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화 〉 완벽한승리(8)
* * *
‘마지막까지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후계자가 아무런 승산 없이 총공세로 전환할 리가 없지 않느냐? 이 전쟁은 졌어. 어서 빨리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나가야 해!’
아니나 다를까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래리를 손절하기로 결심한 하이잘.
자신을 뒤따르는 측근들과 함께 텔레포트 에어리어로 빠르게 이동했다.
“충!”
담당 마법사가 그를 보고 경례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래리님의 명령으로 원군을 데려오려고 하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는 거지만 오르드리로 이동시켜 줄 수는 없겠나?”
“죄송하지만 적의 방해로 중, 장거리 텔레포트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알고 있지만 일단 물어본 걸세.”
“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입맛이 썼다.
‘조금이라도 빨리 제니아에서 도망쳐야 해. 안타깝지만 가문의 재산과 처첩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겠군. 그래도 제국으로 망명하며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을 거야. 은요호 기관에도 꾸준히 협력해 왔고 선물도 가져가니까 말이야…’
하이잘은 측근들이 들고 있는 ‘짐’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제10 성벽으로 전송해주게. 우리 가문이 자랑하는 투견대를 데리고 돌아오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한 편.
제4 성벽 3층 복도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끈질기게 저항하는 적의 잔존 병력과 암살자들의 격돌.
[연계 무투기. 다크 스트링 & 루나 임베르!!]
투콰콰콰콰콰쾅!
“크아아아아아아악!!”
어지럽게 휘날리는 그림자 채찍이 아다만타이트 파비스를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 섬광이 골렘 슈츠의 헤드 기어와 함께 중무장 보병들이 머리를 단숨에 짓뭉개버렸다.
질과 소월의 눈부신 연계 플레이.
그리고 그녀들을 뒤따르는 암살자들의 거침없는 파상공세에 수비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뭐, 뭐야 이 녀석들. 터무니없는 괴물들이잖아?!”
“하나같이 A급 이상의 실력자들이야.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무장이 남아돌면 이런 식으로 투입할 수가 있지???”
“이런 것은 반칙이야! 규격을 벗어난 무장들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크아아아아아악!”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절망한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다, 당황하지 마라. 적들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고작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아! 조금만 버티면 원군이 도착할 거다. 죽을 각오로 통로를 사수해라!!”
칠소룡의 일원인 할이 할버드를 휘두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또한 A급의 무장.
하지만 말을 더듬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대관절 어디에서 갑자기 이런 괴물들이 튀어나왔단 말인가?!’
퍼퍼퍼퍼펑!
“크으으으으윽!”
중무장 보병을 반으로 갈라버리며 날아오르는 질의 다크 스트링을 간신히 받아냈지만, 한 번의 합을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손아귀가 찢어져 버리는 것처럼 묵직한 충격이 전달돼 왔다.
슈슈슈슈슈슉!
채채채채채챙!
뒤이어 날아드는 암살자들의 암기 세례를 선풍처럼 휘두르는 창으로 받아냈다.
푸슉, 푸슉푸슉!
“커허어어억!”
“대장님!!”
전부 막아내는 데 실패.
금강투합체를 박살 낸 암기들이 몸 속에 박혀들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
아닌 게 아니라 실재로도 반쯤 홀려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전투는 좁은 통로를 수비하는 이점과 장비, 수적으로도 우위에 있는 래리의 군대가 소수의 암살자들을 압도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과가 정 반대.
이유는 전장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조건 때문이었다.
사방팔방이 마나를 흡수하는 정체불명의 금속에 둘러싸여 있는 좁디좁은 통로.
검강과 무투기는 물론이고 금강투합체마저 약해져서 무장 자체의 활약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질과 소월, 그리고 암살자들은 리한이 마스터 코어로 만들어준 특수한 보호막으로 전심을 감싸고 있어서, 에너지 형태로 발사하는 무투기만 사용하지 않으면 본래 실력을 고스란히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싸우다 보니 B급 무장은 A급으로 A급은 S급, 심지어는 카테고리 아웃을 상대하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특히 할을 비롯해서 수비군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든 광경은 암살자들이 중무장 보병들을 벌레처럼 뭉개버리는 모습이었다.
마나전도율이 가장 낮은 아다만타이트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골렘 슈츠.
원래대로라면 C급 무장에게도 상대가 되지 않는 그들이지만 이 특수한 환경에 한정해서는 B급 무장을 상대해도 밀리지 않는 강력한 힘과 방어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물론, 속도 자체는 여전히 느려 터졌다.
그래도 기동력이 제약될 수밖에 없는 좁은 통로를 지키고 수비를 굳히면 아무리 막강한 무장이라고 해도 돌파하는 데 애를 먹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막강한 중무장 보병들이 눈앞에서 펑펑 터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과 공포, 그리고 그지깽깽이 같은 상황.
결국에는 눈앞에 있는 괴물(?)들을 상대로는 일말의 승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할은 부하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퇴, 퇴각! 퇴각! 제5 성벽으로 물러나서 전열을 재정비해라! 전령은 어서 빨리 이들의 존재를 아군에게 알려라. 여기는 지옥이다! 원군은 절대로 보내서는 안 돼!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전령을 보낸 그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괴물들을 바라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할버드를 힘차게 움켜잡으며 필사의 각오를 다졌다.
“내가 바로 제니아 최고의 창술을 자랑하는 할 디란디다! 이곳을 지나가고 싶으면 내 시체를 밟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질과 소월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죄송하지만 저희 목적은 애초부터 당신의 신병을 확보하는 겁니다.”
“응???”
“주인님께서 당신에게 관심이 많으시거든요.”
“관, 관심이라니? 잠깐만…지금 뭔가 혼란스러워서 그러는데 기다려 봐. 다가오지 마! 다, 다가오지 마!!”
“걱정하지 마세요. 아프지 않도록 살~살~ 기절시켜드리겠습니다.”
“후후후후후후후.”
“꺄아아아아아악!!”
할 디란디.
흡혈귀와 바니걸 소녀, 그리고 자신의 몸을 원하는(?)리한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공포와 트라우마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
또 다른 한 편.
제4 성벽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래리의 원군이 성문을 개방하고 출병했다.
쿠구구구궁!
“다행스럽게도 제4 성벽의 후문이 개방되어 있군.”
중얼거리는 남자의 이름은 마카로프.
칠소룡의 일원으로 6서클 엑스퍼트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배틀 메이지였다.
“아군의 성문을 관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면서 적들에게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하의 말대로 병장기를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좋아, 전군 돌격! 위기에 빠진 아군을 구하고 제4 성벽을 탈환해라!!”
우오오오오오오오!!
두두두두두두두두!
쩌렁쩌렁 울리는 마카로프의 호령과 함께 무섭게 3천 명의 원군이 지축을 울리며 판달 대교를 질주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리한은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녀석들.”
피유유우우우우!
다시 한번 날아오르는 신호탄.
펑! 퍼퍼퍼퍼펑!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불꽃들이 요란하게 퍼져 나갔다.
웅성웅성!
[이게 무슨 일이지?]
[저 위에 있는 것은 설마 후, 후계자???]
[공격! 공격해라! 녀석만 처치하면 이번 전쟁은 우리가 승리하게 된다!!]
흥분한 마카로프가 명령을 내리자 원군은 물론이고 제5 성벽을 지키는 모든 병사와 마법사들이 일제히 리한을 조준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투콰콰콰콰콰쾅!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리폰들의 포효와 함께 갑작스러운 폭발에 휘말린 다리 위에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악!!]
[저, 적의 기습이다!]
[말도 안 돼! 도대체 어디에서 갑자기…서, 설마!]
마카로프는 다급하게 강으로 시선을 향했다.
쏴아아아아아
그것은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가능성 하나가 현실로 일어나는 악몽 같은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아르고스 라인이 무력화되는 순간.
플레게톤 강을 지켜주는 오벨리스크는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 기능이 멈춘 것은 오늘 밤의 일이다.
그러므로 눈앞에 일어나는 광경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국화 문양과 직도.
아스트라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진 수많은 함선이 스톰 가드를 포위하는 형태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제 누구 화력이 더 강할까?”
마치 날개가 펼쳐지는 것처럼 리한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천 마리의 그리폰 라이더들이 주문을 영창하며 저마다의 무기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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