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화 〉 홀로세 대멸종(6)
* * *
빈민 구제소 앞에는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서고 있었다.
하나같이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나약한 병자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센 사람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앞사람을 밀치며 새치기를 했다.
하지만 이런 정도는 약과다.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는 사제들의 물건을 슬그머니 훔치는 좀도둑들도 있고, 사소한 일에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면서 난동을 부리다가 성기사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서 비탈 아래로 내던져졌다.
그들이 사는 꼬라지를 살펴보면 이것마저도 양반.
강간, 살인, 약탈과 폭력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만연해 있고, 정체불명의 고기 건더기를 역겨운 오수로 우려낸 스프를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치우는 모습은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일의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폴리가 이렇게 끔찍한 곳에서 태어났다니…’
바닥에도 바닥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드는 광경.
망막에 새겨지는 모습 하나하나가 너무도 끔찍하고 추악했다.
처음에는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저지르는 행동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역겨움과 혐오감에 비위가 상했다.
벌컥!
사무실의 주인이 돌아온 것은 그때의 일이었다.
“깔끔하게도 치워주셨군. 이래서 배신자 팔자가 상팔자라니까?”
“빈정거리지 말고 이거나 받아라.”
쩔그럭
크라테스가 두툼한 돈주머니를 던졌다.
냉큼 받아서 살펴보고 휘파람을 부는 노먼.
“이야~ 역시 천년 가문의 뒤를 닦아주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그래, 그래. 양심을 팔려면 이 정도는 받아야 수지가 맞지. 오리마!!”
벌컥!
“부르셨어요? 노먼 사제…꺄악?! 아무리 개인 사무실이라고 해도 웃통을 벗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손님들이 계시는데 창피하게 정말…”
방으로 들어온 보조자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기는. 됐고 이거나 받아! 힘 좀 쓰는 애들 서너 명 신전으로 데리고 가서 필요한 물건 좀 넉넉하게 사와!”
“어머, 세상에! 이게 웬 돈이래요? 설마 그쪽의 손님분께서…? 어머나! 오호호호. 이것 참, 제가 눈치도 없이 실례했네요. 지금 바로 차하고 다과를 가져올 테니 느긋하게 대화를…”
“괜찮습니다.”
“맞아! 필요 없으니까 빨리 갔다 오기나 해.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한 처지에 차하고 다과는 무슨…아얏!”
노먼의 허벅지살을 힘차게 꼬집은 여성은 가식적인 태도 연거푸 허리를 숙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 모습을 보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하는 데일.
“보급품을 신전에서 구매하다니…빈민 구제소는 데피리스 교단에서 운영하는 게 아닙니까?”
“수전노 새끼들이 잘도 그러시겠다! 세끼 밥보다 은화를 좋아하는 녀석들이 헌금 한 푼 내지 못하는 거렁뱅이들한테 눈썹 하나라도 까딱할 것 같아? 여기가 괜히 신전의 뒤편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고. 앞쪽은 유료! 뒤쪽은 무료! 오케이?”
“빈민 구제소를 운영하는 것은 줄리아 교단의 재량입니다.”
“그럴 수가…”
“됐고.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살벌한 형씨들은 내보내시지? 뭐처럼 방에서 나는 쉰내가 사라졌는데 칙칙한 사내새끼들만 우글거리니까 숨을 쉬는 것이 불편하잖아.”
“…나가 있어라.”
크라테스가 명령을 내리자 무장들은 감정이 없는 로봇들처럼 조용히 경례하고 일사불란하게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진짜로 출세하셨네?”
“아니, 여전히 파리 목숨에 불과해. 다만 이번 임무에 한정해서 높으신 분에게 권한을 위임받았을 뿐일세.”
“흐음. 이 도련님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두꺼비처럼 큼직한 눈으로 쳐다보자 데일은 겁먹은 표정으로 주치의 뒤에 숨어버렸다.
“파고들지 말게. 자네가 알아봤자 좋을 것 없어.”
“그러니까 저 돈은 입막음 비용이라고?”
“알아들었으면 다물게. 걱정하지 않아도 성찬식만 구경하고 얌전하게 떠나주도록 하지.”
“…뉘 집 자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정교육 한 번 해괴망측하게도 한다. 뭐, 좋아. 어차피 내 일도 아니니까!”
노먼은 그렇게 말하고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저기…”
“뭐냐, 꼬맹아?”
“아래층이 굉장히 바쁜 것 같던데 여기에서 이러고 계셔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돌아가봤자 누구 하나도 못살려. 약품은 바닥났고 환자한테 먹일 죽 한 그릇도 만들지 못하는 형편이거든. 아니꼽기는 해도 저 새끼 기부가 아니었으면 내일이라고 구제소를 정리하고 철수할 생각이었어.”
“그, 그렇게 형편이 어려우시다면 제가 한 번 어머니에게 기부를 소청해 보겠습니다.”
“오??? 밤톨 같은 새끼가 싹수가 있네? 귀족 도련님치고는 영양 상태가 부실해 보이기는 해도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범상치 않은 귀티와 기품이 흐르고…어머님의 함자가 어떻게 되시지?틀림없이 명망도 높고 훌륭한 분이실…”
“거기까지만 해라.”
크라테스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말을 멈추게 했다.
“쳇.”
“도련님도 그 멧돼지 같은 녀석에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제 곧 성찬식 행사가 시작되니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선생님.”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다가가 섰다.
성찬식은 세상 만물을 창조한 빛의 신 데피리스를 찬양하기 위해서 1년에 4번 열리는 계절 감사제다.
모든 귀족이 의무적으로 참가할 정도로 중요한 행사는 아니지만, 유레시아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신도와 사제들을 보유하고 있는 교단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자리기 때문에 데일 또한 돌로레스와 함께 수차례 참석한 전력이 있었다.
소년이 알고 있는 성찬식은 언제나 ‘앞쪽’에서 일어나는 행사였다.
허리를 깍듯하게 90도로 숙이는 사제들의 안내를 받아서 편안한 귀빈석에 앉았고, 미사가 끝나면 성가대의 합창과 창조 신화에 관련된 연극을 감상한 다음에 상다리가 휘어질 만한 계절 요리를 대접받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뒤쪽’의 성찬식은 시작부터 모든 것이 달랐다.
웅장한 신전은 깎아지른듯한 절벽 위에 수직으로 높게 서 있다.
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그 아래로 구름떼처럼 몰려가서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빛의 은총이 있으라!!]
[위대한 빛의 신 데피리스여. 부디 불쌍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구원! 구원! 구원! 구원! 구원! 구원!]
“쳇.”
쿠구구구구구궁
노먼이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신전 뒤쪽의 벽면이 열리며 커다란 발판이 앞으로 뻗어 나왔다.
그 위로 성기사와 사제들을 대동하고 걸어오는 화려한 법의의 주교.
연단 같은 장소에 올라서다니 커다란 스태프를 내려찍으면서 힘차게 목소리를 높였다.
[유일신 데피리스를 찬양하라!!]
우오오오오오오오!!
[데피리스님 만세! 교단이여 영원하라!!!]
[구원! 구원! 구원! 구원! 구원! 구원!]
[목소리가 작다. 그것으로 버러지만도 못한 네놈들의 목소리가 천상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더 소리를 질러라! 더 간절하고 절실하게! 하늘을 우러러 포효하여 우리들의 유일신을 찬양하라!!!]
“무, 무슨…”
터무니없는 연설 내용에 화들짝 놀란 데일이 크라테스와 노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년이 놀라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데피리스를 유일신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모든 사람은 빛의 자손으로 신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던 교단이 사람들을 버러지만도 못하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것처럼 무표정했다.
심지어 그런 취급을 당하는 당사자들은 주교의 외침에 화답하기라도 하듯이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며 데피리스를 찬양했다.
그렇게 수십여 분.
광란에 가까운 아우성이 끝나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 터져버린 것을 확인한 주교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너희들의 기도를 우리들의 유일신께서 들어주셨노라!]
와아아아아아아아!!
[온 세상천지에 데피리스님의 위광이 드리우지 않는 곳은 없도다! 버려지고 낙인찍혀 죽어가는 역겨운 망자들이여! 세상에 가장 쓸모없는 그대들조차 그 이적을 믿어 의심치 않는가?!]
[믿습니다!!!]
[영광스러운 구원의 날에 그분께서 죽은 자들의 나라에 임하실 것이며 그대들을 되살려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가?!]
[믿습니다아아아아!!!]
[그렇다면 그대들에게 천국의 빵과 와인을 하사하겠노라! 기쁨과 환희에 열광하며 쏟아지는 은혜에 감사를 바쳐라!!]
우르르르르르르르
연설이 끝나자 음식 바구니를 가져온 종자들이 내용물을 절벽 아래로 흔들어서 쏟아붓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데피리스님 만세!!]
비탈을 데굴데굴 굴러서 떨어지는 술과 음식들.
사람들의 숫자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고 땅바닥을 구르며 깨지거나 흙투성이로 더럽혀져 버리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다운 음식을 석 달 만에 구경하는 사람들은 앞다퉈서 거기에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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