.”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인정해줘서 고마운데…미안하지만 이쪽은 당신을 이대로 놓쳐버리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서 말이야.”
“불가능하다. 이미 계약은 끝났다. 그대에게는 시험에 응시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정말로 융통성이 부족한 녀석이로군.”
스르르릉
리한은 웃음을 터트리면서 일극과 월극을 뽑아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