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화 〉 재의 귀인(H이벤트 포함)(4)
* * *
‘리한?’
반가운 모습을 발견한 래리가 손을 들어서 인사하려고 했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슬그머니 그늘 속으로 숨었다.
그 기척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어버리는 리한.
“키가 많이 컸구나, 데일. 3년 전에는 내 허리까지밖에 되지 않던 녀석이 말이야.”
“후계자 전하를 뵙습니다!”
“딱딱한 말투는 집어치워라. 사촌지간이 아니냐? 그냥 형이라고 불러라, 아니면 옛날처럼 형아~라고 부르던가.”
“저, 전하에게 어떻게 그런 실례되는 호칭을…”
“쓸데없이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는 나아. 애늙은이도 아니고.”
핀잔을 듣고 부끄러운 것처럼 얼굴을 붉힌 데일이 우물쭈물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면…형님 전하라고 부르겠습니다.”
“하지만 남자다.”
“네???”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 그것보다 지내는 데 불편한 것은 없느냐?”
“세심하게 배려해주셔서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들은 것하고는 굉장히 다른 소리를 하는군. 네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하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손찌검까지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유폐되어서 스트레스가 쌓인 것이 아니냐?”
“그건 단지 그자들이 무능하고 한심해서 혼을 냈을 뿐입니다. 결코, 형님 전하에게 불만을 표출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무능하고 한심하다…한 마디로 나에게 불만이 있다는 소리군.”
“절대로 아닙니다!!”
빽하고 소리를 지르며 억지를 부렸지만 리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얕잡아보는 하인들은 모두 내가 직접 선별한 자들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아슈킬 가문을 시중들어온 사람들이고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프로 중의 프로지. 나의 뜻을 대변하고 나의 의지를 실행하는데 나무랄 데가 없는 자들이라는 소리다. 거기에 침을 뱉는다는 것이 곧 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냐?”
“지나친 비약이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찮은 자들이 형님 전하의 얼굴이 될 수 있겠습니까?!”
흥분한 소년의 주장에 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하찮은 자들은 나의 얼굴이 될 수 없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태어난 근본 자체가 다른 자들입니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귀태나 다름이 없는 쓰레기들이…”
짝!
“!!!”
뺨을 얻어맞은 데일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가 버렸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쓰레기 같은 소리를 주워듣고 떠들어대는 것이냐?!!”
“혀, 형님 전하…”
“형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한심한 녀석! 백성을 대표하는 것이 귀족이다. 반대로 백성의 모습이 그 나라를 누가 다스리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째서 외면하는 것이냐?!!”
“그건…”
“네가 신전 뒤편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알고 있다. 평범한 백성들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탐욕스러운 인간이 지나치게 불어나 버리는 바람에 생태계 균형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고 홀로세 대멸종이 눈앞에 있다고???”
“그 말이 틀렸습니까?”
“아니, 틀리지 않았어.”
리한이 딱 잘라서 말했다.
“그렇다면…”
“하지만 그게 일반 백성들 때문이라는 것은 위정자들이 지껄이는 거짓말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귀족이, 정치인이, 통치자가 그따위 개소리를 나불거려서는 안 돼. 이 세상을 이렇게 망가트린 범인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백성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산과 들의 초근목피를 벗겨내서 연명하게 만들고 목에는 멍에를, 손과 발에는 족쇄를 채워서 고혈을 빨아먹고 가축처럼 다루는 자들이 바로 우리 귀족들이란 말이다. 백성들이 지독하게 자연을 착취했다면 그렇게 지독하게 착취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도록 궁지로 몰아넣은 자들이 바로 우리다. 그런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다니. 네놈에게는 양심도 없다는 말이냐!!!!”
“!!!!!”
활화산처럼 쏟아져 나오는 열변에 압도당한 데일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면서 물러서 버리고 말았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소년의 눈동자.
“그, 그건…그렇다면 제가 한 일은…”
“거기까지!!!”
그늘 속에 숨어있던 래리가 달려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버님???”
“몰래 엿듣고 있었던 겁니까? 숙부님.”
“아, 아니. 그게…어쩌다 보니…크흠.”
리한이 능청스럽게 물어보자 겸연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그게 아니고 말이야. 거기까지만 해라, 리한. 우리 데일에게 충고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너무 그렇게 매섭게 몰아세울 필요는 없지 않느냐? 조금 더 부드럽게 돌려 말해도…”
“중간에 끼어들어서 굉장히 잘난 것처럼 말씀하시군요, 숙부님. 대역죄인 주제에.”
“으, 응???”
갑작스러운 팩트 폭행에 말을 더듬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애처럼 취급하니까 데일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삐뚤어졌던 겁니다. 제가 보기에 이 녀석은 숙모, 숙부 따위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근본이 괜찮은 녀석입니다. 이미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데일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형님 전하…저는…저는…도대체 무슨 짓을…흐으으윽, 흑, 흑…”
“신전 뒤편에서 네가 저지른 학살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용서받을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해라. 다만, 평생을 짊어지고 속죄하면서 살아가도록 해라. 우선은 세상을 배워라. 두 번 다시는 그따위 썩어빠진 남자의 궤변에 휘둘리지 않도록 자신의 주관을 바로 세우란 말이다! 알겠느냐?!!”
“네…네…네, 네! 형님!!”
어린 소년이 와락하고 달려들어서 리한의 품에 안기자 래리는 낙동강의 오리알처럼 무안해져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19살짜리가 7살에게 인생을 설교하여 개심시키는 아름다운 장면.
거기에는 마흔 줄에 들어서는 창피한 어른 하나가 눈치 없이 끼어들 수 있는 타이밍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뭐지 이건…”
“아직도 있었습니까? 숙부님, 정말로 눈치가 없으시군요?”
“아, 아니…그게 말이야…미안…”
어째서인지 주눅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사과해버리고 말았다.
“뭐, 됐습니다. 어차피 숙부한테도 볼일은 있었으니까요.”
“나한테 볼일이라니…?”
“대련을 부탁드립니다.”
리한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그렇게 부탁하자 래리는 고개를 갸우뚱해버리고 말았다.
“대련???”
****
잠시 후.
두 사람은 녹색금의 별궁에 마련되어 있는 대련장에서 무기를 들고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진검 승부.
리한은 싸움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서 일극과 월극을 사용하지 않았고 래리와 똑같은 조건으로 미스릴 쌍검을 잡아 들었다.
“…레스터 장군의 말이 맞았군. 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조카야.”
“조금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똑같은 무공을 수련한 사람하고 싸울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래리는 A+급의 무장이다.
차원 자체가 다른 애쉬를 제외하면 제니아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실력자.
하지만 지난 전쟁에서는 어처구니없이 항복해버리는 바람에 명성에 걸맞은 실력과 활약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네 무공 성취가 대단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연륜의 힘을 얕보지 말거라. 같은 가문의 무공이라고 해도 너와 나의 배움에는 깊이의 차이가 다르다. 극성의 성취를 이룩한 월환쌍극의 힘! 나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곧 네 무공에 끝을 물어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검을 잡았더니 성격이 바뀌었다.
자신만만하기 이를 데가 없는 래리의 모습에 리한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터무니없이 광오하시군요. 하지만 제가 원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가문의 무공의 모든 것을 보여주십시오. 이 무공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진짜 정체???”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에 결투를 지켜보는 데일의 목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힘내십시오, 형님 전하!!”
“데, 데일…? 아빠가 아니라 리한 형을 응원하는 거니???”
“아, 그게…아, 아버지는 충분히 강하시니까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자식을 NTR로 빼앗겨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해버리는 래리.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승부에 집중해주십시오, 숙부님.”
“큭, 오냐! 덕분에 의욕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구나. 오늘 내가 너에게 하늘 밖에 하늘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마!!!”
“시합 개시!!!”
쿵!!!!
심판을 보는 하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신월보를 극성으로 발휘해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