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9화 〉 폭풍속으로...(3)
* * *
“나에게 감히 미쳤다는 망발을 지껄이다니 조교가 부족한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질.”
“맞습니다, 언니는 조금 더 주인님 귀한 줄 알아야 한다니까요♡”
리한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은색 단발머리의 흡혈귀가 화면 위로 불쑥 올라오면서 그렇게 말했다.
눈동자에는 하트 마크가 새겨져 있고 콧등으로 백탁의 액체가 흘러내리는 그녀.
순진한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나른한 표정에서 요염함이 배어 나왔다.
[지, 질이 왜 거기에서 나오는 거예요? 설마…저하고 이야기하는 내내 계속…히끅?!]
리한의 우람한 물건이 화면 너머로 클로즈업되자 화들짝 놀란 사라가 귀엽게 딸꾹질했다.
순식간에 되살아나는 그 날 밤의 추억(?)에 얼굴을 붉히며 허벅지를 맞비벼대는 그녀.
“레즈 플레이는 좋아.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이 내 여자가 된 후에 허락해주는 거야. 네 배에 새겨진 표식, 자신이 누구의 여자인지를 잊어버리지 마라. 오르드리가 함락되는 날이 네 처녀의 제삿날이다.”
[진심으로 미쳤어.]
소름돋는 진짜 ‘광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구, 굳이 되새기지 않아도 배신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놀리지 마세요! 이만 끊겠습니다!]
지이이잉
후다닥 통신을 종료하고 도망쳐버렸다.
“귀여운 녀석.”
“헤헷♡”
리한은 그녀를 대신해서 펠라치오를 하는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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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도시 바렌탈은 스톰 가드에서 불과 이틀 거리에 있는 오팔 왕국 최대 규모의 평지??성이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환호(해자)는 길이가 가장 짧은 것이 무려 20M를 육박.
마치 호수 한가운데에 성이 있다고 생각될 정도다.
S급 무장이 전력을 때려 박아도 무너지지 않는 두께와 깎아지른 높이를 가지고 있는 성벽은,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만들어낸 건축물이 얼마나 크고 웅장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최대 100만 명이 상주할 수 있는 방대한 성내 면적.
적에게 포위되어도 몇 년을 버틸 수 있는 식량과 물자를 가지고 있기에 이곳을 함락시키려고 하다가 전쟁이 끝나버렸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면 마법 오염 지대가 많다는 것.
천년 동안 치열하게 싸운 역사를 증명하듯이 서로에게 전략 마법을 퍼부어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서, 주변의 평지 지대 일부와 성벽 몇 곳이 흉물스럽게 무너진 모습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마법 오염 지대를 모조리 정화해야겠군.’
마나가 미쳐 날뛰는 지역에는 어떤 생물도 살아갈 수가 없다.
신체 형태와 세포 구조가 매분, 매초 뒤죽박죽으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매년 100번도 넘는 전략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들의 진정한 광기.
리한은 자신이 만들어낸 가짜 광기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바렌탈에 입성한 그는 항복한 요새 사령관에게 무기한 정직 처분을 내렸다.
무혈입성을 대가로 군부의 중립을 요구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서 쉬라고 명령한 것이다.
‘뒤통수를 때리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바렌탈을 지키는 요새 수비군은 4만 명이었다.
대수로운 숫자는 아니지만 오르드리를 공격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돌변한 그들이 요새를 점거하고 후방 보급로를 차단해버리면 이만저만 성가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리한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모든 지휘관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다.
당연히 거센 반발이 쏟아졌지만 이미 대군을 이끌고 입성해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뒤늦게 땅을 치면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현재까지 리한의 휘하로 집결한 군세는 25만, 그것도 모자라다는 것처럼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사실상 제니아 전체 병력의 절반 가까이가 손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공성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성내로 들어온 대군에게 저항할 수단은 없었다.
게다가 리한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군인들에게 후한 대접을 약속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고민 끝에 전향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도저히 납득하지 못한 일부만이 정직 처분을 받아들였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전쟁이 끝나도 그들이 돌아올 자리는 없을 거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요새 사령관으로는 벨라 여남작이 취임하게 되었다.
****
바렌탈까지 수중에 넣은 리한의 위세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수도를 손에 넣지 못했다뿐이지 사실상 가주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귀족들을 앞다퉈서 그에게 얼굴도장을 찍으려고 했다.
쏟아지는 귀찮은 인사치레.
그래도 전쟁이 결판나기는 전에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세멜레의 지팡이로 만들어낸 분신에게 그 역할을 떠넘겨버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시간을 내서 여자들이 평소에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훔쳐보기로 했다.
대련장에서 발견한 두 사람.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양하지 말고 언제든지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공손하게 포권하고 곧바로 자세를 갖췄다.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흑색 무복과 백색 무복을 차려입은 그녀들의 눈동자에는 장난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진검승부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지도 대련.
무공에 입문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오리나가 A급 무장(궁수)인 헤스티아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림자에 숨어서 두 사람의 늘씬한 몸매를 비교해 감상하던 리한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해버리고 말았다.
‘오리나가 많이 성장했군. 철딱서니 없는 시골 소녀가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여류 격투가의 티가 나.’
“하아아압!”
쿵!
호기롭게 진각을 밟으면서 선공을 가하는 그녀.
탁!
“움직임이 너무 직선적입니다!”
헤스티아가 정권을 흘려 쳐내면서 그렇게 외쳤다.
“큿!”
튕겨 나가는 반동을 이용해서 되돌려차기를 시전했지만, 몸을 회전시키는 사이에 상대가 밀착해버리는 바람에 타점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밀쳐져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마운트 포지션을 내준 오리나.
“재치있는 시도였지만 너무 느렸습니다. 심지어 망설이셨군요. 초심자가 쓸데없이 생각이 많으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순간의 판단이 목숨을 좌우한다고 생각하세요!”
“…한 수 배웠습니다.”
패배를 인정하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분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완벽한 핸디캡 매치다.
내력과 무공을 사용하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신체 능력으로 싸우는 격투기 대련.
하지만 헤스티아는 이어지는 대련에서도 오리나를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놀았다.
최종 스코어 10 : 0의 완패.
“수고하셨습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수, 수고하셨습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헤스티아하고는 반대로 오리나는 바닥에 대大자로 누워서 숨이 넘어갈 기세로 헐떡거렸다.
그런 두 사람에게 란란과 린린이 조용히 다가가서 타올을 건네주었다.
“학습이 빠르시군요. 이대로 정진하시면 금방 빛을 보실 겁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신체 능력은 물론이고 내력과 무공 수위 모든 면에서 몇 달 전까지는 초보자였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하십니다. 특히 오늘은 기백이 대단하시더군요. 어지간한 병사보다…”
“하지만 죽었다가 깨어나도 태중양생술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지는 못하겠죠?”
“그건…”
‘응?’
헤스티아의 말문이 막혔지만 몰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리한의 눈동자도 휘둥그레졌다.
“오늘 기백이 남다르게 느껴지셨다면 제 나름대로 발버둥을 쳐봤던 거예요. 제가 죽었다가 깨어나도 무장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을 테니까…이런 제가 주인님의 아이를 가져봤자…”
“…그런 말씀 하시지 마십시오, 오리나님. 주군께서 그런 것으로 자신의 여자를 차별할 리가…꺄악?!”
“꺅?”
갑작스럽게 들려온 비명에 깜짝 놀란 오리나가 자신의 얼굴에 덮은 타올을 치웠다.
눈앞에는 어느새 다가온 리한이 쪼그려 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자빠졌군.”
“주, 주인님.”
“내가 누누이 말했는데도 그렇게 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틀림없이 임신한 것이렸다? 그런데 감히 아버지인 나를 제쳐놓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먼저 이야기하려고 해??? 언제부터냐? 언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냐?”
웅성웅성
이 말에 대련장에 있는 다른 여성들이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신을 예의주시하며 쳐다보자 빨개진 얼굴로 소심하게 입을 여는 오리나.
“새, 생리가 벌써 한 달 넘게 오지 않아서…꺄아아아아악!!”
다음 순간에 리한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내 아이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