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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4화 〉 홀로세 대멸종(8) (334/429)

〈 334화 〉 홀로세 대멸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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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마라!”

데일의 눈을 가리는 노먼.

하지만 그 손을 크라테스가 붙잡아 떼냈다.

“끼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제정신이냐? 애한테 보여줄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지! 권력자들의 엉덩이를 닦아주면서 살다 보니까 그렇게 당연한 상식이 마모되어버릴 정도로 썩어버린 거냐?”

“네 말대로 그분들을 가까이 모시며 배운 것이 있지.”

“오호라, 그러셔?”

“윗사람들의 생각을 우리처럼 하찮은 아랫것들이 함부로 지레짐작해서는 안 돼. 친구로서 충고하지. 물러서라! 너 따위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애초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호들갑을 떠는 꼬라지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지 않느냐?”

“그건 네놈이 뭔가 생각이 있는 줄 알고…”

“크라테스 경!”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여자가 당하는 끔찍한 범죄를 적나라하게 목격한 소년이 자신의 주치의를 불렀다.

“네, 도련님!”

“이제 슬슬 가르쳐주십시오. 폴리의 과거와 데피리스 교단이 어찌하여 이런 끔찍한 일이 만연하도록 내버려 두는지 말입니다.”

“폴리?”

예상하지 못한 이름에 놀란 노먼이 커다란 눈동자를 끔뻑거렸다.

“그녀하고 아는 사이십니까?”

“알다마다, 우리 구제소에서 허드렛일을 도왔던 아이야. 근성 자체가 썩어빠진 버러지들하고는 다르게 눈치도 빠르고 싹싹한 녀석이었지. 이 시궁창을 빠져나가겠다는 의지가 남달랐어.”

꿀꺽­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지인을 마주한 데일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그, 그래서 어떻게…”

“재작년 즈음에 성찬식에 뽑혔어. 간택에도 성공해서 지체 높은 집안의 하녀로 들어갔다고 하더군.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던지…뭐, 인신매매에 가까운 방식이라서 무조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지만 밑바닥 인생에서 노블 마크를 달 수 있는 게 어디야?”

“모든 죄를 사면받고 수천 대 일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선택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프리미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행운의 상징이라는 거죠.”

“표현이 그렇지만…이 새끼 말이 맞아. 적나라하게 말하면 귀족, 부르주아 나리들이 하나쯤 사들여서 집안에 액막이로 쓰거든. 덕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이 유지되는 거지.”

“그럴 수가…”

터무니없는 사실을 어디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요즘 폴리에게 오는 연락이 끊어져서 걱정이야. 어머님 소식도 전해드려야 하는데…”

“그녀에게 가족이 있었습니까?”

“안타깝게도 며칠 전에 돌아가셨어. 이 바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안타까웠어. 폴리에게도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고 말이야.”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니…”

“꼬맹이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기는 한데, 지난 일이니까 뭐…사실은 폴리가 어머니를 우리에게 맡겼거든. 병세가 위중해서 치료비도 한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불할 테니까 도와달라고 부탁하더라.”

“데피리스 교단이 아니라 자네들에게?”

“그쪽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뭐, 워낙에 도둑놈 같은 놈들이 많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데일이 불안한 표정으로 독촉하듯이 물었다.

“어떻게 마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달 꼬박꼬박 잊어버리지 않고 수술비를 보내줘서 완치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어. 그런데…무슨 사고가 있었는지 하필이면 마지막 중요한 고비를 앞두고 연락이 끊어져 버렸어. 우리도 다 고친 환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보기는 했는데 도저히 수술할 장비를 마련할 여력이 안 돼서…”

“그, 그게 며칠 전이었습니까?”

“일주일 전이야.”

“그럴 수가…”

털썩!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고 힘이 풀린 소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도련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책임을 느끼지 마십시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선생님? 저만 아니었다면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챈 노먼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폴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너희들은 도대체 여기에 뭐하러…”

“누누이 말하지만 네 녀석은 알 필요가 없어.”

“이 새끼가 진짜!!!”

“아무래도 눈치 없이 너무 오래 머무른 모양이군. 신세를 졌네, 이만 실례하도록 하지.”

짝!

크라테스가 그렇게 말하며 손뼉을 쳤다.

“가기는 어디를 마음대로 가려고…큭!”

주저앉은 데일을 일으켜 세워서 도망치려고 하자 어깨를 붙잡아서 멈추려고 했지만,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무장들이 사이를 갈라놓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꼬맹아. 저 새끼가 무슨 말을 지껄여도 믿으면 안 돼! 사실과 진실은 달라! 악당 녀석들은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사실을 진실인 것처럼 늘어놓아서 속이려고 하니까…”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크라테스는 마법을 사용해서 겁을 먹은 데일의 청력을 차단해버렸다.

신전 뒤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

여전히 역겨운 장소였지만 시야가 탁 트인 넓은 곳에서 울먹거리는 소년을 다독이며 진정시켜주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님?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소자를 이곳에 보내신 겁니까?”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도련님께서는 폴리 모녀의 죽음에 어떤 책임도 느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귀태??라는 말씀을 들어보셨습니까?”

좌우로 도리질을 했다.

“처음 듣습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폴리도, 그녀의 모친도 이 세상에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버러지들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도련님은 잘하신 겁니다. 세상을 위해서 필요 없는 존재들을 제거해주셨으니까요.”

“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황당한 주장에 너무 놀란 데일이 말을 더듬었다.

“아까 데피리스 교단이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죠?”

“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일단은 속는 셈 치고 들어보시죠. 의외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 보일 겁니다.”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들어보겠습니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궁지에 몰린 소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실수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크라테스는 손가락으로 환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허허벌판을 가리켜 보였다.

“보이십니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하고 역겨운 오물에 덮여버려서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정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저주받은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군요.”

“이런 환경 때문에 이곳에서는 해마다 정체 모를 수많은 질병이 발생합니다. 그중에 심각한 것들은 설치류나 새, 인간을 매개로 마을, 도시, 국가로 퍼져나가서 수천, 수만 명을 죽이는 전염병 대유행을 초래합니다. 이곳은 그야말로 질병의 산란못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그렇다면 이곳을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되는 게 아닙니까?”

“방치하지 않으면 어쩌시겠습니까?”

“교단이 나서야지요! 지금 당장 병자들을 치료하고 주변 일대를 정화해야…”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지금 당장 신전을 개방하고 사제들을 총동원하면 뭐, 이번 한 번 정도는 여기에 모인 병자들을 모조리 치료하고 오염된 땅을 정화하는 것이 가능하겠죠. 그것 때문에 교단의 재산과 약재가 바닥나서 빈털터리가 되어버리기는 하지만 사람 목숨을 구하는 고귀한 행위에 감히 그따위 계산을 끌어들여서 되겠습니까?”

“그것은…”

데일은 그가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다물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오르드리 신전 아니, 그때는 신전도 아니었군요. 데피리스 교단이 이곳에 처음으로 조그마한 기도원을 세웠을 당시에는 이 일대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었다고 합니다. 곡창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녹음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황금 밀밭이 펼쳐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그렇다면 지금은 어째서 이렇게…”

크라테스가 아래쪽에 있는 군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저기에 있는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들어와서 모조리 파괴해버린 겁니다. 막아도, 막아도 신의 자비를 구걸하는 난민들이 끝없이 쏟아져 들어와서 이 땅에 역병을 퍼트리고 곡식과 가축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습니다. 돈을 지불하고요? 아니요! 닥치는 대로 훔치고 약탈하고 원래 살던 주민들의 삶과 터전을 모조리 빼앗아서 이곳에서 쫓아내 버린 겁니다! 그들은 걸어 다니는 메뚜기 떼요, 자연재해하고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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